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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작

감각하다/황진숙

에세이향기 2022. 9. 5. 11:51

감각하다/황진숙

 

시각으로

오가며 무심결에 봐오던 풍경이었다. 매서운 추위 덕에 한낮에도 싸늘하다. 남아 있던 볕살이 이울자 어스름이 내려앉는다. 어둠은 보란 듯이 감춰진 가난을 끄집어낸다.

길가 바로 옆에 자리 잡은 채 대문도 담도 없는 슬래브집이다. 집 벽면 한쪽으로 LPG 가스통 두 개가 나란히 붙어있다. 어느 날은 가스통 덮개 위로 소주 두 병이 올라와 있다. 어떤 날은 대여섯 병이 줄 서 있을 때도 있다. 오늘은 한 병이 비스듬히 누워있다.

뉘라서 저리 술을 마시는 걸까. 일용직으로 공사판을 전전하는 막노동자라 고단해서일까. 불면에 시달리느라 술 없이는 잠들 수 없어서일까. 이따금 이곳을 지나다니는 외국인의 낯이 익던데, 혹시 그의 거처인가. 고국이 그리워 밤이면 술로 지새우는 건가. 알코올의 힘을 빌려서라도 구차한 현실을 망각하고 싶은 건가. 날마다 시선을 보내며 나도 모르게 소주병을 센다.

길가 나뭇가지에 묶어둔 빨랫줄엔 목 늘어난 잿빛 셔츠가 바람에 펄럭인다. 하루치의 얼룩으로 매일 빨아 입는 남루가 슬픈 건지, 같이 내걸릴 누군가의 옷가지가 없는 고독이 슬픈 건지. 그도 아니면 건조대조차 들여놓을 데 없는 옹색한 단칸방의 처지가 절망스러운 건지 가늠할 수 없다.

궁핍은 후줄근한 곳을 찾아 은신처로 삼기 마련이다. 한파가 몰아쳐 살얼음이 달라붙은 출입문, 줄줄이 고드름이 매달린 보일러의 연통, 금 간 곳을 간신이 청테이프로 붙여놓은 듯한 유리창. 추위가 가시려면 아직 멀었는데 저것들을 어쩌랴. 마냥 떨고 있는 가스통이 서느렇다.

허술한 풍경에 서린 한기를 몰아냈으면…. 행인에 불과한 나는 그저 바랄 뿐이다. 완강하게 버티고 있는 겨울의 틈새를 비집고 작은 온기라도 와주길. 속속들이 들여다보이는 궁기를 덮어줄 봄이 어서 찾아와주길. 내 기억 속에 머무는 결핍과 맞닿아 있는 가난한 풍경을 오래도록 바라본다.

 

 

청각으로

주차장이다. 방금 표를 예매했다고 전화가 왔다. 내려서 배웅하려는데, 번거롭게 뭘 그러냐며 차를 돌려서 집으로 가란다. 걱정하지 말고 아이들과 잘 있으라는, 가장으로서의 당부도 잊지 않는다. 몇 시 차냐고 물었다. 오 분 후면 출발이란다. 혹여 늦을까, 얼른 승강장으로 가 있으라고 권한다. 그는 마음이 급했는지 통화를 마치지도 않은 채, 누군가에게 타는 곳이 어디냐고 묻는다. 곧이어 옷깃 스치는 소리와 뚜벅거리는 구두 소리가 들려온다.

이제 가는구나. 그의 발걸음 소리에 와락 눈물이 난다. 몇 달 만에 집에 왔건만 며칠 있지도 못하고 다시 객지로 떠나는 남편이 못내 서운하다. 가지 말라는 속말을 애써 삼킨다. 허우룩한 마음에 핸드폰을 내려놓지 못하고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음을 고스란히 듣는다. 그렇게라도 붙잡고 싶은 마음을 달랜다.

버스에 다다랐나 보다. 계단 오르는 소리가 전해져온다. 사는 내내 한 계단 한 계단 밟으며 올라왔는데, 미끄러지는 건 한순간이다. 동생이기에 별말 없이 서준 보증이 잘못돼 하루아침에 빚을 짊어진 남편은 속앓이하느라 한동안 말을 잃었다. 그나마 학업이 한참인 아이들이 있어 추스르고 일어섰다. 힘들어도 조금만 견디자며 택한 주말부부다. 복닥거리며 살다가 외따로이 떨어져 지내려니 얼마나 쓸쓸할까. 홀로 불 꺼진 숙소에 들어설 그의 모습이 가슴을 흔든다.

