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발표작 48

합죽선, 바람의 시원/황진숙

합죽선, 바람의 시원/황진숙 바람을 찾아 나선 길이다. 수시로 몰려드는 화기로 달아오른 홍조를 가라앉혀 줄 방책이 필요했다. 냉기로 무장한 인공의 바람은 순식간에 열기를 떨어뜨리지만, 뼛속까지 서늘하게 만든다. 태생적으로 찬 기운이 몸에 맞지 않은 터라 은은하게 살갗을 스치는 순풍을 곁에 두고 싶었다. 불시에 출몰하는 불청객을 대적하기 위해 어디서든 꺼내 들을 수 있는 바람이어야 했다.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는 옛 선조들의 생활상을 방영했다. 양반들이 더위를 쫓기 위해 부채를 사용 중이었다. 일사불란하게 펼치고 접히며 바람을 일으키는 합죽선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날렵하고 우아한 반원형의 곡선으로 허공을 휘어잡는 품새가 아름다웠다. 도포 자락 휘날리는 사대부의 예스러움은 갖추지 못할지라도 자유로이 바람..

발표작 2024.04.06

포구에서/황진숙

포구에서/황진숙 저문 해는 진즉 바다에 잠겼다. 등으로 치고받으며 이랑을 만드는 바닷물의 사위도 잠잠해졌다. 집어등 켜고 물살을 가로질렀을 어선들은 닻줄을 내리고 숨을 고르고 있다. 바닥에 널린 자잘한 어구와 낡은 그물에 고여 있는 허름한 하루가 느껍기만 하다. 붉은빛을 사르고 어둠이 내리자, 저 멀리 붙박이 등대에 불빛이 내걸린다. 길 잃은 숨결들 무사 귀환할 수 있도록, 하루의 끝점에 내몰린 이들이 떠돌지 않도록 좌표가 되어 주는 등대가 묵묵하다. 뒤이어 방파제를 따라 가로등 불빛이 하나둘 살아난다. 물빛이 바뀐 해조음이 낮아지고 부산함이 잦아든 포구가 아늑해진다. 수평선 너머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포구를 지나 좁은 골목길을 사이에 둔 수산시장으로 파고든다. 고즈넉한 포구와는 달리 왁자한 소리가 안겨 ..

발표작 2024.03.12

바게트/황진숙

바게트/황진숙 터질 대로 터져라. 쿠프가 벌어지고 속살이 차오른다. 칼금을 그은 껍질 사이로 속결이 뚫고 나올 기세다. 뜨거운 열기 속에서 맘껏 팽창한다. 노릇하게 제 색을 갖추자 오븐 밖으로 나온다. 안과 밖의 온도 차로 바삭거리는 소리가 생동한다. 저다움을 구현하는 소리가 거침없다. 반으로 잘라 베어 문다. 한입에 느껴지는 맛이 아니다. 바삭한 껍질과 폭신한 속결은 씹어야 배어든다. 씹을수록 바삭한 껍질의 ‘바게트다움’이 전해져 온다. 바게트는 세상 한가운데서 저만의 호흡을 이어간다. 여타 반죽처럼 치대는 레시피를 따르지 않는다. 억지로 주무르지도 않는다. 반죽에 힘을 가하지 않고 오랜 시간 발효한다. 반죽틀에 갇힌 정형을 거부하며 스스로 모양을 찾아간다.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깊은 맛을 끌어낸다. 이..

