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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작

소금/황진숙

에세이향기 2023. 7. 17. 20:58

 

 

소금/황진숙

 

 

 

 

한 톨이라고 우습게 보지 마시라. 등금장수의 등에 업혀 대동여지도에도 없는 소금 길을 냈다. 사하라 사막을 가로지르고 차마고도를 건너 처처를 누볐다. 산이라고 못 이룰까. 고무래로 밀고 당겨지며 첩첩이 산을 쌓았다.

태초부터 내려왔으니 먹지 않은 자가 없고 취하지 않은 자가 없다. 그러니까 시대를 내려온 가장 오래된 맛이다. 너른 바다를 응축한 한 알로 짠맛을 보시하며 무미건조한 세상에 간을 쳐왔다.

조미란 호락호락하지 않다. 미각을 주름잡기 위해선 어두컴컴한 구석에 내박치는 일쯤은 각오해야 한다. 주둥이가 묶인 자루 속에 갇혀 쓴맛이 빠질 때까지 지루한 시간을 견뎌낸다. 뙤약볕에 몸을 데우고 오가는 바람의 담금질로 맺힌 알갱이의 자긍심을 잊지 않기 위해, 똑똑 떨어지는 간수 소리를 경전 삼아 ‘나는 소금이다. 나는 소금이다’를 외친다.

막막한 시간을 돌아 보송해졌건만 짜다는 세상의 천대는 숙명이다. 단맛에 밀리고 담백한 맛에 떠밀려 찬장의 구석진 곳에 유배될지도 모른다. 허나 지탄에 기죽지 않아야 진정한 맛으로 거듭날 수 있다. 몸값을 올리는 일은 스스로를 낮추는 일뿐이다. 양념이 아닌 허드렛일도 기꺼이 감수한다. 할복한 고등어와 삼치 뱃속에 뛰어들어 부패를 막고 비린내를 잡는다. 새우젓을 삭히기 위해 토굴 속에서 속절없이 세월을 보낸다. 갯벌의 구멍에 투하되어 맛조개를 유인하는 일도 마다치 않는다. 장롱이나 구석진 곳에 뿌려져 출몰하는 개미들을 살생한다. 뜨거운 프라이팬에 올라 기름기를 제거하기도 한다. 소듐이온 배터리로 전자 문명과 상생하기도 한다.

이도 저도 아닌 어깃장이 놓고 싶어질 땐, 짠 기로 승부수를 띄운다. 제아무리 억센 푸성귀인들 한 움큼의 소금 앞에서는 맥을 못 춘다. 배어든 간기로 물기를 잃고 축 늘어진다. 땅심을 믿고 뻗대던 성깔이 숨이 죽는다. 이때쯤 저들을 통째로 뒤집어 기세를 꺾어버린다. 완력 한 번 쓰지 않고 막후에서 전세를 역전시킨다.

더러는 역경을 이겨내는 이들의 고난을 하얀 꽃으로 피운다. 이마에 목덜미에 등줄기에 몸 곳곳에 소금꽃을 피우며 근면 성실의 표상으로 불렸다. 응당 갖춰야 할 향기는 없지만, 단맛 신맛 쓴맛 등 어떤 맛도 피우지 못하는 꽃이니 자부심을 품어도 좋으리.

억척의 맛이라고 감칠맛을 모를까. 소금은 제각각의 맛이 깊이를 더하고 우러날 수 있도록 든든히 받쳐주는 들무새다. 쓴맛을 절제하고 단맛의 균형을 잡아 풍미를 보탠다. 제맛 하나 내기에도 바쁜 세상, 식자재에서 각각의 맛을 끌어내 버무려내는 조력자다. 맛의 궁합을 조율하는 수모로, 요리의 동지로 종횡무진 누빈다.

소금의 참맛은 찬밥을 물에 말아 소금장을 곁들여 먹을 때이다. 며칠간 야근으로 입맛이 천리만리 달아난 이즈음이었다. 몇 가지 찬을 눈앞에 두고도 젓가락은 소금 종지를 오갔다. 팍팍한 일상으로 방전된 피로감은 야들한 육질과 담백한 살점, 신선한 푸성귀를 거부했다. 수많은 맛으로 도배된 미각은 헛헛해진 속을 달랠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젓가락으로 집어 든 몇 알의 소금이 열기가 식어 언제고 퇴출당할 찬밥의 위기를 궁굴렸다. 찰기가 사라진 밥알에 따라붙은 간기로 찬밥은 씹어 삼킬만했다. 소금의 짭짜름한 맛이 부대끼는 속내를 가라앉혔다. 끌탕으로 무기력해진 속에 흘러드는 짠맛이 지친 기운을 일깨웠다.

어찌 보면 소금에 끌리는 게 당연하다. 소금물에서 태어나 일생 몸 안에 소금을 쟁여놓아야 하는 게 인간의 숙명이기 때문이다. 소금에 절인 오이지로 무서운 여름을 견뎠다는 소설가 김훈처럼 소금이 있어 우리네 생은 드라마틱하다. 생의 염천을 건너고 비린 시간을 가라앉히기 위해선 종종 소금을 쳐야 한다. 거친 세파의 소금기로 대책 없이 쪼그라들기도 하고 머금은 염기를 뱉어내기 위해 하염없이 물에 떠다니기도 하지만 절여지고 내뱉으며 삶의 농도를 맞추는 게 한살이일 터이다.

이제껏 소금에 기대온 시간을 생각한다. 맹탕 같은 국물에 뛰어든 반 스푼의 소금 덕분에 어수룩하게나마 부엌데기 노릇을 해왔다. 마음의 깊이가 얕아 수시로 요동치던 속내는 한 꼬집의 소금이 부려놓는 감칠맛에 잦아들곤 했다. 복병처럼 마주치는 쓴맛, 무작정 현혹시키는 단맛, 눈을 질끈 감게 만드는 신맛 같이 들썩거리는 세상일을 잠재우는 데 소금만 한 게 있을까.

각지고 뭉툭한 소금을 바라본다. 무색무취로 존재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비루한 세상에 간을 맞춰온 알알의 경전을 새긴다. 산그림자가 눕는 저물녘, 소금과 독대하며 얻은 귀한 말씀 몸 안에 모신다. 녹아드는 맛을 천천히 음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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