부산하게 부스럭거리던 소리가 잦아들었다. 좌석에 앉은 모양이다. 그를 감싸는 적막이 소슬하다. 숱한 시간 그리움과 외로움이 그를 따라다니겠지. 남편 혼자만 한량없는 적요에 내버려 둘 수 없어 전화기를 끄지 못하고 여전히 귀에 대고 있다. 오랜만에 집에 와서도 집안일로 종종거린 그가 잠시나마 눈을 붙이고 편안해지길. 이런저런 일로 애간장 태운 마음자리에 평온이 깃들길. 내려가는 동안 무탈하길.

바깥은 별이 하나둘 얼굴을 내비치며 고요에 휩싸인다. 지아비를 떠나보내는 아녀자의 가슴엔 속절없이 파고드는 생각들이 별 무리를 이룬다.

 

 

미각으로

슴슴하다. 혀끝에 달라붙는 맛이 아니다. 도토리묵처럼 떫거나 쓰지 않다. 무딘 감각으로는 맛을 알 수 없을 만큼 밋밋하다. 무슨 맛으로 메밀묵을 먹는담. 구시렁거리는 내 옆에서 서빙하던 아주머니가 한마디 거든다. 묵은지랑 같이 먹어봐요. 그런가. 메밀묵 위에 묵은지를 얹어 입으로 가져간다. 짜디짠 맛이 느껴지는 찰나, 묵직한 맛이 뒤따른다. 짠기로 채근하는 묵은지를 뒤덮는 맛이라고나 할까. 짠맛을 가라앉히며 옹호한다. 음 괜찮네. 두 맛이 어우러져 맞춤하게 식욕을 돋운다. 허기졌던 터라 계속 손이 간다.

작고 세모난 메밀 어디에서 이런 순한 맛이 나올까. 강한 맛으로 휘어잡거나 본연의 맛을 고집하지 않는 묵이 담백하다. 나 홀로보다는 곁들여질 때 진가를 발휘한다. 새콤한 샐러드와 시원하게 들이키는 묵사발, 매콤한 묵무침에 이리저리 궁합을 맞춘다. 온몸을 달뜨게 만들고 침이 고이게 만드는 음식은 그 자체일 뿐, 다른 것과 타협은 없다. 메밀묵은 조밀하게 채우지 않은 농도로 다른 맛을 품는다. 물컹한 식감은 씹는 재미까지 준다.

뒤늦게 찾아든 맛이 아쉬워 주인장에게 더 달라고 부탁한다. 묵은지와 메밀묵이 한 접시에 담겨 나온다. 정갈하다. 썰리는 대로 저를 내맡겼을 묵이 부드럽다. 모나지 않은 모양새가 속 깊은 친구처럼 묵묵하다. 우울한 기분을 토닥여주고 어수선한 영혼을 달래주는 동갑내기 그녀처럼 편안하게 다가온다.

불혹의 끄트머리에 들어선 이즈음, 내 속내는 자주 들끓었다. 오랜 밥벌이에 지쳐 그렁해지고, 세상살이에 긁힌 속내가 서러워 울컥거렸다. 왠지 모르게 쓸쓸해지는 감정으로 허전한 나날이 많아졌다. 쓰디쓴 세상사로 짜디짠 눈물을 쏟아낼 때 말없이 티슈를 건네주는 그녀. 직장 상사의 부당한 처사에 내비치지 못한 억울함을 성토할 적엔, 술 한 잔의 위로를 건네며 공감해주는 그녀. 사는 일이 죽비 맞는 일이라지만 난타당해 너덜거릴 때 뭉근히 끌어안아 주는 그녀다. 슴슴해서 계속 찾게 되는 묵처럼 둘레를 감싸는 그녀가 좋다.

담백하다. 이보다 깊은 맛이 있을까. 소박하고 구수하고 희수무레하기까지. 짠맛 신맛 단맛 쓴맛도 비벼놓을 수 있는, 안색을 살피고 눈빛을 헤아리는 것 같은 깊이로, 마음을 어루만지는 맛이다. 덤덤해지는 맛이 고프고 느긋해지고 싶은 날, 습관처럼 담백한 맛을 찾게 되리라.

접시에 남아 있는 마지막 묵 한 점을 집어 든다. 오롯이 묵 맛을 음미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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