발표작 2023.10.29

댓돌/황진숙

댓돌/황진숙 댓돌에 든다. 볕살이 데워 놓아서일까. 비루한 시간이 머무르는데도 따스하다. 데데한 등줄기를 쓸어주기는커녕 흙먼지를 걸친 신들의 발길로 어지러울 텐데 정갈하기만 하다. 올라서서 내다본다. 제법 높은 마루 밑에 자리 잡은 터라 고택의 풍채가 한눈에 들어온다. 마당 한 귀퉁이에서 허공을 향해 부풀어 오르는 매화 꽃망울, 허세 부릴 줄 모르는 아담한 굴뚝, 한길 너머에 자리 잡은 또 다른 고택까지 부려놓는 풍경이 고즈넉하다. 내로라하는 절경이 이리 질박할까. 밀림 속 문명이 닿지 못하는 고졸한 멋에 절로 숨을 고른다. 바닥만 있는 게 아니라고 가장 남루한 밑바닥이 묵언으로 전한다. 사랑채에 들어가기 위해 신발을 벗는다. 주인장이 카페로 개방한 탓에 수시로 길손이 드나들었을 터이다. 대대손손 가(家..

발표작 2023.08.11

소금/황진숙

소금/황진숙 한 톨이라고 우습게 보지 마시라. 등금장수의 등에 업혀 대동여지도에도 없는 소금 길을 냈다. 사하라 사막을 가로지르고 차마고도를 건너 처처를 누볐다. 산이라고 못 이룰까. 고무래로 밀고 당겨지며 첩첩이 산을 쌓았다. 태초부터 내려왔으니 먹지 않은 자가 없고 취하지 않은 자가 없다. 그러니까 시대를 내려온 가장 오래된 맛이다. 너른 바다를 응축한 한 알로 짠맛을 보시하며 무미건조한 세상에 간을 쳐왔다. 조미란 호락호락하지 않다. 미각을 주름잡기 위해선 어두컴컴한 구석에 내박치는 일쯤은 각오해야 한다. 주둥이가 묶인 자루 속에 갇혀 쓴맛이 빠질 때까지 지루한 시간을 견뎌낸다. 뙤약볕에 몸을 데우고 오가는 바람의 담금질로 맺힌 알갱이의 자긍심을 잊지 않기 위해, 똑똑 떨어지는 간수 소리를 경전 삼..

발표작 2023.07.17

하소연/황진숙

하소연/황진숙 저 영감탱이 때문에 못 살겠단다. 식당에서 엄마의 하소연을 듣다 보니 갈비탕 맛을 모르겠다. 밥 먹고 천천히 말씀하시라 권해도 막무가내다. 그간 묻어뒀던 사연이 끓어 넘친다. 쉴 새 없이 쏟아진다. 엄마는 봄부터 복숭아 농사를 짓느라 지칠 대로 지친 상태다. 깡마른 몸으로 종일 밭에서 살다시피 했으니 칠순의 나이에 버거운 거다. 혈압이 있어서 무리는 금물인데, 성정이 급한 아버지는 빨리 끝내야 한다며 다그치고 채근한다. 이제는 농사일을 접고 편히 쉬시라 말해도 아버지는 귓등으로 흘린다. ‘쉬엄쉬엄 일손을 얻어 일량을 덜고 병원에 가서 영양제라도 맞아가며 하면 수월하지 않겠냐’라는 조언을 뭉개고 요지부동이다. 치매 진단까지 받고 우울증도 있는 아버지가 손에서 일을 놓지 않으니 애먼 엄마만 들..

발표작 2023.06.05

마당/황진숙

마당/황진숙 한길을 따라 옛집에 들어선다. 골골이 삭아 내려앉은 슬레이트 지붕이 보인다. 모로 기운 벽면은 둘러친 이끼로 거뭇하다. 쇠락하는 육신에 핀 검버섯처럼 삭막하기 짝이 없다. 누대에 걸쳐 둥지를 튼 곳이건만, 스러지는 것은 잠깐이다. 소멸할 때까지 이울어가는 육신을 지탱해야 하는 건 존재하는 것들의 숙명이다. 한때는 포부도 당당하게 볏짚으로 용마름을 올렸던 흙담이 세월의 무게에 눌려 배불뚝이가 되었다. 왕년의 수문장은 드나드는 세상 잡사에 기력이 다했나 보다. 불어오는 바람에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요란한데도, 퇴화한 청력으로 알아듣지 못한다. 덜컹거리는 대문을 열고 마당에 선다. 온갖 풍파와 흔적을 다져놓은 마당이 부스스하다. 살 비비며 부대끼던 기억은 잡풀에 점령당한 채 군데군데 패인 구덩이에 ..

