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시 552

동백마을에 동백꽃이 피면 - 김희숙

동백마을에 동백꽃이 피면 - 김희숙 동죽조개 맛이 깊어지면, 서쪽 바닷가 동백마을에 가리라. 마을 앞 고두섬 주변으로 바닷물이 빠져나가면 갯벌에 숨구멍이 보이고 그곳을 호미로 깊숙이 파내 보리다. 부지런히 뻘 속을 뒤지면 봄볕 품은 동죽이 물총을 쏘아대며 손에 잡힐 것이다. 혹여 귀한 백합조개라도 찾는다면 산삼을 발견한 심마니처럼 소리쳐보리라. 심봤다! 걸어가도 좋으리라. 느직한 걸음걸이에 맞춰가는 길이니 지나치는 풍경을 차곡차곡 눈에 넣기에 좋으리라. 드문드문 다니는 군내버스 시간과 바다의 물때가 다른 날에는 천천히 걸어서 동백마을로 들어가리라. 배낭에 기다란 물장화는 개켜 챙기고 김 올린 모시송편을 찬합에 넣고 보온병에 팔팔 끓인 커피물을 내려 등에 짊어져야지. 자동차 길은 산허리를 휘돌아가니 가로지..

좋은 시 2024.02.20

들 / 민혜

들 / 민혜 빈들에 서면 왠지 안도의 숨이 나온다. 추수 끝난 벌판엔 아직 분망했던 잔재가 남아 있지만 새봄이 오기까지 들은 긴 휴식에 들어간다. 나는 때로 늦가을의 빈들을 찾아 그 텅 빈 휴지기를 망연히 바라보곤 하였다. 허허롭고 황량하기까지 한 들녘을 향해 한 자락 삶의 고단함을 내려놓을 때면 알 수 없는 안식의 숨이 가슴 저 밑으로부터 새어 나오곤 했다. 들은 길게 누워 모처럼의 한유를 누리는 것 같았다. 자식들을 품은 어미인 양 들은 언제나 숙명의 언저리를 뜨지 못했다. 그 자리를 지켜가며 숱한 새끼들을 키워내고 살찌워냈다. 그러다 때가 되면 어디론가 떠나보내곤 했다. 재주는 곰이 부렸으나 주머니는 왕서방이 챙기는 것처럼 들은 늘 모든 걸 내어주고 빈 가슴으로 황혼을 맞는다. 곁을 스쳐가는 냇물이..

좋은 시 2024.02.20

삼우 무렵 - 김사인

삼우 무렵 - 김사인 ​ ​ 서리태 한두홉을 냄비에 볶습니다. 서리태를 볶아 와 팔순의 아버지와 작은아들 나와 손녀아이가 둘러앉아 콩을 먹습니다. 어머니는 가시고 장맛비가 오는데 갓 올린 봉분 안부를 아무도 묻지 않고 오독오독 콩을 깨뭅니다. 콩그릇 곁으로 삼대가 둘러앉아 찧고 까부르는 테레비, 테레비만 멀거니 건너다봅니다. ​ ​ ​ ​ * 삼우제(三虞祭): 장사 마친 뒤 세 번째 날의 제사. ​ ​ ​ 하필 장맛비 오는 철이었나. 어머니 봉분은 무사한가, 아무도 묻지 않고 볶은 콩이나 깨문다. 낼 모레가 어머니 첫 기일(忌日)인데, 책 쓴다고 산골짜기에 박혀 있으니 내 처지도 딱하다. 남루하기가 굴 파고 들어앉은 들짐승 꼬락서니나 다름없다. 팔순 아버지와 딸이 있다면 서리태 한두 홉 볶아 오독오독 깨..

