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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모습을 읽다/황진숙

에세이향기 2022. 3. 12. 05:12

 

뒷모습을 읽다/황진숙

 

뒷모습을 읽는다. 의식하거나 꾸미지 못해 정직한, 말이 없어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는, 숨겨진 마음을 보여주는 다층의 실루엣이 뒷모습이다. 따라가다 보면 훤히 읽히기도 한다.

저물녘인데도 병원은 대기 환자로 북적인다. 진료를 마치고 출입문을 나서는 순간이었다. 느닷없이 뒤통수에 알밤이 날아든다. 약간은 장난스럽게, 살며시 튕기는 감촉이 생급스럽다. 뉘라서 꿀밤을 날리는 건가. 뒤돌아본다. 키가 껑충한 웬 젊은이가 빤히 내려다보고 있다. 처음 보는 얼굴이다. 그를 올려다본다. 이제 곧 그가 아는 그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챌 것이다. 몇 초가 흘렀을까. 여전히 그는 요지부동이다. 누구시죠. 내가 먼저 말을 건넨다. 미숙씨 아니에요. 부드러운 말투로 그가 되묻는다. 아닌데요, 사람 잘못 봤어요. 아, 네 죄송합니다. 무안한 얼굴로 상대방이 고개를 숙인다.

단발머리, 청재킷, 나팔바지를 입은 내 뒷모습이 그에겐 영락없는 미숙씨였나 보다. 얼굴의 반이 마스크에 가려지긴 했지만, 앞모습을 보고도 그녀일 거라며 시선을 거두지 않는 그를 바라보기가 괜스레 민망해진다.

미숙씨는 지천명을 목전에 둔 아줌마는 아닐 것이다. 무리했다 싶으면 무릎이 욱신거리고 손가락이 붓는, 낡아가는 육신의 소유자는 아닐 터이다. 힘이 빠지는 악력으로 걸레 하나도 비틀어 짜지 못하는 주부는 아니겠지. 지친 육신, 아직은 괜찮다며 스스로 위무해 보지만 삐거덕거릴 때마다 조금씩 사라지는 용기로 의기소침해지지는 않을 테다.

그의 그녀는 미용실에서 염색할 때 멋내기용으로 할지, 새치용으로 해야 할지 갈림길에 서 봤을까. 신발매장에서 하이힐과 플랫슈즈를 번갈아 바라보며 ‘아직은’과 ‘이제는’ 사이에서 갈등하는 복잡한 심경을 알까. 한때는 ‘죽임’의 반대말인 ‘살림’에 나라를 구할 듯이 집안일에 몰입했던 적이 내게도 있었다는 걸 알기나 할까. 시간의 그늘에 들어설수록 부엌데기로 전락하는 게 마뜩잖아 여기저기 기웃대는 맘을 아는 걸까.

물기가 없어 말라가는 마음자리가 쓸쓸해지는 이즈막이다. 무기력에 빠져 뭐 하나 눈에 들어오지 않아 심드렁한 일상이 버거워지는 요즈음이다. ‘한때는 나도 괜찮았는데’라는 기억조차 희미해지는 오늘, 내 뒷모습을 또래 젊은이로 착각한 그의 모습에 ‘아직은 쓸 만하네.’라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난다.

웃음기의 여운을 타고 남편의 뒷모습이 따라붙는다. 며칠 전 주거니 받거니 투덕거리며 질척이는 감정을 쏟아냈다. 끝내 날 선 몇 마디를 남편의 가슴에 던졌다. 애써 뒤돌아서며 등으로 받아넘기는 남편을 보는 순간 낭패감이 들었다. 이발할 시기가 지나 덥수룩해진 머리카락이 목덜미를 덮고 있지 않은가. 잘라 달라고 보채지도 투정 부리지도 않고 묵묵히 앉아 있는 뒷머리에서 쓸쓸함마저 느껴졌다. 의기양양하던 낯빛과 넙데데한 가슴팍으로 기싸움을 벌이던 앞과 달리 구부정한 굴곡의 뒷면이 시야를 가렸다. 무장한 앞과 달리 무방비 상태인 뒤는 허방을 심어 놓은 듯 측은지심을 불러일으킨다.

내가 쏟아놓고 그 위로 엎질러진 느낌이었다. 미끄러져 살갗이 까인 듯 아려왔다. 애당초 오금을 박지 말았어야 했는데. 주워 담자니 자존심이 허락지 않고 뒷모습에서 시선을 거둘 수도 없어 난감했다.

뒤돌아서서 먼 곳을 응시하는 남편의 독사진에 반한 시절이 있었다. 비율 좋은 뒤태는 둘째치고라도 해 질 녘 노을에 서서, 저 멀리 바라다보는 감성이라면 기꺼이 함께하고 싶었다. 따스하면서 강인하고 듬직했다. 살면서 슬픔이 치밀어 오르는 날, 맞대고 싶은 뒤를 가진 남편이었다.

지난날, 좌표를 정해 놓은 탓에 등을 맞댈 여유도 없이 속도에 얽매여 살아왔다. 겁 없이 시작한 이십 대를 지나 아이들만 보고 살아온 삼십 대를 경유해서 사십 대의 끄트머리에 들어섰다. 느릿하게 읽어내리는 뒤보다 낯빛과 말투로 알아차리는 앞을 바라보는 게 편했다. 패기 하나로 질주하던 시절을 보내고 중년에 선 지금, 불쑥 나타난 뒤가 생경하기만 하다.

사느라 바빴다고 핑계를 댄다. 등 돌리고 내외하는 것보단 낫지 않냐며 우겨도 본다. 이제야 눈에 들어오는 뒷모습이, 그간 알아차리지 못했던 무관심의 자책이 속내를 파고든다.

보이지 않아 먼 곳인 그곳. 마주 보는 앞과 힘겨루기를 하기도 하고, 들이치는 감정을 침묵으로 받아내느라 고독해진 뒤. 내가 볼 수 없으니 당신이 바라봐 줄 수밖에 없는 뒤. 착각이라도 좋고 진실이라도 좋다. 나를 위해 당신을 위해 기꺼이 읽어 내리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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