발표작 2023.05.27

헌책 경전

헌책 경전/황진숙 책들이 누워있다. 서가에 꽂혀있는 호사는 고사하고 노끈에 묶여 옴짝할 수 없다. 켜켜이 쌓인 무게로 압사할 지경이다. 분리수거장의 잡동사니와 뒤섞여 여기저기 널브러진 책은 숨도 쉴 수 없다. 펼쳐지고 뒤집힌 책더미를 들춰본다. 사서삼경이 나직이 한숨을 내뱉는다. 진리는 시간에 지배되지 않건만 먼지에 파묻혀 허송세월했다. 어록 한 구절 설파하지 못하고 폐기처분 되나 싶어 초조하기만 하다. 스티로폼을 깔고 앉은 백과사전이 지루한 듯 연신 하품이다. 방대한 지식으로 목마른 영혼의 갈증을 채워주기는커녕 인테리어 소품으로 진열되기 바빴다. 육중한 몸피로 책꽂이가 흔들리지 않도록 맨 밑의 칸에 꽂혀 무게중심을 잡아야 했던 나날이 하릴없다. 표지가 벗겨진 채 넉장거리로 드러누운 요리책은 초점을 잃었..

발표작 2023.03.07

대추/황진숙

대추/황진숙 adoongaa@daum.net 유영한다. 말라비틀어진 몸피로 둥실 떠다닌다. 야윌 대로 야위어 생기와 물기를 찾아볼 수 없다. 향내를 풍기지도 않고 탐스런 살빛으로 시선을 잡아끌지도 않는다. 아무런 기척을 내비치지 않아 빈한하다. 엎치락뒤치락 중심을 잡지 못하는 것도 잠시, 고통과 인내의 기록으로 주름졌던 외피가 서서히 부풀어 오른다. 붉은 옹고집으로 햇살과 바람의 고행을 견뎌냈건만 절절 끓는 물의 노기에는 어쩔 수 없었나 보다. 일백 도의 열기에 저항 한 번 해보지 못하고 마른 껍질의 가슴을 연다. 생 몸뚱어리 익는 뜨거움을 안고 생애의 전부였을 진액을 쏟아낸다. 쟁여놓은 단물을 남김없이 밀어낸다. 처음부터 메마른 과실로 세상에 나온 건 아니다. 햇살이 연둣빛으로 부서질 무렵, 나뭇가지에..

발표작 2023.03.04

그녀의 궁상/황진숙

그녀의 궁상/황진숙 저만치 보따리가 보인다. 나달나달한 보자기에 대충 묶은 매듭으로 봐서 보나마나 그녀의 것이다. 세월이 흘러도 그녀의 궁상은 지치지도 않는다. 소변통과 물통이 뒤섞여 있고 베지밀과 단팥빵이 고개를 내밀고 있는 봇짐이 궁색하기만 하다. 전쟁통에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피난이라도 가듯 급하게 꾸렸다면 이유가 될까. 척추골절로 병원에 입원 중인 지아비의 병시중을 위해서였다지만 변변한 가방도 아닌 해진 보자기라니. 누가 볼세라 괜히 민망해져 병원 대기실을 둘러본다. 잠시 후, 슬리퍼 소리와 함께 그녀가 들어선다. 몸빼바지에 늘어진 줄무늬 티셔츠를 걸친 행색을 보니 절로 한숨이 나온다. 잔소리가 쏟아져 나올 판인데 짝짝이로 신은 구멍 난 양말까지 가관이다. 거리의 부랑자나 집 잃은 떠돌이처럼 그녀..

