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시 552

재봉골목/최연수

재봉골목 ​ 최연수 ​ ​시접 좁은 집들이 답답한 그림자를 벗어놓은 골목 봄볕이 은밀한 속살까지 훔쳐보자 눈치 빠른 꽃다지가 보도블록 틈으로 한 뼘 여유분을 풀어놓는다 ​ 걸음들이 서둘러 시침과 박음질을 오가고 안경 쓴 민들레가 골목입구부터 노란 단추를 채운다 ​ 꼬박 달려온 노루발이 숨을 고르는 지퍼 풀린 시간 바짝 죄던 마감이 커피를 뽑아 내리면 잠시 농담 속을 서성이는 슬리퍼들이 붉은 입술을 찍는다 ​ 고단한 품이 넘쳐 돌려막기에 바쁜 카드들 골목이 느릿느릿 바람 쐬러 나가면 쪽창을 열어젖힌 채 갖가지 공정에 바쁜 꽃밭, 마감에 채 눈꼽을 떼지 못한 꽃도 있다 ​ 뒤집은 오후에 납기일을 접어 넣고 체불을 오버로크해도 자꾸만 뜯어지는 생의 밑단들 한 톨 한 톨 땀방울을 꿰면 낡은 목장갑처럼 올 풀린 ..

좋은 시 2024.03.30

옥수수를 기다리며 / 황상순​

옥수수를 기다리며 / 황상순 ​ 옥수수를 딸 때면 미안하다 잘 업어 기른 아이 포대기에서 훔쳐 빼내 오듯 조심스레 살며시 당겨도 삐이걱 대문 여는 소리가 난다 ​ 옷을 벗길 때면 죄스럽다 겹겹이 싸맨 저고리 열듯 얼얼 낯이 뜨거워진다 눈을 찌르는 하이얀 젖가슴에 콱, 막혀오는 숨 머릿속이 눈발 어지러운 벌판이 된다 ​ 나이 자신 옥수수 수염을 뜯을 때면 송구스럽다 곱게 기르고 잘 빗질한 수염 이 노옴! 어디다 손을 손길이 멈칫해진다 ​ 고향집 대청마루에 앉아 솥에 든 옥수수를 기다리는 저녁 한참 꾸중을 들은 아이처럼 잠이 쏟아진다 노오랗게 잘 익은 옥수수 꿈 속에서도 배가 따뜻하여, 웃는다 ​

좋은 시 2024.03.26

백년의 오지, 백년의 미로 / 박제영

백년의 오지, 백년의 미로 / 박제영​ ​ 카트만두를 여행하는 것과 카트만두를 사는 일이 다르다는 것을 조금씩 깨닫고 있습니다 수십 년을 살았지만 밑도 끝도 모를 당신이라는 오지를 살아내면서 당신이라는 미로를 살아내면서 아직도 우리는 서로의 중심에 닿지 못했으니 서로의 극점을 찾지 못했으니 어쩌면 우리는 영원히 닿지 못할 서로의 오지를 살고 있다는 것을 서로의 미로를 살고 있다는 것을 이제야 조금씩 깨닫고 있습니다 영원히 닿지 못해도 좋을 백년의 오지, 백년의 미로를 함께 살아내는 것 우리가 백 년을 해로하는 방식일 겁니다 ​

좋은 시 2024.03.26

마지막 봄날에 대한 변명 / 이영옥

마지막 봄날에 대한 변명 / 이영옥 낯익은 집들이 서 있던 자리에 새로운 길이 뚫리고, 누군가 가꾸어 둔 열무밭의 어린 풋것들만 까치발을 들고 봄볕을 쬐고 있다 지붕은 두터운 먼지를 눌러 쓰고 지붕아래 사는 사람들은 이제 서로의 안부조차 묻지 않았다 떠난 자들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이유를 알고있는 오래된 우물만 스스로 제 수위를 줄여 나갔다 붉은 페인트로 철거 날짜가 적힌 금간 담벼락으로 메마른 슬픔이 타고 오르면 기억의 일부가 빠져 나가버린 이 골목에는 먼지 앉은 저녁 햇살이 낮게 지나간다 넓혀진 길의 폭만큼 삶의 자리를 양보해 주었지만 포크레인은 무르익기 시작한 봄을 몇 시간만에 잘게 부수어 버렸다 지붕 위에 혼자 남아있던 검은 얼굴의 폐타이어가 돌아오지 못할 시간들을 공연히 헛 돌리고 타워 크레인..

