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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를 말하다/황진숙

에세이향기 2022. 12. 16. 21:52

다리를 말하다/황진숙

 

수많은 다리가 세상을 이어간다. 세월을 건너고 몸통을 떠받치고 하중을 견디며 그어온 궤적이 아득하다. 지나온 다리와 지금의 다리와 건너게 될 다리의 사연을 생각한다. 언제까지 이어질 다리에 서서 마음도 걸쳐본다. 둥실 떠올라 구름다리를 건너고 돌다리를 거닐며 삶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도 좋으리. 숱한 나날 함께 할 다리에 대해 사색에 잠긴다.

 

 

늙다리

섧다. 생을 한 바퀴 돌아 얻어진다. 귀에서 귀뚜라미가 울어대고 무릎에선 관절끼리 부딪친다. 젊음이 다녀간 흔적으로 구부정해진다. 소멸을 향해 가는 것도 마뜩잖은데 늙다리라니. 곰삭은 시간으로 깊고 먼 눈빛을 지니면 어르신이요, 궁색 맞은 행색으로 절룩거리면 늙다리다. 어쩌면 노인이나 고령자라는 말은 늙다리의 존칭어일지 모른다.

푸른 숨이 쇠잔해지고 기력이 다해 늙고 병드는 것은 정해진 이치일 터, 삶의 중력을 이기고 늙다리가 되지 않을 자 그 누구인가.

 

무다리

콤플렉스다. 체형은 보통인데 유독 종아리만 굵다. 생전 치마를 입어본 기억이 별로 없다. 누가 눈치 주는 것도 아닌데 움츠러든다. 허나 언제부터인가 튼실한 종아리는 건강의 지표가 됐다. 날씬하기보단 종아리 둘레를 키워 심장 펌프의 기능을 좋게 하라는 거다. 제법 딴딴한 종아리를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게 됐다.

 

상다리

상다리가 휘어지는 일은 없었다. 어렸을 적 밥상에 찬이라곤 김치 고추장 마른 멸치가 다였으니 상이 그득해지는 일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둥근 상에 붙어있는 세 개의 다리는 찬장 위에 엎드려 있다가 밥때가 되면 대강 폈다 접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떠받치느라 무겁지도, 이리저리 나르느라 부산하지도 않았다. 고단한 세상, 가난한 집에 들어와 외려 빈둥거리기는 상다리는 상팔자(上八字)였다.

 

식탁다리

부엌이 주방으로 바뀌고 상다리 대신 식탁다리가 들어앉았다. 사시사철 따스하고 은은한 조명을 받는 곳에서 식탁의 상판을 떠받드느라 후들거렸다. 한번 자리 잡으면 붙박이 신세인지라 곁눈질할 수도 없다. 식탁 위엔 꽃이 담긴 화병이 놓이고 향긋한 내음을 풍기는 모과가 시선을 잡아끌지만 식탁다리 위론 먼지만 수북하게 쌓일 뿐이다. 안온한 곳이면 무엇하리. 시간의 티끌만 뒤집어쓰고 있는걸. 이럴 바에는 게으름 피우던 왕년의 상다리가 나을 뻔했다.

 

안경다리

나와 세상을 이어주는 다리다. 나열된 활자들을 오독하거나 바닥에 매복한 허방을 딛지 않기 위해 귀에 걸친다. 더러는 야구모자의 무게에 눌리고 마스크의 끈에 엉키기도 하지만 한시도 떼어 놓을 수 없다. 안경다리와 지구의 중력에 저항하는 몸의 다리가 일심동체가 되어 오롯이 하루를 살아낸다.

 

징검다리

쏟아지는 장대비에 퉁퉁 불어도 이쪽과 저쪽을 잇기 위해 뿌리를 거둬들이지 않았다. 누군가는 읍내에 가기 위해, 누군가는 대처로 나가기 위해, 누군가는 실패한 타향살이를 접고 고향에 돌아오기 위해 다리를 건넌다. 수많은 누군가의 삶이 다리를 오가며 흘러간다. 교각이 들어서자 징검다리는 속절없이 무너졌다. 함께 사라진 풋풋한 시절의 정서가 아슴푸레하다.

 

출렁다리

저마다의 시선과 소리가 엉킨다. 수면 위로 비쳐드는 불빛도 요란하다. 운집한 사람들로 다리가 흔들릴 때마다 환호성이 높아진다. 겁에 질린 외침마저 분위기를 돋운다. 생은 흔들리지 말아야 하지만 여기서는 출렁여야 제맛이다. 연인은 손을 맞잡고, 꼬마는 엄마 품에 안겨, 고령자는 자식의 부축을 받으며 다리를 건넌다.

무릇 뒤채고 흔들려야 생동한다. 발 없는 씨앗이 후대를 기약하기 위해 바람에 흩날리듯, 풀꽃들은 벌 나비를 불러 모으기 위해 몸을 뉘고 흐느적거린다. 호수의 물은 바람을 타고 살랑거린다. 쉼 없이 살아 숨 쉰다.

산다는 건 요동치는 세상사를 견디는 일이라지만, 출렁다리에서는 맘껏 들썩거려 볼 일이다. 흔들리며 흥감에 젖어 들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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