좋은 시 2024.02.18

누룽지/정경해

누룽지/정경해 삶이 누룽지 같을 때가 있다 이제 막다른 길이라며 솥을 껴안고 바짝 눌러 붙어 떼를 쓰는 누룽지 같은 으르고 달래고 속을 박박 긁어 봐도 제 말이 옳다 우기는 홧김에 푸념 가득 물 한 바가지 확 끼얹으면 눈물 퉁퉁 반성하며 마음 풀고 일어서는 때로는 모진 삶이 미워 등짝 한번 갈기고 싶지만 돌이켜 보면 구수한 날이 더 많았던 게 삶이다

좋은 시 2024.02.18

가을날 - 김사인

가을날 - 김사인 ​ ​ 좋지 가을볕은 뽀뿌링 호청같이 깔깔하지. 가을볕은 차 젊은 나이에 혼자된 재종숙모 같지. 허전하고 한가하지. ​ 빈 들 너머 버스는 달려가고 물방개처럼 추수 끝난 나락 대궁을 나는 뽁뽁 눌러 밟았네. 피는 먼지구름 위로 하늘빛은 고요 ​ 돌이킬 수 없었네 아무도 오지 않던 가을날. ​ ​ ​ ​ ​ 이 시에 무슨 말을 더 얹겠는가. 다만 오늘 하루는 잠시 창문을 열고 손을 내밀어 보자. 손을 내밀고 손가락들을 부벼 보자.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그러나 이미 내 손을 서운하게도 감싸고 있는 차갑고 까끌까끌한 다 늦은 가을볕, 그 서늘하고 서늘해서 허전하고 허전해서 한가한 빛살들을 가슴 한편에다 가만히 대 보자. 텅 빈 마루 끝에 혼자 앉아 저 멀리 단풍도 저물어 온통 비어만 가..

좋은 시 2024.02.17

팔짱을 끼다/정상미

팔짱을 끼다 정상미 요즘은 그렇다 외로워지고 싶어 팔장을 낀다 혼자서 팔짱을 끼는 것은 흔들리는 나를 내가 붙들고 가는 것이다 차가워지는 내가 싫어서 내가 나를 데우는 것이다 7년 사귄 애인이 안개 속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을 때 나를 추스르려 팔짱을 낀다 박 팀장에게 서류뭉치로 얻어맞고 내가 나를 어쩔 수 없을 때 기우뚱하지 않으려 팔짱을 낀다 팔짱을 끼면 내가 더 촘촘해진다 단단해진 팔짱은 애인에게 긁히고 팀장에게 찔려온 나를 지그시 눌러준다 팔짱을 끼면 내가 도도해진다 눈에는 힘을 주고 허리를 꼿꼿이 세운다 애인 같은 거 팀장 같은 거 별 거 아니라며 입을 앙다물고 깨진 어깨를 올린다 팔짱이 나를 밀고 간다 가끔은 조금 거만해 보여도 좋다 시작노트 언제부턴가 팔짱을 끼지 않으면 불안했다. 빈손은 날 ..

좋은 시 2024.02.17

질그릇 - 윤석산

​ 질그릇 - 윤석산 ​ 경주박물관 한 귀퉁이, 조명마저 다소 비켜간 자리 못생긴 질그릇 하나 놓여 있다. 본래부터 그 자리가 제 자리인 양 자리를 잡고 앉은 질그릇. 아무것도 보일 것 없는 속, 모두 드러내놓고 그저 그렇게 놓여져 있다. ​ 있는 속, 없는 속 모두 드러내놓고 사는 요즘. 아무리 속 다 드러내놔도 들여다보는 이 하나도 없는, 지지리 못난 질그릇 하나 세상 한 귀퉁이, 언제부터인가 그렇게 자리하고 있다. ​ 尹錫山 시집『나는 지금 운전 중』 ​ 있는 속, 없는 속 모두 드러내놓고 살아야 그나마 간신히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다. 속이 깊어 그 속을 다 들여다볼 수 없거나 속이 얕아서 다른 사람들에게 쉽게 그 속을 간파당하거나 간에, 어쩔 수 없이 속을 드러내야만 다른 사람들에게 ‘나’의 쓰..