좋은 시 2024.03.26

완경으로 가는 배 - 오랜 방황의 끝

완경으로 가는 배 - 오랜 방황의 끝 고경자 기대는 잔잔한 빗금으로 만든 그릇입니다 얼굴을 씻어도 지워지지 않는 얼룩은 빗금보다 섬세한 무늬로 햇살의 크기만큼 잘게 부서지는 것은 오랜 시간을 서성댄 증거입니다 왈칵 쏟아내는 울음이 두려워서 눈물을 모른 척 해봐도 번번이 실패라는 누룩이 증식되어 발효되기까지 습지를 떠도는 유목민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생의 굴곡이 아닐까 하여 쉽게 돌아볼 수 없습니다 비로소 완성되어 가는 그림 앞에서도 환하게 웃지 못하는 것은 아직도 이행단계라는 또 다른 건널목이 있어 차단막이 내려진 기찻길 앞에 선 것 같은 초조함 때문일까요 예고 없이 찾아온 빈혈로 쓰러지는 상상을 하면서 때때로 꿈속에서도 이유 없이 쓰러지는 나무를 보았습니다 가마에서 구워진 토기 하나로 명명되어진 ..

좋은 시 2024.03.17

식구/이경림

식구 제 몸이 의자인지도 모르고 옹기종기 모여 있는 의자들과 탁자인지도 모르고 그 가운데 넙적 엎드려 있는 탁자와 장롱인지도 모르고 속에 온갖 것 담고 투박하게 기대 있는 장롱과 침대인지도 모르는 침대와 TV인지도 모르고 중얼거리는 TV와 벽인지도 모르고 허공에 칸을 질러대는 벽들과, 그 벽 속의 물소리와 지붕인지도 모르고 그 위에 수굿이 덮혀 있는 지붕과 그 밑 조그만 화분에 발 오그리고 아슬히 피어나는 제 몸이 꽃인 줄 모르는 꽃들과 그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저 들숨 날숨의 그 속에 캄캄하게 뜨고 지는 햇덩이와 새벽녘 저 혼자 후둑후둑 지는 제 몸이 별인지도 모르는 별들과 그것들 한아가리에 넣고 언젠가 콱 입 닫을 악어 한 마리! 이경림(1947~) 이 시는 “모르는” 것들로 빼곡하다. 시인은 인간의..

좋은 시 2024.03.15

바닥론 / 김나영

바닥론 / 김나영 나는 바닥이 좋다 바닥만 보면 자꾸 드러눕고 싶어진다 바닥난 내 정신의 단면을 들킨 것만 같아 민망하지만 바닥에 누워 책을 보고 있으면 바닥에 누워서 신문을 보고 있으면 나와 바닥이 점점 한 몸을 이루어가는 것 같다 언젠가 침대를 등에 업고 외출했으면 좋겠다고 말하자 식구들은 내 게으름의 수위가 극에 달했다고 혀를 찼지만 지인은 내 몸에 죽음이 가까이 온 것 아니냐고 염려 하지만 그 어느 날 내가 바닥에 잘 드러누운 덕분에 아이가 만들어졌고 내 몸을 납작하게 깔았을 때 집 안에 평화가 오더라 성수대교가 무너진 것도 삼풍백화점이 무너진 것도 알고 보면 모두 바닥이 부실해서 생겨난 일이다 세상의 저변을 조용히 받치고 가는 바닥의 힘을 온 몸으로 전수받기 위하여 나는 매일 바닥에서 뒹군다

좋은 시 2024.03.14

산방일기 / 이상국

산방일기 / 이상국 ​ 새벽 한기에 깨어 마당에 내려서면 녹슨 철사처럼 거친 햇살 아래 늦매미 수십 마리 떨어져 버둥거리고는 했다. 뭘 하다 늦었는지 새벽 찬서리에 생을 다친 그것들을, 사람이나 미물이나 시절을 잘 타고나야 한다며 민박집 늙은 주인은 아무렇게나 비질을 했다. ​ 주인은 산일 가고 물소리와 함께 집을 보며 나는 뒤란 독 속의 뱀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서럽도록 붉은 마가목 열매를 깨물어보기도 했다. 갈숭어가 배밀이를 하다가 하늘이 보고 싶었던지, 어디서 철버덩 소리가 나 내다보면 소리는 갈앉고 파문만 보이고는 했다 ​ 마당 가득한 메밀이며 도토리 멍석에 다람쥐 청설모가 연신 드나든다. 저희 것을 저희가 가져가는데 마치 도둑질하듯 살금살금, 청설모는 덥석덥석 볼따구니가 터져라 물고 간다 ​ 어느..

