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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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작

발/황진숙

에세이향기 2022. 3. 23. 13:18

발/황진숙

 

굽혔다 폈다 하루를 끌고 간다. 구렁텅이 같은 바닥을 딛고 저벅거린다. 무명으로 태어나 목숨이 다할 때까지 한 채의 몸집을 짊어지고 세상의 길을 헤집는다.

갈라 터진 세월은 발뒤꿈치에 쟁여놓는다. 일생을 동행한 이력으로 너덜거리는 기억들이 허옇게 층을 이룬다. 종일 신발에 몸을 구겨 넣은 채, 보이지 않는 시야를 점유하느라 잡힌 물집과 덧난 상처쯤은 덮어 둔다. 습한 어둠 속의 고린내를 탓할 겨를도 없다. 뒤꿈치가 땅에 닿아 지축을 울리자마자 바닥을 박차고 나간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사불란하다. 핏줄 불거지도록 오그라들며 노면을 움켜쥔다.

요령을 부릴 줄 모르는 우직함은 타고났다. 허기진다고 꼬르륵 소리로 보채거나 화가 난다고 핏발을 세우지도 않는다. 눈물로 슬픔을 호소하거나 푸념을 늘어놓는 법도 없다. 그럴 수 있다고 토닥이는 손길을 받는 일은 더더욱 없다. 부여받은 소임으로 어딘지도 모를 종착지를 향해 무작정 걷는다. 저물녘, 몸 뉠 곳을 찾지 못해 헤매기도 한다. 속내를 알 수 없는 세상사로 헛디딘 날은 가차 없이 나뒹군다. 난장판 같은 생의 터전에선 밥벌이를 위해 우격다짐으로 구른다. 돌부리에 걷어차이고 등짝이 찍히고 피멍이 들어도 일어서야 한다.

머나먼 시절 짐승을 추격하며 맹수를 피해 줄행랑칠 수 있었던 건 발이 있어 가능했다. 미지의 대륙을 정복하고 정글을 탐험하며 사막을 건너 오아시스를 찾는 항로에 앞장선 이는 발이었다. 그가 가지 않으면 볼 수 없다. 맡을 수도 들을 수도 없다. 한 발 한 발 다가가야 기대고 안아주고 맞잡을 수 있으니 온몸을 지휘하는 선봉장이다. 영혼이 까무러질지언정 멈추지 않는 서사다.

살아남기 위해 들끓는 세상의 궁벽한 곳을 휘젓는 발. 천년의 수령을 품은 나무의 뿌리처럼, 담벼락을 타고 넘는 호박의 넝쿨처럼, 허공을 날아오르는 새의 날개처럼, 물속을 헤엄치는 물고기의 지느러미처럼, 발은 어두컴컴한 암흑 속에 뿌리내리고 설상가상을 넘으며 현기증 나는 공중을 맴돌아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닥으로 자맥질한다.

마흔 끝자락에 접어들도록 노역에 종사해 온 내 발을 들여다본다. 미끄러지는 세상 지탱하느라 온 청춘을 걸었다. 굳은살이 박이도록 밟히고 치이며 여기까지 왔다. 반지하 방의 어둠을 몰아내고 하루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발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볼펜을 굴리고 자판을 두드리는 등 화이트칼라의 제스처에 물든 손은 험한 일을 거부했다. 손을 털고 모르쇠로 일관했다. 나약한 척 은근슬쩍 기대는 어깨와 휘어진 굴곡으로 비스듬해진 등도 그에게 짐을 전가했다. 하루하루 빚 독촉에 시달리며 살얼음판을 디디느라 쉴 틈 없이 종종거렸다.

동굴 같은 컴컴한 시간을 지나오며 숱하게 속울음을 토해내고 싶었다. 가풀막을 오르내릴 때, 난데없는 작달비에 온몸이 젖어 드는 날은 끝나지 않을 막막함에 주저앉기도 했다. 고달프고 서러워질 때마다 웅크릴 수 있게 숨을 죽여 멈춰서고, 다시금 일으켜 세워준 그였다. 이정표 없는 굽잇길을 생의 바깥에 선 수문장으로, 곤궁한 여정의 은신처로 보듬어줬기에 무시로 흔들리는 생애를 버틸 수 있었다.

하루의 소란이 모두 잠든 한밤중이 되면 그는 비로소 이고 진 무게를 내려놓는다. 뭉툭한 모양새로 밀고 온 시간이 가지런하다. 가만히 있으면, 질긴 세상살이에 곡예 부리듯 넘어온 세월이 들려온다. 칠칠치 못하게 고꾸라지기나 한다며 퍼붓는 원망과 질타의 소리, 살성이 그리 약해 어쩌냐며 훈수 두는 소리, 쿰쿰한 냄새가 난다고 퉁을 주는 소리가 허공을 울린다. 어쩌면 240밀리의 발은 옥죄는 세상에서 벗어나 자유를 갈망할지 모른다. 굉음과 소음이 뒤엉킨 거리가 아닌, 풀벌레가 목청을 돋우는 황톳길의 감흥에 젖어 들고 싶었을 것이다. 낮달이 밤달이 되도록 유유자적 늘어지고 싶었으리.

그간 선심 쓰듯 신발만 던져주며 무심했던 죄과가 떠오른다. 뻣뻣하게 각을 세우는 신발이 달려들어도 순응하길 종용하던 내가 아니던가. 그럼에도 수많은 생채기를 침묵으로 감내해온 발이 듬직하다. 동살이 잡히면 부스스한 잠을 떨치고 떠날 채비를 하는 발이 미덥다. 세상의 문이 닫힐 때까지 육신의 밑바닥에서 엮어낼 일생의 경전이 거룩하기만 하다. 여기저기 고이는 통증에도 결코, 무너지지 않을 걸음걸음의 발을 경배한다. 거칠어진 그를 한껏 쓰다듬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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