좋은 시 2024.02.12

화암사, 내 사랑 - 안도현

화암사, 내 사랑 - 안도현 ​ 인간세(人間世) 바깥에 있는 줄 알았습니다 처음에는 나를 미워하는지 턱 돌아앉아 곁눈질 한번 보내오지 않았습니다. ​ 나는 그 화암사를 찾아가기로 하였습니다 세상한테 쫓기어 산속으로 도망가는 게 아니라 마음이 이끄는 길로 가고 싶었습니다 계곡이 나오면 외나무다리가 되고 벼랑이 막아서면 허리를 낮추었습니다. ​ 마을의 흙먼지를 잊어먹을 때까지 걸으니까 산은 슬쩍, 풍경의 한 귀퉁이를 보여주었습니다 구름한테 들키지 않으려고 구름 속에 주춧돌을 놓은 잘 늙은 절 한 채 ​ 그 절집 안으로 발을 들여 놓는 순간 그 절집 형체도 이름도 없어지고, 구름의 어깨를 치고가는 불명산 능선 한 자락 같은 참회가 가슴을 때리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마을에서 온 햇볕이 화암사 안마당에 먼저 와 ..

좋은 시 2024.02.11

멸치 - 김태정

멸치 - 김태정 ​ ​ 네 뼈로 내 뼈를 세우리 네 살로 내 살을 보태리 네 몸을 이루는 바다로 삶의 부력을 완성하리 은빛 비늘의 눈부심으로 무디어진 내 눈물을 벼리리 어느날 문득 육지를 보아버린 네 그리움으로 메마른 서정을 적시리 ​ 그리하여 어느 궁핍한 저녁 한소끔 들끓어오르는 국냄비 생의 한때 격정이 지나 꽃잎처럼 여려지는 그 살과 뼈는 고즈넉한 비린내로 한 세상 가득하여, ​ 두 손 모아 네 몸엣것 받으리 뼈라고 할 것도 없는 그 뼈와 살이라고 할 것도 없는 그 살과 차마 내지르지 못하여 삼켜버린 비명까지 ​ ​ ​ ​ ​ ​ 올해 여름에도 삼계탕을 먹었다. 이 집 삼계탕은 참 부드럽고 쫄깃하다고, 땀 흘리며 뼈를 발라내며 말했다. 그 닭한테 뭐라고 해야 하나. 한평생 사는 동안 내 이빨이 씹은 ..

좋은 시 2024.02.11

식당 의자 - 문인수

식당 의자 - 문인수 ​ ​ 장맛비 속에, 수성 못 유원지 도로가에, 삼초식당 천막 안에, 흰 플라스틱 의자 하나 몇 날 며칠 그대로 앉아있다. 뼈만 남아 덜거덕거리던 소리도 비에 씻겼는지 없다. 부산하게 끌려다니지 않으니, 앙상한 다리 네 개가 이제 또렷하게 보인다. ​ 털도 없고 짖지도 않는 저 의자, 꼬리 치며 펄쩍 뛰어오르거나 슬슬 기지도 않는 저 의자, 오히려 잠잠 백합 핀 것 같다. 오랜 충복을 부를 때처럼 마땅한 이름 하나 별도로 붙여주고 싶은 저 의자, 속을 다 파낸 걸까, 비 맞아도 일절 구시렁거리지 않는다. ​ 상당기간 실로 모처럼 편안한, 등받이며 팔걸이가 있는 저 의자, 여름의 엉덩일까, 꽉 찬 먹구름이 무지근하게 내 마음을 자꾸 뭉게뭉게 뭉갠다. 생활이 그렇다. 나도 요즘 휴가에 ..