좋은 시 2024.03.12

사평역(沙平驛)에서 /곽재구

사평역(沙平驛)에서 - 곽재구(1954년 ~ , 광주)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

좋은 시 2024.03.03

물 묵어라 - 전동균​

​ ​ 물 묵어라 - 전동균 ​ ​ ​ ​ 밤새 앓으며 잠을 못 잔 아내와 늦은 아침을 먹는다 삶은 고구마와 바나나를 아내는 지금 제 속의 여자를 떠나보내는 중이다 입술은 갈라지고 얼굴은 퉁퉁 붓고 갑자기 사막으로 쫓겨난 하마 같다 그래도 당신에겐 첫사랑과 어머니가 함께 있어! 라고 말하지 않는다 내색도 않는다 (…) 물 묵어라,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로 물 잔을 건넬 뿐 ​ ​ ​ 갱년기 증세를 견디느라 잠 못 잔 사람은 상태가 말이 아니다. 아침 밥상은 약식이다. 아내를 사막으로 쫓겨난 하마 같다고 안타까워할 뿐 남편은 표 내어 위로하지 않는다. 당연하다. 하지만 고구마는 목이 멘다. '물 묵어라'는 무뚝뚝한 한 마디에 숱한 감정이 배어 있다. 첫사랑이었던 남편도 말을 안 할 뿐 사실은, 정글로 쫓겨난..

좋은 시 2024.03.01

언니들과의 저녁 식사 - 김해자

​ 언니들과의 저녁 식사 - 김해자 ​ ​ ​ 언니들과의 저녁 식사 밥 먹으러 오슈 전화받고 아랫집 갔더니 빗소리 장단 맞춰 톡닥톡닥 도마질 소리 도란도란 둘러앉은 밥상 앞에 달작지근 말소리 늙도 젊도 않은 호박이라 맛나네, 흰소리도 되작이며 겉만 푸르죽죽하지 맘은 파릇파릇한 봄똥이쥬, 맞장구도 한 잎 싸 주며 밥맛 없을 때 숟가락 맞드는 사램만 있어도 넘어가유, 단소리도 쭈욱 들이켜며 달 몇 번 윙크 하고 나믄 여든 살 되쥬? 애썼슈 나이 잡수시느라, 관 속같이 어둑시근한 저녁 수런수런 벙그러지는 웃음소리 불러주셔서 고맙다고, 맛나게 자셔주니께 고맙다고 슬래브 지붕 위에 하냥 떨어지는 빗소리 ​ ​ ​ ​ ​ 김해자 시인이 최근에 시집 을 펴내면서 ‘시인의 말’에 이렇게 썼다. “사람과 꽃과 나비와 알..

좋은 시 2024.03.01

기억 속의 등불 - 청계천 시편 3―춘심이네 집 / 김신용

기억 속의 등불 - 청계천 시편 3―춘심이네 집 / 김신용 ​ ​ ​ 짐보다 빈 지게 위의 허공이 더 무거운 날 고난처럼 후미진 청계천 뒷길 따라 막다른 골목에 이르면 거기 춘심이네 집, 마치 둥지처럼 아늑한 불빛이 고여 있었지 막아선 담벼락엔 지게 서로 몸 포개어 기대 있었고 그 지게를 닮은 사람들, 노가리를 대가리 째 씹으며 술청인 좁은 부엌에 서서 막걸리를 마실 때 춘심이는 부뚜막에 앉아 바느질을 하곤 했었지 잔술울 팔며, 찢겨지고 해진 막벌이꾼들의 작업복을 기워주고 있는 흰 솜털 보송송한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연탄불 위의 노가리처럼 검게 타며 오그라들었고, 뼈 하나 남김없이 나를 씹어 먹고 싶어져 망연히 창밖을 바라보면 시커먼 매연의 하늘, 가슴 가득 차오르는 어스름 속 잔광이듯, 그 티 없이..

좋은 시 2024.03.01

물의 결가부좌 - 이문재

​ 물의 결가부좌 - 이문재 ​ ​ ​ 거기 연못 있느냐 천 개의 달이 빠져도 꿈쩍 않는, 천 개의 달이 빠져 나와도 끄떡 않는 고요하고 깊고 오랜 고임이 거기 아직도 있느냐 ​ 오늘도 거기 있어서 연의 씨앗이 연꽃이게 하고, 밤새 능수버들 늘어지게 하고, 올 여름에도 말간 소년 하나 끌어들일 참이냐 ​ 거기 오늘도 연못이 있어서 구름은 높은 만큼 깊이 비치고, 바람은 부는 만큼만 잔물결 일으키고, 넘치는 만큼만 흘러넘치는, 고요하고 깊고 오래된 물의 결가부좌가 오늘 같은 열엿샛날 신새벽에도 눈뜨고 있느냐 ​ 눈뜨고 있어서, 보름달 이우는 이 신새벽 누가 소리없이 뗏목을 밀지 않느냐, 뗏목에 엎드려 연꽃 사이로 나아가지 않느냐, 연못의 중심으로 스며들지 않느냐, 수천수만의 연꽃들이 몸 여는 소리 들으려,..

