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시 552

단단한 고요/김선우

단단한 고요 김선우 마른 잎사귀에 도토리알 얼굴 부비는 소리 후두둑 뛰어내려 저마다 멍드는 소리 멍석 위에 나란히 잠든 반들거리는 몸 위로 살짝살짝 늦가을 햇볕 발 디디는 소리 먼 길 날아온 늙은 잠자리 채머리 떠는 소리 멧돌 속에서 껍질 타지면 가슴 동당거리는 소리 사그락사그락 고운 뼛가루 저희끼리 소곤대며 어루만져 주는 소리 보드랍고 찰진 것들 물속에 가라앉으며 안녕 안녕 가벼운 것들에게 이별 인사하는 소리 아궁이 불 위에서 가슴이 확 열리며 저희끼리 다시 엉기는 소리 식어 가며 단단해지며 서로 핥아 주는 소리 도마 위에 다갈빛 도토리묵 한 모 모든 소리들이 흘러 들어간 뒤에 비로소 생겨난 저 고요 저토록 시끄러운, 저토록 단단한, 마른 잎사귀에 숨어 있던 도토리로 시작해서 단단한 도토리묵이 되기까지..

좋은 시 2021.05.05

흉터/양수창

흉터 양수창 함양에 있는 상림공원에서 고목이 된 나무들 가운데 큰 흉터를 간직한 나무를 보았다. 커다란 동굴을 연상케 하는, 그 상처가 얼마나 깊었을까. 아픔은 얼마나 극심했을까. 여러 날, 여러 밤, 역사의 한 복판에서 잠 못 이루고 신열하며 들떠 지냈던 기억이 고스란히 흉터로 남아있다. 아픔을 견디고 상처를 쓸어 덮고, 그렇게 스스로 치유한 흉터. 고목 스스로, 더욱 고풍스럽게, 더욱 우아하고 더욱 품위 있게, 자기 존재 가치를 드러낸, 그 아팠던 흔적. 이름 모를 새들은, 그 아팠던 흉터 속에 들어가 둥지를 틀고 새끼를 낳고 어떤 생애生涯를 살다 떠나갔을까

좋은 시 2021.05.04

바람아래 붉은 강/이영옥

-바람아래 붉은 강/이영옥- 길쯤이 얼어붙은 강위로 아버지의 구식 자전거는 오래된 충복처럼 삐거덕거리며 아버지를 부축해 왔다 오십천 왜가리는 얼음에 발을 심고 한나절을 버텼다 미루나무가 달랑거리는 귀 한 짝을 달고 외롭게 서 있었고 그 모습은 하나같이 바람의 갈기를 붙잡고 떠돌다가 이제 막 황량한 겨울 풍경 앞에 뱉어진 꼴이었다 하교 길에 영덕대교아래에 사는 거지들의 따듯한 저녁을 나는 가끔 훔쳐보았고 청솔가지 태운 연기가 흰 뱀처럼 몸을 비틀며 붉은 강을 건너왔다 한 방향 속에는 얼마나 무수한 방향들이 살고 있었는지 바람이 삶 전체를 뒤로 밀었다가 제자리에 세우면 강바닥에는 어지러운 손금들이 자꾸 태어났다 모두가 하룻밤만 자고나면 떠날 객식구처럼 바람이 뱉어낸 싸락눈처럼 발 없는 귀신처럼 서늘하게 집안..

좋은 시 2021.05.04

옆걸음/이정록

옆걸음/이정록 전깃줄에 새 두 마리 한 마리가 다가가면 다른 한 마리 옆걸음으로 물러선다 서로 밀고 당긴다 먼 산 바라보며 깃이나 추스르는 척 땅바닥 굽어보며 부리나 다듬는 척 삐친 게 아니다 사랑을 나누는 거다 작은 눈망울에 앞산 나무 이파리 가득하고 새털구름 한올 한올 하늘 너머 눈 시려도 작은 몸 가득 콩당콩당 제짝 생각뿐이다 사랑은 옆걸음으로 다가서는 것, 측근이라는 말이 집적집적 치근거리는 몸짓이 이리 아름다울 때 있다 아침 물방울도 새의 발목 따라 쪼르르 몰려다닌다 그중 한 마리가 드디어 야윈 죽지를 낮추자 금강초롱꽃 물방울들 땅바닥을 적신다 팽팽한 활시위 하나가 하늘 높이 한 쌍의 탄두를 쏘아올린다 호박범종 물앵두나무 우듬지에 늙은 호박 하나, 폭설 내내 새들이 다녀간다 툇마루에 앉아 겨우내..