좋은 시 2024.02.11

어깨너머라는 말은 - 박지웅

어깨너머라는 말은 - 박지웅 ​ ​ 어깨너머라는 말은 얼마나 부드러운가 아무 힘 들이지 않고 문질러보는 어깨너머라는 말 누구도 쫓아내지 않고 쫓겨나지 않는 아주 넓은 말 매달리지도 붙들지도 않고 그저 끔벅끔벅 앉아 있다가 훌훌 날아가도 누구 하나 알지 못하는 깃털 같은 말 먼먼 구름의 어깨너머 있는 달마냥 은근한 말 어깨너머라는 말은 얼마나 은은한가 봄이 흰 눈썹으로 벚나무 어깨에 앉아 있는 말 유모차를 보드랍게 밀며 한 걸음 한 걸음 저승에 내려놓는 노인 걸음만치 느린 말 앞선 개울물 어깨너머 뒤따라 흐르는 물결의 말 풀들이 바람 따라 서로 어깨너머 춤추듯 편하게 섬기다가 때로 하품처럼 떠나면 그뿐인 말 들이닥칠 일도 매섭게 마주칠 일도 없어 어깨너머라는 말은 그저 다가가 천천히 익히는 말 뒤에서 어슬..

좋은 시 2024.02.11

슬픔이 하는 일 - 이영광

슬픔이 하는 일 - 이영광 ​ ​ 슬픔은 도적처럼 다녀간다 잡을 수가 없다 몸이 끓인 불, 울음이 꽉 눌러 터뜨리려 하면 어디론가 빠져 달아나버린다 뒤늦은 몸이 한참을 젖다 시든다 슬픔은 눈에 비친 것보다는 늘 더 가까이 있지만, 깨질 듯 오래 웃고 난 다음이나 까맣게 저를 잊은 어느 황혼, 방심한 고요의 끝물에도 눈가에 슬쩍 눈물을 묻혀두고는 어느 결에 사라지고 없다 슬픔이 와서 하는 일이란 겨우 울음에서 소리를 훔쳐내는 일 ​ ​ ​ ​ ​ 울음은 몸이 끓인 불이에요. 울음이 내는 소리를 울음이 담긴 몸이 들어요. 몸은 점점 더 뜨거워지고 몸이 끓인 불을 식히느라 울음은 또 계속 나오지요. ​ 슬픔은 무엇인가요? 안쪽으로부터의 통증. 먼 곳에서부터 스며든 습기. 젖고 난 뒤 시들 때까지 습기를 놓치지..

좋은 시 2024.02.11

오십세 - 전건호

오십세 - 전건호 ​ ​ 금방 들은 것도 오십초면 증발된다 내가 나를 믿지 못하고 왼손이 오른 손을 믿지 못한다 전화를 걸어놓고 상대에게 누구냐고 묻는다 일 년 전 감추어둔 쌈짓돈을 아직도 찾지 못하는 비상한 은닉술에 동네참새들은 닭대가리라는 둥 까마귀 고기를 먹었느냐는 둥 쪼아댄다 닭이든 까마귀든 허공을 나는 새 아닌가 나를 둘러싼 시공이 가벼워진다 내게 착지했던 생각들 깃털이 돋아났는지 고개 돌리는 순간 날아가 버린다 잘 잃어버린다는 것은 무겁게 짓누르던 잡념이 휘발되는 것 텅 빈 풍선이 되어 미풍에도 풀풀 눈짓만 줘도 포르르 바람만 불어도 기우뚱 한다 기억의 한계가 0을 향해 달릴수록 무념의 경지에 달하는 듯싶다 붙잡으려 했던 것들은 바람 부는 대로 날아간다 0을 향해 초읽기 진행되는 동안 금방 뱉..

