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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작

그녀의 궁상/황진숙

에세이향기 2023. 3. 4. 10:42

그녀의 궁상/황진숙

저만치 보따리가 보인다. 나달나달한 보자기에 대충 묶은 매듭으로 봐서 보나마나 그녀의 것이다.

세월이 흘러도 그녀의 궁상은 지치지도 않는다. 소변통과 물통이 뒤섞여 있고 베지밀과 단팥빵이 고개를 내밀고 있는 봇짐이 궁색하기만 하다. 전쟁통에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피난이라도 가듯 급하게 꾸렸다면 이유가 될까. 척추골절로 병원에 입원 중인 지아비의 병시중을 위해서였다지만 변변한 가방도 아닌 해진 보자기라니. 누가 볼세라 괜히 민망해져 병원 대기실을 둘러본다.

잠시 후, 슬리퍼 소리와 함께 그녀가 들어선다. 몸빼바지에 늘어진 줄무늬 티셔츠를 걸친 행색을 보니 절로 한숨이 나온다. 잔소리가 쏟아져 나올 판인데 짝짝이로 신은 구멍 난 양말까지 가관이다. 거리의 부랑자나 집 잃은 떠돌이처럼 그녀에겐 의복이란 의미가 별로 중요치 않다. 아니 괘념치 않는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차라리 마음껏 살 수 없는 궁핍이라면 이해가 갈 것이다. 통장에 돈을 쌓아놓고 장롱 위에 땅문서를 놓아두었다며 비밀리에 귀띔해 주던 분이 아니던가.

허드레라 이름 붙여진 것은 죄다 그녀의 것이다. 쓰다만 화장품, 철 지난 의복, 유행이 지난 신발까지, 하다못해 냉동실에 묵혀 둔 고춧가루나 유통기한이 지난 냉동식품까지 딸네 집에 와서 버려질 물건들이 아깝다며 가져가곤 한다.

오랜만에 보는 그녀에게 인사는커녕 잔소리가 날아간다. 엄마, 당장 양말 벗어서 버려라. 남들이 엄마 딸 불효자라고 수군거리는 거 안 들리나. 멋쩍은 웃음을 뒤로 하고 그제야 구멍 난 양말을 벗는다.

어쩌면 지나온 날들 하루하루가 그녀에게는 전쟁 같았을 것이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기름 장사를 하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기에 학교 문턱도 넘어보지 못했다. 배움에 대한 한으로 자식들 교육을 위해 열과 성을 다했지만 허망하게 두 자식을 앞세웠으니 박복한 팔자를 탓하며 회한으로 살아왔다. 술을 좋아하는 지아비 대신 가정을 꾸려야 했기에 즐거움이나 유희란 단어는 그녀 사전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밥은 찬밥이 아니면 입도 대지 않고 멋이라곤 미용실에 가서 뽀글뽀글 파마가 다인, 자신을 위해 뭔가를 한다는 일은 죄스럽다며 눈만 뜨면 일에 매달렸다. 여행은 고사하고 몸을 놀리는 일에는 극구 마다했다. 썩어 없어질 몸이라며 축나도록 농사일에 매진했으니 허리는 굽고 무릎은 닳아 늙수그레한 노인이 됐다.

여유의 시간이면 쉴 틈도 없이 몸을 정갈하게 하고 기도를 드린다. 염주를 세며 두 딸과 두 사위, 손자들의 건강과 안녕을 기원한다. 식솔들 한 명씩 이름과 주소를 호명하며 마음을 담아 염원하지만, 그녀 자신의 안위나 소원은 주문하지 않는다. 검소가 지나쳐 궁상을 두르고 살지언정 추수철만 되면 어렵게 사는 동네 어르신들을 찾아다니며 수확물을 나눠주기 바쁘다.

그런 그녀를 볼 때마다 지청구를 쏟아낸다. 이제는 편히 사시라. 소용이 다 한 물건은 죄다 버려라. 허나 그녀는 여전히 번듯한 가방보다는 마구잡이로 쓸 수 있는 보자기를 즐겨 사용한다. 용도가 다한 물건을 버리지 못하고 쌓아둔다.

인연이 다했다는 것은 사물이나 사람이나 마찬가지일 터이다. 그녀의 궁상에는 곁을 떠난 피붙이로부터의 허무가 배어있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떠나간 연에 대한 그리움이 놓지 못하는 집착으로 변해 버렸다. 그녀보다 먼저 떠나간 자식에 대한 애틋함을 대신하는 궁상이 애잔하기만 하다. 이제라도 그녀를 위해 마음을 다해 보듬어 주리라 생각한다. 핀잔이 아닌, 사랑을 담아 진심으로 위무해 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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