발표작 2023.03.04

벽, 단단한 무늬/황진숙

벽, 단단한 무늬/황진숙 담벼락에 무늬가 걸렸다. 담쟁이가 그어놓은 초록줄기도 일필휘지된 붓칠도 아니다. 바위를 올라탄 바위 떡풀처럼 담장 모서리에서 이음쇠가 돋을새김 한다. 해진 옷에 덧댄 조각마냥 균열과 틈으로 쇠락해가는 벽을 지지하고 있다. 벽면에 부착해 놓은 철근에다 살점이 떨어져 나간 자리를 옭아맨 쇳덩어리까지. 숨통을 찔러대는 것들로 담장은 숨이나 쉴 수 있을까. 조여드는 이음쇠의 볼트와 너트에 맥을 놓지는 않을까. 이쪽저쪽 틈새로 파고드는 이끼에 따끔거리지는 않았는지, 흠집으로 얼룩진 울담이 살풍경하다. 한때는 철옹성이었을 테다. 함부로 담 안을 넘보지 못하도록 완강하게 가로막았을 것이다. 바람 한 점 드나들지 못하게 장막을 쳤다. 천근만근의 무게로 단단히 에워쌌다. 안과 밖을 경계 지으며 ..

발표작 2023.03.04

물끄러미 /황진숙

물끄러미 /황진숙 홀로 존재할 수 없다. 바라볼 누군가가 있어야 의미가 산다. 내 안으로 빠져들려는 이기를 벗고 너를 향해 마음을 돌리는 모양새다.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나도 모르게 용서해 주고 싶다. 미움도 원망도 사라진다. 명사처럼 단호하지도 동사처럼 역동적이지도 않다. 더러는 연민을 더러는 염원을, 딱 떨어지진 않지만 ‘물끄러미’라는 단어에 뒤따라 붙을 수 있는 숱한 의미로 정이 간다. 못내 마음에 걸려 뒤돌아보는, 감춰진 속내를 읽어내는 몸짓이다. 설명할 수 없는 뭔가로 자꾸 가져다 쓰는 부사다. 밤 10시다. 넘실대는 세상의 물너울을 헤치고 귀환했다. 병원 장비가 고장이 나서 수리를 해 놓느라 피곤함을 무릅쓰고 야근했다. 불이 꺼진 집은 적막했다. 주방 싱크대엔 물을 부어놓은 냄비만 덜렁 있다...

발표작 2023.03.04

다리를 말하다/황진숙

다리를 말하다/황진숙 수많은 다리가 세상을 이어간다. 세월을 건너고 몸통을 떠받치고 하중을 견디며 그어온 궤적이 아득하다. 지나온 다리와 지금의 다리와 건너게 될 다리의 사연을 생각한다. 언제까지 이어질 다리에 서서 마음도 걸쳐본다. 둥실 떠올라 구름다리를 건너고 돌다리를 거닐며 삶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도 좋으리. 숱한 나날 함께 할 다리에 대해 사색에 잠긴다. 늙다리 섧다. 생을 한 바퀴 돌아 얻어진다. 귀에서 귀뚜라미가 울어대고 무릎에선 관절끼리 부딪친다. 젊음이 다녀간 흔적으로 구부정해진다. 소멸을 향해 가는 것도 마뜩잖은데 늙다리라니. 곰삭은 시간으로 깊고 먼 눈빛을 지니면 어르신이요, 궁색 맞은 행색으로 절룩거리면 늙다리다. 어쩌면 노인이나 고령자라는 말은 늙다리의 존칭어일지 모른다. 푸른 숨이..

