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2024/05/05 4

붉은 벚꽃 / 한경희

붉은 벚꽃 / 한경희  되돌아보면 할머니는 그때 할머니가 아니었다. 쉰을 갓 넘긴 아줌마였다. 열아홉에 엄마를 낳고 엄마가 스물셋에 나를 낳았으니 고작 마흔둘에 할머니가 되었다. 엄마는 처음부터 엄마였고 할머니는 처음부터 할머니라고 여겼던 어린 시절, 할머니에게도 맨발로 비 오는 거리를 첨벙거리던 때가 있었고, 좋아하는 동네 오빠를 보면 골목 모퉁이로 숨던 시절이 있었다는 걸 상상하지 못했다. 그날 그 자리가 아니었다면 나는 좀 더 늦게 그것을 깨달았을 것이다.손님이 뜸한 비 오는 날 오후가 되면 할머니의 모자점은 동네 사랑방이 되었다. 할머니는 설탕을 넣고 끓인 막걸리를 양은 주전자에 내오고 고추장떡을 지졌다. 알코올기가 날아간 그 막걸리를 '모주'라고 불렀다. 어른들 틈에 끼어 있었지만 나는 내가 어..

좋은 수필 2024.05.05

무舞 / 정성희

무舞 / 정성희    화창한 봄날이다. 한 무리의 사물놀이패들이 소고와 장고를 두드리며 겨우내 잠든 대지를 깨우고 있다. 여기저기서 꽃불이 터지자, 봄물에 나들이 나온 구경꾼들이 주변으로 모여든다.  둥둥둥 북이 울리자 상쇠는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며 온몸으로 신명을 몰아온다. 바람의 장단에 몸을 떠는 대나무 마냥 주춤거리던 늙수그레한 노인네들의 소맷자락도 들썩이기 시작한다. 작대기 장단에 영춘가를 부르며 흠뻑 흥에 취한 나이 든 춤꾼들은 땟국에 전 그들의 인생만큼이나 후줄근하고 걸걸한 춤으로 무아지경에 이른다.  엎드려 숨죽이고 있던 내 본능도 겨울 문풍지처럼 들썩대며 몸을 보챈다. 그 칭얼대는 소리에 귀 기울이며 몸이 시키는 대로 노장들의 원시적인 춤동작을 따라간다. 살아있음이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 환..

좋은 수필 2024.05.05

육철낫 / 김기화

육철낫  /   김기화                                                                                          벌초하러 가는 길에 늘 챙기는 것 중 하나가 낫이다. 엄마는 의식 치르듯 며칠 전부터 낫을 갈아 신문지에 곱게 싸놓는다. 그것도 모자라 집을 나설 때는 종이에 감싼 낫을 다시 가방에 조심스레 챙겨 넣는다. 해마다 고집을 세워 동행하던 엄마가 올해는 먼저 안가겠다고, 아니 못 가겠다고 하셨다. 불편한 몸이지만 손수 낫을 잡아야만 편하다던 분이다. 우리는 벌초 후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와 보여드리겠다는 말로 안심을 시켜드린 후 집을 나섰다. 그러나 산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이전과 달리 빨라졌는데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예초기가 ..

좋은 수필 2024.05.05

엇박자노래 / 임미옥

엇박자노래 / 임미옥 따당~땅, 따당~땅, 왼손으로는 건반을 타건하며 오른손은 햄머로 조율 핀을 조여 간다. 혼을 모아 공중에 흩어지는 맥놀이들을 잡아 동음 시킨 뒤, 현들을 표준 음고에 맞춘다. 엇박자로 두들겨 생기는 맥놀이들, 기억저편서 들려오는 아련한 노래 소리들과 겹쳐진다. 들린다…. 그리운 가락들이 들려온다. 아! 오래전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부르시던 엇박자 가락들이다.비가 오거나 눈이 오거나 몸이 아파 어머니가 몹시 그리운 날은 더욱 선명하게 들리던 소리들이다. 영혼 깊은 곳에서 울려나오는 그윽하고 정겨운 가락들, 끊어질 듯 말 듯 이어지던 소리들,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조율하던 손을 멈추었다. 어머니 손바닥처럼 뻣뻣하고 거칠거칠한 현들을 쓰다듬었다.현이 파르르 떤다. 두들겨 맞고 또 맞아서 건들..

좋은 수필 2024.05.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