좋은 시 2024.03.01

비의 문양 - 윤의섭

비의 문양 - 윤의섭 ​ ​ 빗방울이 떨어질 때까지의 경로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없다 최단거리를 달려왔을지라도 평생을 산 것이다 일설에는 바람의 길을 따라왔을 거라고 한다 해류를 타고 흐른 산란인 듯 어디에 안착한다 정해졌더라도 생식할 가망 없는 무정란인 듯 구름의 영역 너머로 들어선 빗방울은 추락하지 않는 달을 본다 스스로의 길을 따라 휘도는 성운을 본다 귓전을 가르는 바람소리 속에서도 궁륭 가득 흐른 神律을 들으며 빗방울이 어떻게 미쳐 갔는지에 대해선 알려진 바 없다 살점을 떼어 내며 살생의 속도로 치달리는 운명이란 길을 잃고 천공 한가운데서 산화하거나 영문도 모른채 유리창에 머리를 짓찧고 흘러내리거나 하늘길 지나오면서는 같은 구름의 종족과 몸을 섞기도 했다 나란히 떠나왔던 친구는 어느 나무 밑동에 ..

좋은 시 2024.03.01

콩나물 한 봉지 들고 너에게 가기 - 김선우

콩나물 한 봉지 들고 너에게 가기 - 김선우 ​ ​ 가령 이런 것 콩나물시루 지나는 물줄기ㅡ 붙잡으려는ㅡ 콩나물 줄기의 안간힘 물줄기 자나갈 때 솨아아 몸을 늘이는ㅡ 콩나물의 시간 닿을 길 없는 어여쁜 정념 ​ 다시 가령 이런 것 언제 다시 물이 지나갈지 물 주는 손의 마음까진 알 수 없는 의기소침 그래도 다시 물 지나갈 때 기다리며ㅡ 쌔근쌔근한 콩나물 하나씩에 든 여린 그리움 낭창하게 가늘은 목선의 짠함 짠해서 자꾸 놓치는 그래도 놓을 수 없는 ​ 물줄기 지나간다 ​ 다음 순간이 언제 올지 모르므로 생의 전부이듯 뿌리를 쭉 편다 아ㅡ 너를 붙잡고 싶어 요동치는 여리디여린 콩나물 몸속의 역동 ​ 받아, 이거 아삭아삭한 폭풍 한 봉지​ ​ ​ ​ ​ ​ 계간 『서정시학』 2011년 여름호 발표

좋은 시 2024.03.01

튀어 오르다 - 조옥엽

​ 튀어 오르다 - 조옥엽 ​ ​ 박새 떼 날아오르는 탱자나무 사이사이로 올라오는 양지 꽃잎 숨소리 엎질러진 샛길 따라가다 보면 ​ 하눌타리 서너 줄기 무너져가는 돌담 양어깨로 들어 올리다 지쳐 쓰러진 담장에 억지 걸음을 내디딘 양철판과 헌 문짝들, 함박눈 뒤집어쓴 대나무처럼 비틀거리며 오두막을 감싸고 있다 자신을 품어 줄 땅을 향해 경배하고 있는 지붕과 기둥과 마루와 방문과 주인 노파, 시간은 집과 주인의 마음을 한 물결로 흐르게 하느라 얼마나 많은 낮과 밤을 쪼아댔을까 눈매도 앞태도 뒤태도 옆태도 모두 닮았다 ​ 마당을 가로지르는 빨랫줄에 걸린 샤쓰 하나, 오래된 바램처럼 나부끼고 봄볕에 몸을 맡긴 고양이 한 마리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염불하듯 두 발 앞으로 모은다 살구 꽃잎들이 우르르 떼지어 몰려다..

