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2024/04 62

깃들이다 / 김은주

깃들이다 / 김은주아마 이른 봄이었나 보다. 겨울 일을 막 끝내고 풍성하게 주어진 시간을 바느질로 달래고 있는데 베란다 광목 커튼 뒤가 이상하게 수상쩍다. 꾸르륵 꾸르륵, 창자가 밥을 밀어내는 소리 같기도 하고 어찌 들으니 개수대에 물 빠지는 소리 같기도 하다. 자투리 천으로 말 여러 마리 만들고 고무신 한 켤레를 다 깁는 사이에도 정체 모를 소리는 내내 주위를 맴돌았다. 창밖은 위태로운 난간이고 강을 끼고 있어 사나흘이 멀다 하고 바람이 불어대니 그 무엇도 깃들 틈이 없는 곳이다. 소리의 정체가 궁금하긴 했으나 아직 바람이 차니 창을 열어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다 변화무쌍한 봄 날씨는 황사 바람이 몰아치고 볕이 났다가 또 사월에 함박눈까지 내렸다. 조석으로 변하는 날씨에 휘둘리다 묘한 소리는 사라..

좋은 수필 2024.04.30

벽 / 허세욱

벽 / 허세욱벽을 보면 왠지 친근했다. 그 텁텁한 살결이 이웃집 아저씨 같고, 고집불통으로 서 있는 모습은 답답한 선머슴을 보는 느낌이다. 우릴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막지만 지금도 작은 공을 꺼내 거기다 벽치기 하고 싶다. 우릴 건너가지 못하게 버티고 섰지만 거기엔 누가 누굴 좋아한다고 갈겨놓은 낙서가 심심찮게 보인다. 우릴 더 멀리 볼 수 없도록 막았지만 거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등짝을 기대고 시원하게 두 어깨를 문지르고 싶다.그 구조는 별 게 아니었다. 황토에다 지푸라기를 반죽하면 그만이다. 양회벽이라도 철근이나 각목을 촘촘히 세우고 거기에 덕지덕지 흙을 붙이고 시멘트를 바르고, 다시 환한 벽지에다 풀을 멱칠하여 슬슬 손질하면 말끔해졌다.작은 집에 많은 것은 섬돌 위에 고무신만 아니었다. 작은 초가삼간..

좋은 수필 2024.04.30

김치와 고등어 / 백금태

김치와 고등어 / 백금태김치와 고등어 / 백금태 시큼한 김치 한 쪽을 썩둑썩둑 썰어 냄비 바닥에 깔았다. 양파와 파도 길쭉길쭉하게 잘라 옆에 곁들였다. 그 위에 금방 어물전에서 사 온 살아 펄펄 뛸 것 같은 고등어를 손질하여 얹고 고춧가루를 듬뿍 뿌렸다. 고등어가 잠길 듯 말 듯 물을 잘박하게 붓고 가스 불을 댕겼다. 시간이 흐를수록 온 집안이 김치의 시큼한 맛과 고등어의 구수한 냄새에 푹 빠졌다. 몇 년이나 냉장고 밑바닥에 묵혀 있던 김치와 고등어가 서로를 품으며 깊은 맛을 뿜어낸다.그 김치는 부산에 사는 언니가 삼 년 전에 담가 준 것이었다. 직장 다니는 동생이 안쓰러운지 툭하면 김치 상자가 택배로 배달되곤 한다. 그해는 동생에 대한 언니의 사랑이 더 깊었는지 아니면 바닷가에 사는 것을 자랑이라도 하..

좋은 수필 2024.04.30

대포항 근황 / 고창환

대포항 근황 / 고창환 ​​ 청봉보다 높은 파도가 허리를 편다 발이 묶인 목선이 목을 빼고 바라보는 설악은 가을비에 맨몸으로 잠겨 있다 긴 여행에서 돌아와 정박중인 갈매기들이 저녁 하늘에 부리를 꽂고 끼룩끼룩 부푼 모험담을 풀어놓는데 횟집 좌판에서 비린 바람이 뼈째 썰린다 여기 퍼질러 앉아 쥐치나 씹으며 막소주 한 사발에 취해볼거나 할말이 많은 듯 입술을 들썩이는 불빛 몇 개가 바다로 떨어진다 막무가내 파도는 삼킬 것을 찾아 빗발에 젖은 목젖을 세우지만 오늘은 횟감처럼 가련한 삶에 지친 사람들이 모여드는 대포항 저물 무렵 청봉은 말없이 뿌리까지 젖는다 빗발은 미시령에서 폭설로 차오르고 희뿌연 늦가을 설악이 지워질 듯 어둠이 바다에서 느리게 걸어온다 이제 산길 뱃길 모든 소식이 끊기고 나면 모두가 한 마리..