좋은 시 2021.05.03

구두에 대한 예의/이선정

구두에 대한 예의/이선정 삶의 무게를 벗어던진 그들이 오소소 잠든 현관 -꽃길만 걷자 해놓고 흙길만 걷게 해 미안하다 내 낡은 구두 앞에서 묵도하다가 멀리서 힘없이 잠든 말라빠진 구두 한 켤레에 울컥 목이 멘다 -어머니 , 당신은 더 힘드셨군요 삐딱하게 목이 늘어진 구두 한 켤레 깨지 않도록 가지런히 잠자리를 보아 드린다 치킨의 마지막 설법 닭같이 홰를 치고 싶은 날 화가 치밀어 된바람만 풀풀 일으키는 날 열난 가슴 달래려 치킨을 시킨다 내 속의 중심이 반쯤 기울어 무단시 * 어깨가 쳐질 때 닭 뼈다귀라도 채워 자신감 곧추세울까 물렁뼈까지 오독오독 남김없이 씹어 삼킨다 속으로 꾹꾹 눌러 가슴팍에 날아다니던 서슬 퍼런 언어들 양쪽에 날개 달고 기름진 모가지로 꼬끼오 꼬끼오 홰를 치는 밤 빌린 몸으로 도를 ..

좋은 시 2021.05.03

육탁/배한봉

육탁/배한봉 새벽 어판장 어선에서 막 쏟아낸 고기들이 파닥파닥 바닥을 치고 있다 육탁(肉鐸) 같다 더 이상 칠 것이 없어도 결코 치고 싶지 않은 생의 바닥 생애에서 제일 센 힘은 바닥을 칠 때 나온다 나도 한때 바닥을 친 뒤 바닥보다 더 깊고 어둔 바닥을 만난 적이 있다 육탁을 치는 힘으로 살지 못했다는 것을 바닥 치면서 알았다 도다리 광어 우럭들도 바다가 다 제 세상이었던 때 있었을 것이다 내가 무덤 속 같은 검은 비닐봉지의 입을 열자 고기 눈 속으로 어판장 알전구 빛이 심해처럼 캄캄하게 스며들었다 아직도 바다 냄새 싱싱한, 공포 앞에서도 아니 죽어서도 닫을 수 없는 작고 둥근 창문 늘 열려 있어서 눈물 고일 시간도 없었으리라 고이지 못한 그 시간들이 염분을 풀어 바닷물을 저토록 짜게 만들었으리라 누군..

좋은 시 2021.05.03

슬리퍼/이재무

슬리퍼/이재무 슬리퍼를 신을 때마다 슬리퍼처럼 편하고 만만했던 얼굴이 떠오른다 슬리퍼는 슬픈 신발이다 막 신고 다니다 아무렇게나 이곳저곳에 벗어놓는 신발이다 언감생심 어디 먼 곳은커녕 크고 빛나는 자리에는 갈 수 없는 신발이다 기껏해야 집 안팎이나 돌아다니다 너덜너덜해지면 함부로 버려지는 신발이다 슬리퍼를 신을 때마다 안개꽃같이 누군가의 배경으로 살았던 오래된 우물 속처럼 눈 속 가득 수심이 고여있던 얼굴이 떠오른다 이재무 시집 중에서

좋은 시 2021.05.03

간절/이재무

간절 - 이재무(1958~ ) 삶에서 ‘간절’이 빠져나간 뒤 사내는 갑자기 늙기 시작하였다 활어가 품은 알같이 우글거리던 그 많던 ‘간절’을 누가 다 먹어치웠나 ‘간절’이 빠져나간 뒤 몸 쉬 달아오르지 않는다 달아오르지 않으므로 절실하지 않고 절실하지 않으므로 지성을 다할 수 없다 여생을 나무토막처럼 살 수는 없는 일 사내는 ‘간절’을 찾아 나선다 공같이 튀는 탄력을 다시 살아야 한다

