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2024/05/03 8

나이테/최재영

나이테/최재영잘려진 나무를 읽는다분주했던 시절들을 기억하는지선명한 경계사이부풀어 오른 물관이 입술처럼, 붉다남쪽으로 기울어진 동심원은따뜻한 생각만으로도 잎을 틔우는 중이다밤새 별들이 머물다 가는 자리아침이면 신생의 이슬방울들 모여들어온 우주를 가만히 불러 들였으리밤낮없이 당신의 생을 접촉하느라어느 지점 등고선이 급격히 휘어지고거기 어디쯤 둥지를 틀었던새들의 족적도 역력한데,북으로 가는 길이었을까다급한 무늬들의 간격으로 폭설이 휘날린다변방으로 내달리는 서늘한 결의처럼나무들의 행간이 촘촘해지고다시, 뜨거운 한 생을 휘돌아나가는 나이테나무는 죽어서도 생장을 멈추지 않는다숲은 경건한 침묵으로 고요하다▶나이테는 나무의 생장을 알 수 있는 척도다. 잘려진 단면을 보면 나무의 성장과정이 보이고 잘려진 나무에서도 새 ..

좋은 시 2024.05.03

부지깽이/조경숙

부지깽이​​  ​조경숙​​   한때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던 나무였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죽어가는 불씨를 끌어 모아살리는 것이 나의 일생이었다 막힌 숨통을 트며 조금씩 검게 타들어가도 아랑곳하지 않았다마당에 솥을 걸고 돼지를 삶아동네잔치라도 하는 날이면 더욱 바빠졌다 곡식을 널어놓은 멍석을 어슬렁거리는닭들을 내쫓기도 하고마당에 기역 니은을 끼적거리는 연필이 되었다가가끔 길손이 묻는 길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되기도 했다 그렇게 당당하던 나도끝이 까맣게 타들어가 점점 키가 줄고몽당연필처럼 닳아끝내 아궁이속으로 들어가한 줌의 재가 된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그동안 저 캄캄한 무덤으로 숲이 사라졌다토사구팽兎死拘烹기어이 아궁이는 나를 삼킬 것이다

좋은 시 2024.05.03

억새/박은양

억새​​​박은영​​​​흔들릴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억세게 운이 좋은 날은 앞날을 내다볼 수도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나의 흔들림은 비루해서 체머리를 앓는 독거노인의 고독을 닮았다​인생은 혼자인 것이니, 라며 애써 자위를 할수록 모든 날은 으악새 슬피 우는 계절이었다​울음에도 곡조가 있다​그 음계를 따라 새가 둥지를 짓고 울 줄 아는 것들이 알을 깨고 나오는 밤이면 나는 불면에 시달렸다 선대가 그랬듯이 젓가락을 쥔 손은 떨리고 혀끝은 둔해져 발음이 허투루 새어 나갔다​늙어 가고 있구나​마른기침을 하면 어린 새들이 입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허공을 위무하는 날갯짓 아래에서 나는 갈대라는 착각을 하며 여러 해를 살았다 비루한 떨림으로 마디를 세우고 가슴이 벌어지듯 흰 머리카락을 날렸다​나는 억새,억세게 ..

좋은 시 2024.05.03

내 책상 앞의 풍경과 죽비에 대한 헌사/배한봉

내 책상 앞의 풍경과 죽비에 대한 헌사/배한봉    이야기 하나 ; 풍경과 죽비를 위하여  내 책상에 앉으면 두 개의 물건이 보인다. 하나는 풍경(風磬)이고 하나는 죽비(竹篦)다. 풍경은 책상 앞의 베란다와 통하는 거실 문틀에 걸려 있고, 죽비는 책상 옆, 손이 잘 닿는 곳에 있다. 이 풍경과 죽비는 나의 오래된 친구다. 잘들 아시겠지만 풍경과 죽비는 수행자들의 방일이나 나태함을 깨우치는 역할을 한다. 처음 이 풍경과 죽비를 내 곁에 둘 때만 해도 나의 방일과 나태를 경계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어느새 처음의 그 목적은 잊히고 그저 나를 묵묵히 바라보는 친구가 되어 있다. 친구와 포도주는 오래 될수록 좋다는 말이 있다. 오랜 벗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도 있다. 굳이 말하자면 풍경과 죽비도 그..