좋은 시 2024.04.29

기웃 둥한 어깨 / 이재무

기웃 둥한 어깨 / 이재무  ​​한쪽으로 형편없이 기운 어깨가달팽이 걸음으로 계단을 오르고 있다저 기울기는 시대의 풍속과 간난의 세월이 만든 것들끓다 솟구쳐 오르는 불온한 피몸의 제방이 되어 막아왔을 어깨시간에 단련될수록 각질은 두꺼워진다어깨는 적응 혹은 순응의 표상그러나 큰 울음의 발동기 돌릴 때는눈코입보다 먼저 시동이 걸리는 어깨봐라, 저게 저 사람의 전력이다질통, 책보, 따블백, 배낭, 가방 등속 메지는 동안파인 홈과 돌출한 뼈추 잃은 저울인 냥 기웃 둥한 생수평을 잃은 높이는 때로 얼마나 불편하고 불안한가반원으로 둥글게 몸을 만 사내가계단 층층에 숨을 질질 흘리며 오르고 있다

좋은 시 2024.04.29

옴살/김은주

옴살/김은주 가을이 내리는 골목길은 한적하고 쓸쓸하다. 인적 없는 길을 따라 올라가니 거기 곧 쓰러질 듯 집 한 채 있다.  주황색 양철지붕 아래 한 뼘 크기의 일자집이다. 여닫이 방문 두 짝과 작은 창이 하나 있는 조촐한 여염집이다. 방문 앞에는 낮은 나무 책상이 둘, 나란히 놓여 있고 그 위에 누가 꺾어다 뒀는지 빈 병에 코스모스 한 줌 꽂혀 있다. 오른쪽 추녀 아래로 감나무 한 그루 서 있고 그 아래 블록으로 쌓아 올린 허름한 부엌이 있다. 부엌문은 따로 없고 군용천막을 말아 올렸다 내리는 정도로 문을 대신하고 있다. 예배당 종지기로 일생 살다간 권정생의 생가다. 마당에 무성하게 잡초가 자라나 폐가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 분의 삶에 비춰보자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더 나아 보인다. 물색없이 조성해..

좋은 수필 2024.04.28

다시 시작 / 김은주

다시 시작 / 김은주 목화가 툭 하고 고개를 꺾었다. 경주어 얻어 온 씨앗이 되 피우고 다시 살아나 여러 해 나의 뜰에서 산다. 솜이 칭칭 감긴 씨앗 몇 알을 누구에게 받아 왔는지 통 기억에 없다. 백련이 지고만 어느 논둑에서 받은 기억은 아련한데 누구였는지 무슨 일로 연 밭에서 목화씨를 건넸는지 아득하기만 하다. 마른 기억은 바람에 사라졌지만 해마다 야무진 검은 씨앗을 쓰다만 종이에 싸 확독에 보관해 둔다. 옹기에서 겨울을 난 씨앗은 봄이 되면 다른 일년초와 함꼐 뜰 여기저기 뿌려지는데 그 위치는 꽃 피는 여름이나 되어야 정확히 알게 된다. 마당 귀퉁이에 있는 듯 없는 듯 그렇게 꽃 피우고 지다가 초록이 쓰러지는 이맘때쯤 흰 솜꽃을 피워 존재를 드러낸다. 집 비운 사이 된서리가 다녀간 모양이다. 온통 ..

좋은 수필 2024.04.28

글밥/김은주

글 밥                                                     김은주 젓가락을 밥 속에 찔러 넣는다. 옆으로 젖히니 덩어리에서 덜어져 나온 밥 한 덩이가 내 입속으로 들어온다. 밥을 입속으로 데리고 온 젓가락을 빼내며 오래 밥을 씹는다. 밥을 씹으며 내다 본 창밖에는 오월의 장미가 붉다. 참으로 게으른 식사다. 어른들이 봤으면 복 달아난다며 등을 쳤을 일이다. 매번 처음인 듯 밥을 씹는다. 처음에는 혀 위에서 구르던 밥 덩어리가 씹을수록 알갱이로 변하며 양옆 턱 선으로 가 고인다. 고인 밥 알갱이가 다시 어금니 위로 올라와 부서지고 다시 턱 아래로 가 씹힌다. 한참을 이러다 보면 혀 아래 침샘에서 달달한 침이 입 안 가득 고여 온다. 밥 알갱이가 녹아들며 느껴지는 이..