좋은 시 2021.05.02

무의탁 못/이경옥

무의탁 못 ―이경옥(1959~ ) 땔감으로 부려놓은 폐자재 서까래에 뒤틀린 대못 하나 불편하게 박혀 있다 녹슬은 시간에 기대어 항변도 변명도 않고 대들보 깊숙이 박혀 안착하지 못하고 한데로 내쳐진 채 노숙으로 뒤척이다 수습할 식구도 없이 잿불 속에 파묻힐 의탁은 못의 운명이다. 어딘가에 박혀야 제 노릇을 하는 못. 무기처럼 단련된 채 박히길 기다린다. 뾰족한 끝과 망치를 받아낼 머리도 못질 끝에 거듭나는 것이다. 그 럴 때는 대못이나 나무못보다 쇠못이 제격이다. '무의탁 못'이 우리 주변의 '무의탁' 삶들을 일깨운다. '폐자재 서까래'속의 못도 의탁이 끝나고 버려진 생. 한때 누군가의 집을 어엿이 받든 '대못'도 다 쓰이고 나니 '잿불 속에 파묻힐' 일만 남은 게다. '수습할 식구도 없이 ' 내쳐진 땔감..

좋은 시 2021.05.02

호박찬가(琥珀讚歌)/우종률

호박찬가(琥珀讚歌)/우종률 이보시오 벗님네들 저기 물건(物件) 형색(行色) 보소 앉은키는 자그만데 배는 저리 처졌는가 대장(隊長) 짓을 시키자니 내세우기 부끄럽고 말단(末端)으로 보내자니 얼굴보기 창피하네 시골버스 올랐더니 뒷자리로 밀어 내네 기사양반(技士兩班) 브레이크 눈치 없이 굴러 가네 어린 것은 멍이 들고 늙은 것은 골병(骨病)드네 가를 박고 모를 차며 빙글빙글 굴러가네 꽃 중에는 너를 두고 꽃 아니라 이르거늘 장미(薔薇)처럼 하나하나 향기(香氣)조차 못 맡겠고 국화(菊花)의 암향(暗香)처럼 눈치조차 못 채누나 벌 잡기 놀이할까 자랑 못할 통꽃이여 없는 듯이 가시 돋은 이파리는 또 어떤가 새색시의 섬섬옥수(纖纖玉手) 흠이 날까 겁이 나네 장만하기 번거로워 먹기조차 귀찮다네 게으른 이 무용지물(無用..

좋은 시 2021.05.02

잎새달 / 권현숙

잎새달 / 권현숙 아파트 그림자에 갇혀 웅크렸던 누옥이 기지개를 켠다. 잎샘 꽃샘 다 물러가도록 쉬지 못한 내복들 채 헹궈지지 않는 독거의 냄새를 풍기며 사월의 볕살 아래 나른하게 흔들린다. 급변하는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버티기가 어디 쉬울까 옹기종기 어깨를 맞대던 이웃들 하나 둘 아파트 숲으로 떠나버리고 외딴 섬으로 남은 누옥의 주인장 끓여댔을 가슴속 켜켜이 쌓인 외로움을, 재롱스런 푸성귀들이 얼마쯤은 달래주기도 하려나. 빛이 밝을수록 속속들이 들여다보이는 남루 새것과 낡은 것의 극명한 대비 도드라지는 경계를 지우려 텃밭은 점점 더 푸르러진다.

좋은 시 2021.05.02

신문/유종인

신문 신문 ―유종인(1968∼ ) 활자들만 모른 체하면 신문은 이리저리 접히는 보자기, 나는 신문이 언론일 때보다 쓸쓸한 마른 보자기일 때가 좋다 그 신문지를 펼쳐놓고 일요일 오후가 제 누에발톱을 툭툭 깎아 내놓을 때가 좋다 어느 날 삼천 원 주고 산 춘란 몇 촉을 그 활자의 만조백관들 위에 펼쳐놓고 썩은 뿌리를 가다듬을 때의 초록이 좋다 예전에 파놓고 쓰지 않는 낙관 돌들 이마에 붉은 인주를 묻혀 흉흉한 사회면 기사에 붉은 장미꽃을 가만히 눌러 피울 때가 좋다 아무래도 굴풋한 날 당신이 푸줏간에서 끊어온 소고기 두어 근 핏물이 밴 활자들 신문지 째로 건넬 때의 그 시장기가 좋다 이젠 신문 위에 당신 손 좀 올려보게 손목부터 다섯 손가락 가만히 초록 사인펜으로 본떠 놓고 혼자일 때 내 손을 가만히 대보는..

좋은 시 2021.05.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