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발표작

너에게 보낸다/황진숙

에세이향기 2022. 6. 8. 15:13

 

너에게 보낸다/황진숙

 

지난 계절 된통 앓았다. 질주하는 감정에 집중하느라 이상 징후를 알아채지 못했다. 아니 모른 척했다는 게 맞는 말이다. 어쩌면 회복탄력성에 기댔는지 모른다. 야근으로 날밤을 새우고도, 몸은 때꾼해진 눈빛으로 뚝배기처럼 말없이 움직이지 않았던가.

궁지에 몰릴수록 마음은 애먼 몸에 무게를 부렸다. 속앓이로 심란할 적엔 허벅지가 무지근해지도록 트랙을 돌았다. 걱정이라는 훼방꾼이 넉장거리로 누워 발목을 잡을 때는 심장이 쿵쾅거릴 때까지 내달렸다. 우울한 기분을 날려 버리기 위해 근육들은 한시도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갉아먹는 온갖 것들에게 먹잇감이 되어주는 몸인데, 고약하게 굴었다.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날 정도로 속을 굶기는 날이 다반사였다. 아프고 억울해서 눈물이 솟구치면 참으라고 성화를 해댔다. 참다못한 뒷목이 날 선 긴장으로 뻣뻣해지고, 만취 상태로 속엣것을 게워낸 위장이 탈이 나도 어김없이 하루를 살아냈다. 과부하로 기진맥진하건만 너만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이 정도는 견뎌야 한다며 으름장을 놓기까지 했다. 밑장 빼듯 오늘은 정신력으로 내일은 살아내야 하는 소명으로 돌려막았다.

사막의 유목민들은 낙타를 밤새 밧줄로 나무에 묶어둔다고 한다. 다음날 줄을 풀어줘도 낙타는 도망가지 못한다. 지난밤 묶여있던 기억이 족쇄로 작용하는 것이다. 살아오는 내내 억압받은 유년의 내 기억들도 무의식 어딘가에 존재하며 순간순간 수면으로 떠올랐다. 불안심리로 본인을 통제하지 못해 가족들에게 쏟아붓던 아버지의 잔소리가 나를 옭아맸다. 누군가의 지적을 받아들이기 어려워 무엇이든 완벽하게 해낼 때까지 자신을 몰아붙였다. 싫은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 진땀이 나도록 몰두했다.

기실, 몸이 바라는 건 그런 게 아니었다. 못하면 못하는 대로 그럴 수 있다고 인정하길 바랐다. 괜찮다고 자기 연민으로 토닥이길 원했다. 이 모든 것을 모르쇠로 일관했기에 제대로 한 방 먹었다.

언제부터인가 붉을 홍(紅)자가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오만 성깔을 부리며 열기를 내뿜고 두드러기를 불러일으켰다. 수시로 가슴이 두근거리고 늘 해 오던 일인데 집중이 되질 않았다. 자신감이 떨어지고 마디마다 삐거덕거렸다. 툭하면 눈물이 났다. 참아보려고 이를 악물면 외려, 통곡 섞인 울음이 터졌다. 둑 터진 제방처럼 한 번 터지면 멈출 수가 없었다. 마음을 따르느라 방치하다시피 한 몸이 폭발한 것이다. 다른 사람의 안부는 잘도 물으면서 정작 몸에는 눈을 감고 귀를 닫은 탓이다.

그제야 까부라진 몸이 눈에 들어왔다. 기울어진 어깨, 새끼발가락에 박힌 굳은살, 깊어지는 팔자주름, 그간 나를 위해 헌신했던 흔적들이 고스란하다. 세월을 얹어두었을 뿐, 뒤돌아보지 못한 후회가 밀려든다.

지친 육신에 쉼을 주기로 한다. 바람을 맞고 싶어 산책에 나선다. 봄날의 생기가 거리에 지천이다. 삽상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여기저기를 거닌다. 오가며 차창에 비치던 가로수 나무들이 오늘따라 가벼워 보인다. 나뭇가지 사이로 하늘이 들락거리고 바람이 걸터앉는다. 가만히 보니 전지가 한창이다.

볕살을 먹고 하늘로 뻗어나가려던 나무의 욕망이 잘려 나간다. 가로등 불빛으로 불면의 나날을 보내고 소음에 시달리면서도 무성하게 잎을 매단 나무였다. 아스팔트 아래 옹색한 곳에 뿌리를 내린 채 내 집인 양 허공을 차지하려 한 나날이었다. 빽빽하게 채웠던 잎새들이 빠져나간 자리가 헐겁다. 이보다 더 홀가분할 수 있을까. 안간힘을 쓰느라 부대끼기만 했던 잎들이 마주 보며 한들거린다. 한결 여유롭다.

세월을 사느라 고단했을 내 몸을 쓸어본다. 한때는 수시로 낯빛을 살펴 보듬어주던 지극한 존재였다. 손짓, 발짓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며 환호작약하던 이들이 곁을 지키며 수발을 들지 않았던가. 밥벌이에 세상살이에 치여 뒷전으로 밀려난 몸이 섧다. 봄이면 새순의 초록을 만끽하기도 전에 더워질 여름을 걱정하고, 가을이면 청명한 하늘의 내음을 맡기보단 뒤따라올 겨울을 준비하느라 깜깜절벽이었던 나의 몸.

토닥여주지 못해 외로웠을 너를 보듬는다. 들여다볼 새 없이 내달린 숨을 내려놓고 편안한 숨으로 머문다. 오직 나를 위해 사는, 단 하나의 시점으로 접점을 이루는 너를 위해 눈을 맞추고 귀를 기울인다.

저만치 깔리는 노을이 참하다. 지난한 시간 위로 주황빛 등이 켜진다. 시나브로 물들어 가는 나를 너에게 보낸다.

'발표작'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곰보 돌 궤적을 긋다/황진숙  (0) 2022.11.29
감각하다/황진숙  (0) 2022.09.05
발/황진숙  (0) 2022.03.23
뒷모습을 읽다/황진숙  (0) 2022.03.12
노년이라는 이름을 가진 당신은/황진숙  (0) 2022.0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