좋은 수필 2024.04.28

사막 건너기/김은주

사막 건너기 / 김은주   첫닭이 울기도 전 더듬더듬 어둠을 가르고 골목길에 나선다. 골목길은 이미 낯선 이국의 언어와 분주한 지프의 시동 소리가 함께 실타래처럼 엉켰다. 세상의 모든 말은 귀가 열리면 언어이고 귓등을 되돌아 나가면 소음이다. 왕왕거리는 소음도 며칠 듣다가 보니 말속에 가락도 있고 정情도 느껴진다. 여남은 대의 지프가 일제히 한 방향으로 불빛을 쏜다. 길쭉한 빛 사이로 건조한 먼지가 둥둥 떠다니고 출발을 재촉하는 시동 소리가 사뭇 우렁차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흰옷을 입은 남자가 고개와 손을 동시에 차 쪽으로 흔들며 차에 오르라는 신호를 보낸다. 긴말은 필요 없고 서로 알아서 제자리를 찾아 차에 오른다. 찬 새벽공기에 코트 깃을 세우고 손가방도 가슴을 가로질러 단단히 맸다. 지금 우리는 깜..

좋은 수필 2024.04.28

달개비/김은주

달개비                                                                                                                 김은주  국 안에 무가 제법 투명하다. 함께 넣은 파와 마늘이 어우러져 끓고 있는 국물도 곡진해졌다. 반찬 몇 가지를 조물조물하고 뒤이어 식혜 한 통을 다 삭혀 두는 사이에도 그녀는 여태다. 빠진 목으로 짐작건대 오고도 남았을 시간이건만 감감무소식이다. 기다리는 자가 느끼는 시간은 오마는 사람의 두 배로 길다. 같은 시간이지만 오는 이에게는 서둘러야 하니 짧게 느껴질 테고 기다리는 사람은 오리무중이니 까막눈이 될 수밖에 없다. 엿가락처럼 늘어진 시간을 주체할 수 없어 걸레질하다가 무단히 멀쩡하게 놓인..

좋은 수필 2024.04.28

토굴 /김은주

토굴 /김은주  글을 재우려고 방문을 닫는다. 자꾸만 들떠 달아나는 글을 잡고 뉘여 토닥토닥 등을 두드린다. 이불도 끌어당겨 덮어 보고 흥얼거리며 자장가도 불러 본다. 겨드랑이 아래 끼고 누워 충분히 숨길도 열어주고 그래도 뒤척이면 머리까지 쓰다듬어 준다. 스르르 눈 감을 때까지, 달디 단 잠 속에 들 때까지 오래 글을 어르고 달랜다. 처음부터 재우려는 생각은 없었다. 행간을 넘나들며 혼자 잘 놀 때는 그러려니 하고 두고 보지만 걸려 넘어지고 징징거리기 시작하면 그때는 푹 재우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다. 문턱에 걸리고 툴툴거리는 글을 어찌 그냥 두고 보겠는가? 쓰는 자는 툴툴거림의 이유라도 알지만 읽는 자에게 그것은 독서의 물길을 막는 일이니 말이다. 접시꽃 흐드러진 칠월의 뙤약볕이 방까지 도달하기에는 ..

좋은 수필 2024.04.28

자객 / 김은주

자객 / 김은주  자객이 떴다. 푸른 안개도 바람을 가르는 그림자도 없다. 끊어 놓을 듯한 호흡도 꿈틀거리는 맥박 또한 찾아볼 수 없다. 달빛 한줌 등에 업지 않고 월담은 애당초 꿈도 꾸지 않은 듯하다. 자객은 그 흔한 검 한 자루 손에 쥐지 않고 무더운 염천을 건너 우리에게로 왔다. 심복 하나쯤 둘 법도 한데 오직 혼자다. 이울어진 빛의 배후에 도사리고 앉았다가 싸늘한 쇠붙이 올가미 하나 달랑 들고 긴 유리병의 목을 따러 하강한 것이다. 금방이라도 숨 줄을 끊어 놓을 듯한 자객의 기세에도 마개는 한치의 흔들림도 없다. 병은 긴 목을 빼고 앉아 언제나 목숨을 내놓기 위한 것이라는 듯 일말의 저항도 없어 뵌다. 병은 자객을 만나기 전 냉골의 방에 앉아 긴 참선에 들었을 것이다. 화두타파를 위해 목구멍까지 ..