발표작 2022.12.16

곰보 돌 궤적을 긋다/황진숙

곰보 돌 궤적을 긋다/황진숙 모래밭에 섰다. 바다를 보기 위해 가파른 하루를 내던지고 달려왔다. 통성명을 생략한 채 다짜고짜 성내며 달려드는 바람으로 휘청인다. 속내를 터놓기도 전에, 옷깃을 풀어 헤치고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린다. 이방인의 침입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싸늘한 한기까지 몰고 와 겁박한다. 바람과 내통한 파도는 거세게 밀어닥치며 모래톱을 후려친다. 어스름이 다가와 사위를 다독여보지만, 뿌리라도 뽑을 것처럼 포효하며 요동치는 바람으로 속수무책이다. 바다를 쟁여 넣으려 호기롭게 나섰던 나는 주춤한다. 쪽빛 숨결을 들이마시는 건 고사하고 숨통을 틀어쥐는 바람의 위력에 뒷걸음친다. 허둥대다가 뭔가에 툭 걸린다. 돌이다. 주먹만 한 돌이 모래밭에 처박혀 있다. 발꿈치에 걸리지 않았다면 알아채지 못했을 ..

발표작 2022.11.29

감각하다/황진숙

감각하다/황진숙 시각으로 오가며 무심결에 봐오던 풍경이었다. 매서운 추위 덕에 한낮에도 싸늘하다. 남아 있던 볕살이 이울자 어스름이 내려앉는다. 어둠은 보란 듯이 감춰진 가난을 끄집어낸다. 길가 바로 옆에 자리 잡은 채 대문도 담도 없는 슬래브집이다. 집 벽면 한쪽으로 LPG 가스통 두 개가 나란히 붙어있다. 어느 날은 가스통 덮개 위로 소주 두 병이 올라와 있다. 어떤 날은 대여섯 병이 줄 서 있을 때도 있다. 오늘은 한 병이 비스듬히 누워있다. 뉘라서 저리 술을 마시는 걸까. 일용직으로 공사판을 전전하는 막노동자라 고단해서일까. 불면에 시달리느라 술 없이는 잠들 수 없어서일까. 이따금 이곳을 지나다니는 외국인의 낯이 익던데, 혹시 그의 거처인가. 고국이 그리워 밤이면 술로 지새우는 건가. 알코올의 힘..

발표작 2022.09.05

너에게 보낸다/황진숙

너에게 보낸다/황진숙 지난 계절 된통 앓았다. 질주하는 감정에 집중하느라 이상 징후를 알아채지 못했다. 아니 모른 척했다는 게 맞는 말이다. 어쩌면 회복탄력성에 기댔는지 모른다. 야근으로 날밤을 새우고도, 몸은 때꾼해진 눈빛으로 뚝배기처럼 말없이 움직이지 않았던가. 궁지에 몰릴수록 마음은 애먼 몸에 무게를 부렸다. 속앓이로 심란할 적엔 허벅지가 무지근해지도록 트랙을 돌았다. 걱정이라는 훼방꾼이 넉장거리로 누워 발목을 잡을 때는 심장이 쿵쾅거릴 때까지 내달렸다. 우울한 기분을 날려 버리기 위해 근육들은 한시도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갉아먹는 온갖 것들에게 먹잇감이 되어주는 몸인데, 고약하게 굴었다.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날 정도로 속을 굶기는 날이 다반사였다. 아프고 억울해서 눈물이 솟구치면 참으라고 성..

발표작 2022.06.08

발/황진숙

발/황진숙 굽혔다 폈다 하루를 끌고 간다. 구렁텅이 같은 바닥을 딛고 저벅거린다. 무명으로 태어나 목숨이 다할 때까지 한 채의 몸집을 짊어지고 세상의 길을 헤집는다. 갈라 터진 세월은 발뒤꿈치에 쟁여놓는다. 일생을 동행한 이력으로 너덜거리는 기억들이 허옇게 층을 이룬다. 종일 신발에 몸을 구겨 넣은 채, 보이지 않는 시야를 점유하느라 잡힌 물집과 덧난 상처쯤은 덮어 둔다. 습한 어둠 속의 고린내를 탓할 겨를도 없다. 뒤꿈치가 땅에 닿아 지축을 울리자마자 바닥을 박차고 나간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사불란하다. 핏줄 불거지도록 오그라들며 노면을 움켜쥔다. 요령을 부릴 줄 모르는 우직함은 타고났다. 허기진다고 꼬르륵 소리로 보채거나 화가 난다고 핏발을 세우지도 않는다. 눈물로 슬픔을 호소하거나 푸념을 늘어..