좋은 시 2024.03.01

그 저녁에 대하여 - 송진권

그 저녁에 대하여 - 송진권 ㅡ 못골 19 ​ 뭐라 말해야 하나 그 저녁에 대하여 그 저녁 우리 마당에 그득히 마실 오던 별과 달에 대하여 포실하니 분이 나던 감자 양푼을 달무리처럼 둘러앉은 일가들이며 일가들을 따라온 놓아먹이는 개들과 헝겊 덧대 기운 고무신들에 대하여 김치 얹어 감자를 먹으며 앞섶을 열어 젖을 물리던 목소리 우렁우렁하던 수양고모에 대하여 그 고모를 따라온 꼬리 끝에 흰 점이 배긴 개에 대하여 그걸 다 어떻게 말해야 하나 겨운 졸음 속으로 지그시 눈 감은 소와 구유 속이며 쇠지랑물 속까지 파고들던 별과 달 슬레이트 지붕 너머 묵은 가죽나무가 흩뿌리던 그 저녁 빛의 그윽함에 대하여 뭐라 말할 수 없는 그 저녁의 퍼붓는 졸음 속으로 내리던 감자분 같은 보얀 달빛에 대하여 ​ ​ ​ ​ ​ ​..

좋은 시 2024.03.01

소금창고 - 이문재

소금창고 - 이문재 ​ ​ 염전이 있는 곳 나는 마흔 살 늦가을 평상에 앉아 바다로 가는 길의 끝에다 지그시 힘을 준다 시린 바람이 옛날 노래가 적힌 악보를 넘기고 있다. 바다로 가는 길 따라가던 갈대 마른 꽃들 역광을 받아 한 번 더 피어있다 눈부시다. 소금 창고가 있던 곳 오후 세시의 햇빛이 갯벌위에 수은처럼 굴러다닌다. 북북서진하는 기러기 떼를 세어보는데 젖은 눈에서 눈물이 떨어진다. 염전이 있는 곳 나는 마흔 살 옛날은 가는게 아니고 이렇게 자꾸 오는 것이었다. ​ ​ ​ ​ ​ 시집 『제국호텔』(문학동네, 2004) 중에서 ​ ​ ​ ​ ​ 어른들은 왜 툭하면 옛날이야기를 꺼내는 것일까? 어린 시절, 좀처럼 풀리지 않던 저의 궁금증이었습니다. 이제 조금씩 답을 알 것만도 같습니다. 어쩌면 간단합..

좋은 시 2024.03.01

접는다는 것/권상진

접는다는 것 ​ 권상진 ​ ​ 읽던 책을 쉬어 갈 때 페이지를 반듯하게 접는 버릇이 있다 접혀진 자국이 경계같이 선명하다 ​ 한때 우리 사이를 접으려 한 적이 있다 사선처럼 짧게 만났다가 이내 멀어질 때 국경을 정하듯 감정의 계면에서 선을 그었다 골이 생긴다는 건 또 이런 것일까 ​ 잠시 접어두라는 말은 접어서 경계를 만드는 게 아니라 서로에게 포개지라는 말인 줄을 읽던 책을 접으면서 알았다 ​ 나를 접었어야 옳았다 이미 읽은 너의 줄거리를 다시 들추는 일보다 아직 말하지 못한 내 뒷장을 슬쩍 보여주는 일 실마리는 언제나 내 몫이었던 거다 ​ 접었던 책장을 펴면서 생각해 본다 다시 펼친 기억들이 그때와 다르다 같은 대본을 쥐고서 우리는 어째서 서로 다른 줄거리를 가지게 되었을까 어제는 맞고 오늘은 틀리는..

좋은 시 2024.02.28

먼지는 힘이 세다 외

먼지는 힘이 세다 외 김은옥 먼지는 뿌리가 깊다 버림받아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입김에도 가볍게 날아가지만 돌아와 제자리에 내려앉는다 눈짓만 해도 온몸을 들썩이다가 앉은 자리에서 천 년을 숨죽이기도 한다 오래 묵은 일기장 사이에서 눈물 자국으로 얽어 있다가 돌아가신 어머니 돋보기 위에 내려앉아 흐린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다가 눈 껌벅이며 돌아앉기도 하는 것이다 기쁘고 고운 날에는 낡은 성경책 갈피에 앉아 두 눈 붉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맑은 날 창가에 앉아서 보면 가닥가닥 집안 가득 뻗어 가는 먼지의 흰 뿌리들이 뼈처럼 드러나는 날도 있는 것이다 광인(狂人) 두 눈이 퀭하다 검은 외투 겹겹이 두르고 더벅머리 이마에서 재가 날릴 듯 아무도 어느 곳도 아니면 모든 것을 바라보는 방향을 전혀 알 수 없는 건널목을 ..

좋은 시 2024.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