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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작

스치듯 겹쳐지면서/황진숙

에세이향기 2021. 8. 4. 15:55

 

스치듯 겹쳐지면서/황진숙

 

해가 스러지자 어스름이 바통을 이어받는다. 도시의 얼굴마담인 전광판은 허공으로 쉴 새 없이 자막을 흘려보낸다. 뒤늦게 도로를 건너는 이들에게 신호등은 경보음을 울리며 야멸차게 채근한다. 바닥은 개업을 알리는 전단지로 포장되어 낯빛을 알아볼 수 없다. 거리에는 오가는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 호객을 위한 상인의 목청소리, 상점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가 뒤섞여 소란하게 들끓는다.

네온사인에 하나둘 불이 들어오자 터미널을 찾아가는 내 발걸음이 분주하다. 얼마나 걸었을까. 저만치 오가는 행인들 사이로 스티로폼 상자 앞에 덩그러니 앉아 있는 할머니가 눈에 들어온다. 길가 한구석에 플라스틱 바가지 네댓 개를 펼쳐놓은 채, 강마른 손으로 마늘을 까고 있는 모습이 생경하다. 한 평의 공간도 어수룩하게 비워두지 않는 번화가에 좌판이라니. 빈틈없이 들어선 도시 문명과 아귀가 맞지 않았다. 시골 장마당에서나 볼 법한 장면을 오려다가 도심지의 귀퉁이에 붙여놓은 꼴이었다.

순간 오가는 사람들의 속도가 느려진다. 군중의 움직임이 슬로우모션으로 바뀌고 화면에는 할머니가 클로즈업된다. 진즉에 소리는 멈췄다. 무음 속에서 초점은 할머니에게 맞춰진다. 타인에게 관심이 없는 도시의 육법전서는 냉정하다. 다들 무심히 지나친다. 누구 하나 들여다보는 눈길도 없다. 거리의 정물처럼 할머니는 그 자리에 붙박이로 존재할 뿐이다.

그럴듯한 포장이나 진열대도 없다. 바가지 위에 올라앉은 냉이와 달래, 쑥은 기다림에 지쳤는지 한껏 늘어졌다. 신문지에 둘둘 말린 대파 한 단이 푸성귀의 자존심을 내세우며 흙내를 내뿜는다. 가짓수가 몇 개 안 되는 옹색한 살림에 몇 줌 안 되는 콩이 비닐봉지 속에서 구색을 갖추느라 안간힘이다.

사위는 점점 어둠에 잠긴다. 더 있어봤자 팔릴 기미가 없다. 땅을 향해 수그리고 있던 머리를 든 할머니는 잠시 허공을 응시한다. 병석에 누운 식솔을 위해 닳고 닳은 무릎을 끌고 나온 걸까. 낮아진 몸을 어딘가에 기대고 싶지 않아 맨바닥에 좌판을 차린 걸까. 노년의 당신은 침침한 눈과 어두운 귀로 홀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세상의 끈을 놓고 싶지 않아 목숨줄처럼 좌판을 붙들고 있는지 모른다. 어쩌면 당신은 생애에 주인공이었던 적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시부모를 봉양하고 자식들을 키워 대처로 보내느라 수많은 시간을 들러리로 보냈을 것이다. 도망가고 싶은 마음을 번번이 주저앉힌 건 당신의 이름이 아닌, 아무개 며느리 아무개 엄마였다. 아무리 애를 써도 아무개에서 벗어날 수 없는 비애로 평생을 보냈다. 돌고 돌아 자유로워졌는데 아무도 찾아주는 이 없어 쓸쓸하다.

허나 무명인이면 어떤가. 당신은 지금, 화면 속 주연으로 열연 중이다. 구석 자리의 좌판은 배경으로 분하고 지나던 나는 관람객이 되어 몰입한다. 그저 구경꾼에 불과하지만, 노동의 이력으로 굽은 당신의 등을 읽어내리고 살갗에 새겨진 반점의 세월을 헤아린다. 당신의 몸짓 하나에 울읍한 속내까지 그려내며 연민에 젖는다.

몸이 축나도록 뛰어보지만 삶이란 무대는 녹록지 않다. 줄행랑치거나 잠수해 버리고 싶은 날이 부지기수였다. 한 발짝 나갔다 싶으면 두 발짝 후퇴요, 건너뛰었다 싶으면 나동그라지기 일쑤였다. 어미의 치맛자락 잡고 늘어지듯 무대 귀퉁이에서 허우적거리던 내가 치열한 도시의 모퉁이에 붙박인 당신을 알아본 건, 같은 처지여서일지 모른다. 밤낮없이 동동거렸을 당신과 일상의 시름으로 그늘진 내가 덤덤하게 살아야 할 하루가 고팠기 때문이다. 제자리를 맴돌지언정 살아내야 하는, 젖은 울음을 삼키면 살아지기도 하는 시간이 아득하기만 하다.

더는 기다릴 수 없었는지 할머니가 좌판을 접기 시작한다. 가까이 다가가려던 나는 별수 없이 머뭇거린다. 살까 말까 망설이던 봄나물은 이미 꾸려지고 있었다. 여전히 사람들은 분주히 오가고 있고 차도에는 줄을 선 차량이 클랙슨을 울린다. 시계를 보니 버스 출발시간이 가까워진다.

하릴없이 갈 길을 가기로 한다. 여기에서 저기까지 거리를 남겨둔 채, 군중에 뒤섞인다. 나 역시 허우룩한 누군가의 화면 속 주인공으로 남겨지겠지. 삶의 흔적은 그렇게 또 다른 이의 망막 속으로 자리바꿈하며 흘러간다. 스치듯 겹쳐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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