발표작 2022.03.23

뒷모습을 읽다/황진숙

뒷모습을 읽다/황진숙 뒷모습을 읽는다. 의식하거나 꾸미지 못해 정직한, 말이 없어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는, 숨겨진 마음을 보여주는 다층의 실루엣이 뒷모습이다. 따라가다 보면 훤히 읽히기도 한다. 저물녘인데도 병원은 대기 환자로 북적인다. 진료를 마치고 출입문을 나서는 순간이었다. 느닷없이 뒤통수에 알밤이 날아든다. 약간은 장난스럽게, 살며시 튕기는 감촉이 생급스럽다. 뉘라서 꿀밤을 날리는 건가. 뒤돌아본다. 키가 껑충한 웬 젊은이가 빤히 내려다보고 있다. 처음 보는 얼굴이다. 그를 올려다본다. 이제 곧 그가 아는 그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챌 것이다. 몇 초가 흘렀을까. 여전히 그는 요지부동이다. 누구시죠. 내가 먼저 말을 건넨다. 미숙씨 아니에요. 부드러운 말투로 그가 되묻는다. 아닌데요, 사람 잘못..

발표작 2022.03.12

노년이라는 이름을 가진 당신은/황진숙

노년이라는 이름을 가진 당신은/황진숙 병원 대기실에서 코로나 백신을 맞으려는 방문객에게 문진하기 바쁘다. “최근 14일 이내 백신 안 맞으셨어요?” “그러믄유.” “백신 접종 후 알레르기 반응 나타난 적 있으세요?” “아이, 그런 거 없어유. 골치 아픈께 물어보지 마유. 여기 노다지 다니는 사람인데유.” 만사가 귀찮다는 듯 창수씨는 쇳소리로 되받아친다. 수액실에서는 간난씨가 소리를 지른다. “아이고, 사람 죽이네. 큰 바늘로 찌르니까 아프잖어.” 작은 바늘이라고 설명하는 간호사의 말에도 간난씨는 병원이 울리도록 목소리를 높인다. “워매, 누가 모를 줄 알고. 내가 큰 병원 다녀봐서 다 알어. 어디서 그짓말이여.” 수액이 들어가자 겨우 진정이 된다. 세월을 먹은 당신은 이방인 차지다. 혈압 당뇨가 불침번을..

발표작 2022.02.07

스치듯 겹쳐지면서/황진숙

스치듯 겹쳐지면서/황진숙 해가 스러지자 어스름이 바통을 이어받는다. 도시의 얼굴마담인 전광판은 허공으로 쉴 새 없이 자막을 흘려보낸다. 뒤늦게 도로를 건너는 이들에게 신호등은 경보음을 울리며 야멸차게 채근한다. 바닥은 개업을 알리는 전단지로 포장되어 낯빛을 알아볼 수 없다. 거리에는 오가는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 호객을 위한 상인의 목청소리, 상점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가 뒤섞여 소란하게 들끓는다. 네온사인에 하나둘 불이 들어오자 터미널을 찾아가는 내 발걸음이 분주하다. 얼마나 걸었을까. 저만치 오가는 행인들 사이로 스티로폼 상자 앞에 덩그러니 앉아 있는 할머니가 눈에 들어온다. 길가 한구석에 플라스틱 바가지 네댓 개를 펼쳐놓은 채, 강마른 손으로 마늘을 까고 있는 모습이 생경하다. 한 평의 공간도 어..

발표작 2021.08.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