좋은 수필 2024.05.03

수선집 근처/전다형

수선집 근처​​​​전다형​​​​​​구서1동 산 18번지무허가 간이 수선집이 있었네의수족 아저씨는 십 수년 째주일만 빼고 수선일을 했네나는 팔 부러진 우산을 들고 찾아갔네허름한 문이 굳게 닫혀 있는단골집 돌아서다 어둠 속우두커니 서 있는 입간판에게 물었네수척한 얼굴로 속사정을 털어놓았네꺾어진 골목으로 어둠 몇 장 굴러다니고영문을 모르는 바람이 틈새를 드나들고 있었네맞은 편 산뜻한 수선집 미싱 요란하게푸른 하늘을 박고 있었네찾아준 은혜 잊지 못할 겁니다헛걸음하게 해 죄송합니다삐뚤한 글씨체가 손잡이 근처 붙어 있었네나는 뜨거운 것을 목에 걸었네발길을 돌려 건널목에 섰네의수족 아저씨가손때 묻은 연장을 메고 걸어가고 있었네누가 맡겼다 찾아가지 않은 낡은 가방에망치, 칼, 가위 쓰다 남은 실, 지퍼, 우산대 몇땅으..

좋은 시 2024.05.03

겨울, 눈사람/신미나

겨울, 눈사람​​​신미나​​​​​몇번인가 그 눈빛을 훔친 적 있었네촛농처럼 흘러내린 얼굴, 코가 없는 얼굴눈이 마주칠 때마다 이내 눈길을 거뒀지만나는 보았네 촛불처럼 흔들리는 눈동자소문은 악취처럼 쉽게 뭉쳤다 흩어지곤 했지만오늘은 벽에 귀를 대고 그녀가 우는 소릴 듣네그 얼굴을 똑바로 보는 일이란허기와 마주 앉아 다 식은 저녁을 말아 먹듯서둘러 묵묵해야 하는 일사방을 좁혀오는 빈방의 어둠속에서반짝 물기를 감추는 그릇을 못 본 체하는 일가늘게 새는 물소리가 잦아들고 있었네그녀가 문 앞에 내놓은 밥그릇핥고 가는 고양이처럼 소리 없이조금씩만 그녀를 엿보고 가네열린 문틈 사이로 그녀천천히 녹고 있었네방바닥이 온통 물집이었네

좋은 시 2024.05.03

항아리/최재영​

항아리/최재영​​​​​​ ​​​​​처음 나는 겸손한 흙이었다진흙 층층이 쌓인 어둠을 밀어내고누군가와 끈끈하게 얽혀진 숨결불룩한 옆구리를 뽐내며어느 집의 연륜을 저장하는,도대체 우화를 꿈꾸지 않았건만나는 햇살을 움켜쥐고내 안의 목록을 삭여내는 중이다아주 오랫동안해마다 비밀스런 내력을 보태며맛과 맛, 그 아귀를 맞추는 시간들은서로 맥박을 주고받는 것인지도 모른다그럴때마다번쩍이는 세월의 빗금하나 그어지고그리운 것에 대한 열망으로짜고 싱거움에 길들여진 것들손꼽아 여닫히던 햇살들점점 순도 높은 깊은 맛을 우러낸다내게 저장된 세월을프리스틱 통에 담아가는 사람들,그리움을 꾹꾹 눌러 담으며겸손한 덕담 하나씩 건네준다.

좋은 시 2024.05.03

옹기 / 최재영

옹기 / 최재영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아요인품 좋은 종가집 장독대에서반질반질 몇 해를 보냈는지 알 수 없어요미세하게 실금을 틔우고 아무것도 담을 수 없을 때칠흑같은 어둠과 고요만이 남게 되었죠덕분에 나는 아름다운 몇 날을 뒤척여안팎 온 몸이 간지러운 듯 새들을 불러들이곤 해요이제 봄을 기억하는 건 내가 아니라내 안에서 피고 지는, 아직도 나를 관통해가는 세월이죠이제야 알게 되었어요대를 이어가는 건 화려한 혈통만이 아니라는 것을,내 안에서 부풀어 오르던 달빛도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하고제 집처럼 드나들던 바람도 슬슬이 빠진 소리로 흥얼거리는군요나는 앞으로 몇 번의 호시절을 더 노래하게 될까요나의 달빛은 강물처럼 흘러 어디에 가 닿을까요수천의 봄날이 지난 뒤에수줍은 새색시 가슴처럼 혼미한 숨결..

좋은 시 2024.05.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