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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와 당신의 이야기 / 김 경

에세이향기 2024. 4. 27. 10:45

 

비와 당신의 이야기 / 김 경

    


 


비가 내린다. 여름엔 그토록 야박하더니 가을 들어 장맛비처럼 퍼붓는다. 마치 누군가의 미련 같다.
때마침 라디오에서는 '비와 당신의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한때 김태원이 이끄는 록그룹 「부활」에 빠져서 전국 콘서트를 따라다닐 때 엔딩 곡으로 어김없이 등장하던 노래다. 화려한 조명 아래 비의 영상이 펼쳐지고 보컬이 혼신을 다해 무대를 장악하면 마지막이라는 아쉬움과 함께 절절한 노랫말이 모두들 까무러치게 했다.
김태원이 열일곱 살에 썼다는 이 곡은 비오는 날 들어야 제격이다. 그것도 소나기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어두컴컴한 날 홀로 음률 속을 헤매노라면, 그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이된다. 내게도 언젠가 비오는 날의 약속이 있었고, 그 약속을 지키지도 못한 채 떠나간 사랑이 존재했었던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한다. 그 착각은 노래가 끝날 때쯤 실제 스토리로 탈바꿈하기에 이른다.
자신의 음악인생을 다큐드라마로 만들어 방영했을 때, 김태원은 말했다. 비는 자신과 질기게 이어져있는 음악에의 탯줄이나 다름없다고. 떠나간 첫사랑을 향해 울부짖을 때도, 넘버원 보컬 김재기가 유명을 달리할 때도 비는 절절하게, 매정하게 세상을 향해 쏟아졌다.
딱히 그런 이유들이 아니더라도 그에게 비는 음악이요, 음악은 비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어린 날의 우울하고도 독특한 성정이 유독 비오는 날과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골방에 틀어박혀 빗소리를 들으며 곡 만들기에 심취해서인지 그가 쓰는 노랫말은 시적이거나 난해한 것이 특징이다. 자신만의 세계의 언어로 노래를 만들어 온 이력은 그들의 세상에서는 이미 호가 났다.
그래서일까. '비와 당신의 이야기'를 연주할 때는 기타 줄을 당기고 밀어내는 손놀림이 그 어느 때보다 현란하고도 경건하다. 왜소한 몸집으로 한 티끌의 에너지까지 끌어 모아 기타와 혼연일체가 될 때 보컬은 마지막 부분인 '사랑해'를 읊조린다. 그것은 무려 서른 번이나 반복되고 사람들은 숨을 죽이며 홀려 들어간다.
스무 번을 넘고 서른 번에 가까울 즈음, '사랑해'는 어느 순간 소나기 소리로 빙의된다. 잦아졌다가 거칠어지는 소낙비는 속삭임이다가 절규이다가 한다. 빗속에서 우는 소년이 보이고, 어두운 빗줄기 사이로 한 영혼이 떠나가는 것이 보인다. 누군가를 향한 그리운 비명이 빗속을 헤매는 상상에 이르면 가슴은 저절로 미어터진다.
실제로 서울의 어느 공연장에서 사십대로 보이는 여인이 펑펑 소리 내어 우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비와 당신의 노래'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였는데 그녀 안에 있던 슬픔인지 회한인지가 폭발하는 순간이었다. 무대에서 그 모습을 본 김태원이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앞자리의 그녀에게 전해줄 때 환호와 함께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그것은 노래와 여인과 작곡가 모두에게 주는 응원이었다. 한 사람의 영혼을 송두리째 사로잡을 수 있다면 그 곡은 명곡의 반열에 올라도 좋을 것이다.
이어 콘서트 장을 꽉 채운 관객들이 한 목소리로 '사랑해'를 합창하기에 이르면 자신도 몰랐을 아프고도 쓸쓸한 기억이 조금씩 소멸해가는 기적을 경험하게 된다. 음악이 존재하는 이유 중에 이만한 것이 어디 있으랴. 음악이 가져야 할 바람직한 역할 또는 위대한 힘이 이 노래에 있다고 나는 믿는다.
우연한 상념 그리고 정체모를 그리움까지 지금보다 젊었던 한 때의 내 삶과 열정과 인연에 집착하는 시간이 있다면 바로 이순간이다. 오직 사랑해야만 했던, 잃어버린 그 사랑을 위해 심장을 파고드는 노래하나 있어 다행이다.
속절없이 가을비가 퍼부을 때 그리하여 떠나간 것들이 쓸쓸할 때, 빗소리와 옛사랑과 그리움에 한없이 침잠하는 당신을 위해 여기 '비와 당신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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