좋은 시 2024.02.11

​꽃게 먹는 저녁 - 김화순

​ ​ 꽃게 먹는 저녁 - 김화순 ​ ​ 펄떡이는 꽃게 몇 마리 산다 꽃게는 톱밥을 밀어내며 안간힘으로 버틴다 사방으로 날리는 절체절명 유보된 죽음이 시간을 조금씩 자르고 있다 집게발이 허공을 잘라내고 시선을 잘라내고 저녁 6시를 잘라내자 시침과 분침이 기우뚱, 중심을 잃는다 서쪽 하늘이 서서히 피를 흘린다 집게발이 햇살의 마지막 온기를 싹둑, 자른다 잘린 하루치의 바다가 한사코 냄비 속으로 풀어진다 부글부글 비어져 나오는 게거품 집게발의 사투가 차려낸 저녁 식탁은 달그락 달그락 꽃내음 비릿하다 삶은 누군가의 죽음이 가져다준 에너지라며 나는 게눈 감춘 듯 먹어치운 죽음으로 하루를 연장한다 죽음이 나를 새롭게 편집한다 ​ ​ ​ ​ ​ 시인은 “꽃게 몇 마리”를 사다가 그것이 죽어 냄비 속에 들어가 음식이..

좋은 시 2024.02.11

몰이꾼과 저격수 - 문혜진

​ 몰이꾼과 저격수 - 문혜진 ​ ​ 돌능금나무 둥치 세 들어 살고 싶다던 남자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에 고여 있어, 그 목소리는 바다에 내리는 눈, 얼음집 내벽 녹았다 다시 얼어붙은 물방울, 너는 잠시 빛나고, 나는 적막을 품고, 허기의 기록들이 마침내 느슨하게 흐르고, 달빛의 윤곽 너머 안개 낀 밤의 아늑한 사라짐들, 반역들, 불분명한 용서들 ​ 우리는 서로 쫓는 자와 쫓기는 자, 겨냥하는 자와 숨는 자, 서로의 지형도를 숨긴 채, 표적을 향해 달려들지만 대열은 흩어지고, 표적은 간 곳 없고, 게릴라성 호우와 수치심에 대해, 먼 훗날 빙하에 갇힌 채 얼어버린 심장을 뚫고, 내 사랑의 저격을 완성시킬 수 있을까! ​ ​ ​ ​ ​ - 문혜진 시집 《혜성의 냄새》, 2017 ​ ​ ​ ​ ​ 〈몰이꾼과 ..

좋은 시 2024.02.10

기억은 어항이 아니라서 - 신현림

기억은 어항이 아니라서 - 신현림 ​ ​ 기억은 어항이 아니라서 어항이 되어 사랑의 역사를 담고 싶어 해 세상에 사랑 주며 떠난 사람들의 역사를 ​ 어디에서 왔는지 묻지 않기에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이들이 느는 시대에 우리가 물고기인지 사람인지도 잘 모르는 시간에 다치지 않고, 아프지 않으려고 쉽게 만나고 헤어지는 시간에 ​ 죽은 지 33년이 지나도 그 아들과 사는 어머니 헤어진 지 3년이 지나도 그 애인과 사는 사내 죽은 남편 따라 무덤의 제비꽃으로 핀 아내 사랑하는 이들을 가슴에 다 담지 못해 죽어서도 그의 은어 떼를 품고 싶어 해 ​ 기억은 어항이 아니라서 어항이 되고 싶어 정든 추억을 품고 싶어 흔들리고 싶어 천천히 모빌처럼 ​ ​ ​ ​ ​ 『문학사상』2013년 11월호 ​ ​ ​ ​ ​ 기억..

좋은 시 2024.02.10

​사람은 죽어서도 싸운다 - 최서림

​ 사람은 죽어서도 싸운다 - 최서림 ​ ​ 죽은 자가 산 자를 위해 무덤에서 불려나와 대신 싸운다 산 자들이 죽은 자들의 말을 찾아내어 싸운다 삶은 죽어 썩어져도 말은 죽지도 썩지도 못한다 죽은 자의 말이 창이 되고 방패가 된다 ​ 왕권이냐 민본이냐 이방원과 정도전이 아직도 TV에서 싸우고 있다 미국식 자본주의냐, 제3의 길이냐 이승만과 조봉암이 지금까지 역사책 속에서 싸우고 있다 개발독재냐, 민주주의냐 박정희와 장준하가 프레스센터에서 살기 등등 핏대를 올리고 있다 ​ 세상은 말들의 싸움터 이긴 말이 패배한 말의 배를 밟고서 히히덕거린다 ​ 까맣게들 잊고 있다가 선거철만 되면, 좌우 할 것 없이 죄다 상주라도 되는 양 검은 옷들을 걸쳐 입고서 효창동 외진 김구 묘소를 찾는다 어치도 동박새도 민망한지 쓸..

