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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황진숙

에세이향기 2023. 5. 27. 19:47

 

 

마당/황진숙

 

 

 

한길을 따라 옛집에 들어선다. 골골이 삭아 내려앉은 슬레이트 지붕이 보인다. 모로 기운 벽면은 둘러친 이끼로 거뭇하다. 쇠락하는 육신에 핀 검버섯처럼 삭막하기 짝이 없다.

누대에 걸쳐 둥지를 튼 곳이건만, 스러지는 것은 잠깐이다. 소멸할 때까지 이울어가는 육신을 지탱해야 하는 건 존재하는 것들의 숙명이다. 한때는 포부도 당당하게 볏짚으로 용마름을 올렸던 흙담이 세월의 무게에 눌려 배불뚝이가 되었다. 왕년의 수문장은 드나드는 세상 잡사에 기력이 다했나 보다. 불어오는 바람에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요란한데도, 퇴화한 청력으로 알아듣지 못한다.

덜컹거리는 대문을 열고 마당에 선다. 온갖 풍파와 흔적을 다져놓은 마당이 부스스하다. 살 비비며 부대끼던 기억은 잡풀에 점령당한 채 군데군데 패인 구덩이에 빗물을 담고 있다. 한 번도 바깥을 꿈꾼 적 없지만 해마다 실금을 그어대는 누옥을 수발하느라 지쳤을 테다. 적막을 파종하느라 제 그림자만 움켜잡고 견뎌냈을 시간이 허우룩하다.

마당 여기저기를 어정거린다. 조모의 저승길에 따라가지 못한 옹기 시루와 돌절구가 장독대에 엎어져 있다. 찾는 이가 없어 무위의 날에 들은 지 오래다. 살아생전 옹기 시루에 떡을 하고 돌절구에 고추며 깨를 빻던 할머니의 환영이 되살아난다. 예서 태어나고 자라 가문을 일군 할아버지가 들일을 마치고 삽짝에 들어선다. 외양간에 소를 몰아넣고 우물가에서 두레박으로 물을 퍼 올려 등목으로 더위를 식힌다. 쿵쿵 방아 찧는 절구 소리, 어푸거리는 물소리, 송아지를 찾는 어미소의 울음소리로 마당이 흥성거린다. 캔버스에 그려진 풍경화처럼 마당 곳곳에서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조부모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지만, 마당에 그어진 내력으로 몽상에 잠긴다.

마당은 유년의 내게 놀이동무였다. 일 나간 어머니가 돌아올 때까지 이리저리 뒤척이며 장단 맞춰주느라 한가로운 적이 없었다. 윗집 아랫집이 모여 일가를 이룬 종갓집이다 보니 아침저녁에는 드나드는 식솔들의 발걸음으로 마당이 북적거렸다. 그나마 모두가 집을 비운 한낮에 오수에 들라치면, 담을 타고 내려오는 길냥이나 바지랑대에 앉는 제비를 보고 누렁이가 짖어대는 바람에 눈을 치켜떠야 했다. 잠시 후 조용하다 싶은 찰라, 이번에는 소녀가 안방에서 마당으로 내려선다. 떼쟁이 막냇동생을 알러 간신히 낮잠을 재운 후 심심한 터에 밖으로 나온다. 공깃돌을 주워 공기놀이하다가 코스모스 꽃잎에 앉은 잠자리를 잡아 실로 묶어 장독대로 뒤란으로 동동거리며 날려본다. 그마저 싫증이 나면 수챗구멍의 물을 따라간다. 흙 마당을 기어가는 개미의 움직임도 쫓는다. 신발을 벗고 보송한 흙을 자분거리기엔 텃밭이 제격이었다. 툭하면 말다툼을 벌이고 삐치는 동무들은 시시했다. 빗살무늬로 단정히 몸치레하고 무엇을 하든 늘 윤기 나는 낯으로 맞아주는 마당이 푸근했다.

마당은 정박지 같은 곳이다. 노역을 마친 농기구가 귀환해서 아무 데나 널브러져 단잠을 잔 후 다음날이면 툭툭 털고, 들로 나서는 주인장을 따라나선다. 추수 끝난 짚단을 쌓을 수 있도록 모퉁이를 비워두거나 무가 땅속에서 겨울을 날 수 있도록 가장자리에 구덩이를 내어준다. 이곳저곳을 떠돌던 방물장수와 장돌뱅이가 마당가의 우물에서 갈증 난 목을 축이고 생기를 얻어 되돌아나가는 곳이다. 찌든 삶에 얼룩진 옷가지를 말려 새뜻하게 하루를 시작할 수 있게 빨랫줄을 매어두는 곳도 마당이다.

밥때가 되면 연기를 피워 올리는 굴뚝이나 때가 되면 새 볏짚으로 용마름을 얹어 존재감을 과시하는 흙담과 달리 마당은 드러낼 줄 모른다. 비가 오면 오는 대로 질척거리고 눈이 내리면 내리는 대로 얼어붙는 게 고작이다. 몇 날 며칠 휘몰아친 폭풍우에 파이고 휩쓸려도 우묵한 속내로 묵묵부답이다. 오랜 시간 무수한 발걸음에 다져지고 나서야 편평하게 제 몸을 추스를 뿐이다.

언제나 데데하기만 한 마당에 파문이 이는 날도 있었다. 아버지가 동네에서 주먹다짐을 벌이다. 멱살잡이 당한 일로 분이 풀리지 않은 날에는 살림살이가 마당으로 날아들었다. 접시라도 깨지면 남은 조각이 땅에 박히기 마련이다. 사금파리가 신발에 밟히면 이런 게 왜 마당에 있냐며 애꿎은 타박을 들어야 했다. 그럴 땐 마당의 낯빛이 잿빛으로 변하며 먼지를 피워올렸다.

곰삭은 세월이 내려앉을 때까지 제 터 위에 몸을 부린 이들을 그러안은 마당. 숱한 인연으로 마당에 다녀간 흔적들이 켜를 이룬다. 억겁의 시간 속에는 밑동이 베어진 감나무의 일대기가 달구지를 끌러 만주에 다녀온 할아버지의 생애가, 재를 넘어 옹기 시루를 이고 시집온 할머니의 궤적이 동심원을 그린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려고 장작을 패던 아버지의 손길이, 종갓집의 종부로 종종거리던 어머니의 발걸음이, 어우렁더우렁 피붙이들과 평상에 누워 밤하늘의 별을 세던 유년의 기억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제는 마당을 중심으로 행성을 돌던 이들이 하나둘 떠나버렸다. 무성한 잡초에 휘둘리는 마당의 낯빛이 수척하기만 하다. 언젠가 떠받들 누옥마저 사라지면 그제야 마당은 제 할 일을 마치고 깊은 잠이 들 것이다.

한길에서 한낮의 적막을 깨는 스쿠터 소리가 들려온다. 뒤이어 트럭이 덜컹거리며 달걀이 왔다고 확성기를 튼 채 지나간다. 바깥세상과 거꾸로 흐르는 마당의 시간이 애잔하기만 하다. 허우룩한 마당의 풍경을 담고 대문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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