좋은 수필 2024.04.28

빈방/김은주

빈방                                                                                            김은주  홍매화가 붉게 핀 길 건너 할머니집이 전에 없이 부산하다. 마당 가득 사람이 북적대고 환하게 불도 밝혀져 있다. 집 앞 텃밭에 흙이 녹아 씨를 넣어야 할 때가 다 되었는 데도 할머니는 기척이 없었다. 추운 겨울을 건너기 위해 아들네 집에라도 가셨나 싶었는데 오늘 밤 할머니는 조등(弔燈)으로 내걸려 있다. 일 년 내도록 드나드는 사람 하나 없더니 오늘 보니 식구들도 참 많다. 보이지 않는 식구들이 저리 많은데 할머니는 겨우내 빈방에 사람을 들이고 싶어 그리 안달이셨을까. 나는 베란다 창틀에 기대 할머니 집 마당을 유리병 속처럼 내려..

좋은 수필 2024.04.28

비와 당신의 이야기 / 김 경

비와 당신의 이야기 / 김 경     비가 내린다. 여름엔 그토록 야박하더니 가을 들어 장맛비처럼 퍼붓는다. 마치 누군가의 미련 같다.때마침 라디오에서는 '비와 당신의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한때 김태원이 이끄는 록그룹 「부활」에 빠져서 전국 콘서트를 따라다닐 때 엔딩 곡으로 어김없이 등장하던 노래다. 화려한 조명 아래 비의 영상이 펼쳐지고 보컬이 혼신을 다해 무대를 장악하면 마지막이라는 아쉬움과 함께 절절한 노랫말이 모두들 까무러치게 했다.김태원이 열일곱 살에 썼다는 이 곡은 비오는 날 들어야 제격이다. 그것도 소나기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어두컴컴한 날 홀로 음률 속을 헤매노라면, 그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이된다. 내게도 언젠가 비오는 날의 약속이 있었고, 그 약속을 지키지도 못한 채 떠나간 사랑이 존재했..

좋은 수필 2024.04.27

그림자 갈아입기 / 차주일

그림자 갈아입기 / 차주일 ​​ 14년 넘게 입어온 청바지 무릎이 해졌다날실은 닳아 없어지고 수평의 씨줄만 남아 있다내 청춘의 무릎도 저만큼 환부를 드러냈을 것이다사람들은 내 청춘에서 어떤 수평을 보았을까청춘을 질주해 온 내 걸음 오래오래 바라보니나의 수직을 코바늘처럼 당겨대는 무릎이바로 전 한 걸음을 그림자에 얽어 짠다수직이 무릎을 다시 잡아당기고,내 몸을 닮아가는 그림자만 수평으로 누워 있다내가 몸속에 빛을 켜면 드러나는 저 몇 자의 피륙에서내 청춘은 등잔 기름처럼 닳고 있다이토록 환한 만성통증을 외면해온 나여네게로 가는 문門인 네 환부를 바라보아라, 그러면꼿꼿이 서려고만 했던 나 지워진 어느 날어두워서 뚜렷한 네 그림자를 밟고 있을 것이다그날은 전생으로 떠났던 한 사람 돌아와 무릎 끓고네 그림자를 ..

좋은 시 2024.04.26

붉은 염전 / 김평엽

붉은 염전 / 김평엽   ​​내게도 인생의 도면이 있었다갱지 같은 마누라와 방구석에 누워씨감자 심듯 꿈을 심고 간도 맞추며 살고 싶었다바닥에 엎디어 넙치처럼 뒹굴며아들 딸 낳고 싶었는데돌아다보면 염전 하나 일구었을 뿐성혼선언문 없이 산 게 문제다선녀처럼 그녀를 믿은 게 문제다정화수에 담긴 모든 꿈은 증발하고외상의 눈금만 술잔에 칼집을 내고 있었다알았다, 인생이란 차용증서 한 장이라는 것가슴뼈 한 개 분지르며 마지막 가서야 알았다소금보다 짠 게 계집의 입술임을염전에서 바닥 긁는 사내들이여 아는가슬픔까지 인출해 버린 밑바닥에서누구의 눈물도 담보할 수 없다는 것계집 등짝 같은 해안에 자욱이 되새 떼 내려노랗게 우울증 도지는 현실염전만이 소금을 만드는 게 아니다우리 가슴을 후벼도, 아홉 번 씩 태운소금 서 말 ..