좋은 시 2024.02.10

토막말 - 정양

토막말 - 정양 ​ ​ 가을 바닷가에 누가 써놓고 간 말 썰물 진 모래밭에 한 줄로 쓴 말 글자가 모두 대문짝만씩해서 하늘에서 읽기가 더 수월할 것 같다 ​ 정순아보고자퍼죽껏다씨펄. ​ 씨펄 근처에 도장 찍힌 발자국이 어지럽다 하늘더러 읽어달라고 이렇게 크게 썼는가 무슨 막말이 이렇게 대책도 없이 아름다운가 손등에 얼음 조각을 녹이며 견디던 시리디 시린 통증이 문득 몸에 감긴다 ​ 둘러보아도 아무도 없는 가을 바다 저만치서 무식한 밀물이 번득이며 온다 바다는 춥고 토막말이 몸에 저리다 얼음 조각처럼 사라질 토막말을 저녁놀이 진저리치며 새겨 읽는다 ​ ​ ​ ​ 시집『살아 있는 것들의 무게』(창작과 비평사,1997) ​ ​ ​ ​ 시를 참하게 보일 요량으로 부러 시어를 치장할 필요는 없다. 고운 말로 써야..

좋은 시 2024.02.10

독수리 시간 - 김이듬

독수리 시간 - 김이듬 ​ ​ 독수리는 일평생의 중반쯤 도달하면 최고의 맹수가 된다 눈 감고도 쏜살같이 먹이를 낚아챈다 그런 때가 오면 독수리는 반평생 종횡무진 누비던 하늘에서 스스로 떨어져 외진 벼랑이나 깊은 동굴로 사라진다 거기서 제 부리로 자신을 쪼아댄다 무시무시하게 자라버린 암갈색 날개 깃털을 뽑고 뭉툭하게 두꺼워진 발톱을 하나씩하나씩 모조리 뽑아낸다 먹지도 마시지도 않으며 며칠 동안 피를 흘린다 숙달된 비행을 포기한 채 피투성이 몸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기다린다 ​ 이제는 무대에 오르지 않는 아니 캐스팅도 안 되고 오디션 보기도 어중간한 중년여자 연극배우가 술자리에서 내게 들려준 얘기다 너무 취해서 헛소리를 했거나 내가 잘못 옮겼을 수도 있겠지만 아직도 확인해보지 않았다 그냥 믿고 싶어서 경사가 ..

좋은 시 2024.02.10

찰옥수수가 익는 저녁 - 임동윤

찰옥수수가 익는 저녁 - 임동윤 ​ ​ 감자꽃이 시들면서 정수리마다 자글자글 땡볕이 쏟아졌다 장독대가 봉숭아꽃으로 알록달록 손톱물이 들고 마른 꼬투리가 제 몸을 열어 탁 타닥 뒷마당을 흔들 때, 옥수수는 길게 늘어뜨린 턱수염을 하얗게 말리면서 잠자리들은 여름의 끝에서 목말을 탔다 싸리나무 울타리가 조금씩 여위면서 해바라기들이 서쪽으로 깊어지고 있었다 철 이른 고구마가 그늘 쪽으로 키를 늘이면서 작고 여린 몸도 하루가 다르게 튼실해졌다 그때까지,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옥수수 줄기처럼 빠르게 말라가던 어머니는 밤마다 옥수수 키만큼의 높이에 가장 외로운 별들을 하나씩 매달기 시작했다 그런 날 나는 하모니카가 불고 싶어졌다 문득, 아버지가 켜든 불빛이 그리워졌다 그 여름이 저물도록 어머니는 가마솥 가득 모락..

좋은 시 2024.0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