좋은 시 2024.04.26

시 파는 사람 / 이상국

시 파는 사람 / 이상국  젊어서는 몸을 팔았으나나도 쓸데없이 나이를 먹은데다근력 또한 보잘것없었으므로요즘은 시를 내다 판다그런데 내 시라는 게 또 촌스러워서일년에 열 편쯤 팔면 잘 판다그것도 더러는 외상이어서아내는 공공근로나 다니는 게 낫다고 하지만사람이란 저마다 품격이 있는 법이 장사에도 때로는 유행이 있어요즘은 절간 이야기나 물푸레나무 혹은하늘의 별을 섞어내기도 하는데어떤 날은 서울에서 주문이 오기도 한다보통은 시골보다 값을 조금 더 쳐주긴 해도말이 그렇지 떼이기 일쑤다그래도 그것으로 나는 자동차의 기름도 사고아이들에게 용돈을 주기도 하는데가끔 장부를 펴놓고 수지를 따져보는 날이면세상이 허술한 게 고마워서 혼자 웃기도 한다사람들은 내 시의 원가가 만만찮으리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사실은 우주에서 원료..

좋은 시 2024.04.26

산벚나무를 읽는 저녁 / 최재영

산벚나무를 읽는 저녁  /  최재영    물에 젖기 위해백 년을 걸어가는 나무가 있지요퉁퉁 부르튼 맨발 사이로세상의 저녁은 소리 없이 스며들고다가오는 천년을 가만 응시하느라나는 바싹 가물어 있었지요간절함은 어디에도 기록할 수 없어한 획씩 혈관을 파고 들어갈 때마다산벚의 흰 그늘까지 움찔거렸겠지요한 걸음 걸을 때마다제 근원의 몸부림으로 뜨거웠을 시간들그때의 다급한 호흡은어떤 이의 애달픈 기록이었을까요산벚이 거느린 골짜기들이일제히 먹빛의 힘으로 일어서는 저녁경판에 서려 있는 푸른 맥박 소리온 산 가득 울려 퍼지는데먹물보다 진한 핏빛 눈물 하얗게 쏟아지네요오래전 생의 바깥에 등불을 밝힌 이들은지금도 구국의 화엄을 새기고 있을까요봄이면 경판 속의 활자들 환하게 피고 지고짜디짠 소금기 허옇게 일어서는지골짜기마다 ..

좋은 시 2024.04.25

사랑길 / 박월수

사랑길 / 박월수 소리 내지 않는 마루를 본다. 솟을대문 높다란 송소고택 큰 사랑채에 딸린 툇마루는 밟아도 소리가 나지 않는다. 쪽문쯤에서 안채 바람벽으로 이어지는 툇마루는 두께가 유난하다. 사랑채에 기거하던 바깥양반이 안채로 밤 나들이 가던 길이란다. 모르긴 해도 가슴이 꽤나 두근거렸을 아름다운 길이다. 아랫사람 눈에 띄지 않으려 부러 그리 만들었단다. 이슥한 밤 사랑채의 툇마루 밟는 소리를 체통을 흐려놓는 소리로 여겼던 옛 양반이 측은해진다. 아흔아홉 칸 저택에서 많은 식솔을 호령하던 양반에게도 드러내 놓고 사랑하는 일만은 허용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남의 눈을 피해 아내마저 은밀하게 만나야 했던 남자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한 집에 살면서도 부부가 떨어져 지내는 마음은 애틋하고 절절했을 게다. 하나 ..

좋은 수필 2024.04.23

숫돌 / 박영순

숫돌 / 박영순 칼을 빼 들어 본다. 칼의 무딘 정도를 손끝으로 직감한다. 칼날이 무뎌진 걸 느끼면 칼 가는 줄로 쓱싹 대충 갈아 사용하는 나이다. 그러나 나의 옛집에서는 매 식사 때마다 찬거리를 썰고 다졌던 칼이 도마 위에서 재료들을 미끄러뜨리면 칼을 들고 장독대로 향해 걸어 나가셨던 엄마가 계셨다. 그곳에서 마음에 드는 항아리 뚜껑 하나를 열어 거꾸로 덮어놓으시고는 뚜껑 테두리에 칼날을 쓱싹 문질러 갈아 쓰셨다. 칼날이 더 무디어지면 툇마루 아래 놓아둔 우리 집의 숫돌이 등장하였다. 숫돌은 아버지의 전유물처럼 칼이나 낫을 갈 때만 우리들 앞에 놓였다. 아버지의 수고로 칼날은 시퍼렇게 번뜩였다. 그런 칼날을 받아 보며 긴장하여 떨던 엄마는 자주 칼날에 베이셨다. “조금만 덜 갈아 주면 될 텐데, 소 잡..

좋은 수필 2024.0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