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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

사랑길 / 박월수

에세이향기 2024. 4. 23. 03:17

사랑길 / 박월수

 

 

소리 내지 않는 마루를 본다. 솟을대문 높다란 송소고택 큰 사랑채에 딸린 툇마루는 밟아도 소리가 나지 않는다. 쪽문쯤에서 안채 바람벽으로 이어지는 툇마루는 두께가 유난하다. 사랑채에 기거하던 바깥양반이 안채로 밤 나들이 가던 길이란다. 모르긴 해도 가슴이 꽤나 두근거렸을 아름다운 길이다. 아랫사람 눈에 띄지 않으려 부러 그리 만들었단다. 이슥한 밤 사랑채의 툇마루 밟는 소리를 체통을 흐려놓는 소리로 여겼던 옛 양반이 측은해진다.

아흔아홉 칸 저택에서 많은 식솔을 호령하던 양반에게도 드러내 놓고 사랑하는 일만은 허용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남의 눈을 피해 아내마저 은밀하게 만나야 했던 남자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한 집에 살면서도 부부가 떨어져 지내는 마음은 애틋하고 절절했을 게다. 하나 느리게 흐르는 낮 시간을 지나 사랑길을 몰래 걸을 때도 남자는 체통을 내려놓지 않았을 게다.

고택의 문턱마다 가운데를 오목하게 파놓은 게 인상적이다. 아녀자의 치맛자락이 문턱에 닿지 않도록 한 주인의 마음이 담겨있다. 배려를 아는 남정네가 이 집의 주인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런 남정네라면 둥근 달을 옆에 끼고도 안채로 스며들지 않았을까. 세상 귀가 잠든 밤 안채 마루 끝에 나란히 앉아 달 구경도 했을 게다. 달빛 아래 환히 빛나는 꽃을 보며 예쁜 아이를 갖자는 얘기도 나누었을까. 유교를 중시하던 집안에서 맘대로 다가갈 수도 만질 수도 없던 부부의 금슬은 과연 어떠했을까. 백 년이 넘도록 한자리에 엎드린 툇마루는 늦가을 볕을 끌어안고 여전히 묵언 중이다.

오래된 사랑길에 걸터앉아 내 남자가 내게 오던 길을 생각한다. 그는 늘 자신의 팔베개를 내게 내밀었다. 토라진 내가 입이 뾰족해져 있을 때에도 그는 볼품없는 자신의 팔베개를 펼치며 내 어깨를 끌어당겼다. 그의 팔베개엔 무슨 마력이라도 숨어있는 모양이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섭섭함이 응어리져있던 내속은 금세 풀렸다. 푸른 힘줄이 꿈틀대는 그의 팔베개 안에서 나는 관능을 아는 성숙한​ 어른이 되어갔다.

그의 팔베개는 늘 일정한 온도를 지니고 있었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아 좋았다. 좀 딱딱하긴 했지만 숨이 죽어 착 가라앉을 일도 없었고 언제나 내가 베기에 적당한 높이였다. 베갯잇을 갈 필요가 없으니 더욱 편리했다. 내겐 참 맞춤한 그의 팔베개를 하고 있으면 불면증 따윈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나는 가끔씩 팔베개를 베고 누운 채 그에게서 흐르는 강물 소리를 들었다. 어떨 땐 진초록 잎을 매단 커다란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도 들렸다. 부드럽고 때로는 거친 그의 팔베개에 푹 싸여 있으면 세상 두려울 게 없었다.

그는 습관처럼 나를 팔베개로 길을 들였다. 그런 그가 어느 날부터 자신의 팔베개를 숨겨버렸다. 당최 어디에 가서 펼쳐놓고 잠이 드는지 알 길이 없었다. 팔베개를 잃어버린 난 불안해서 견디기 힘들었다. 애초에 길들지 말았어야 한다는 걸 알았을 땐 이미 때는 늦어있었다. 모르는 사이에 그는 내게로 오는 길을 접은 적 있었고, 나는 그에게로 가는 길을 잃은 적 있었다.

그와 나 사이엔 서로를 오래 생각할 공간을 마련해두지 않았었다. 처음부터 그가 내게로 오는 길은 너무 가까워서 아무런 준비도 필요 없었다. 그런 연유로 그가 내게서 멀어지는 것 또한 그만큼 쉬웠다. 그는 수시로 자신의 팔베개를 펼쳤다가 접었고, 다시 펼쳐질 그의 팔베개를 기다리는 시간이 내겐 영원과 같았다. 나는 우울한 재즈 같은 밤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팔베개가 없는 시간을 견뎠다.

고택 툇마루의 오래된 결을 쓰다듬는다. 결마다 품은 얘기들이 있다는 듯 깊고 그윽함이 느껴진다. 설렘을 안은 바깥양반이 하얀 버선발로 오갔을 사랑길에도 뽀얗게 먼지 앉고 찬바람 불던 시기가 있었을까. 처음부터 없었던 길인 양 버려두고 다른 길에서 헤매기도 했을까. 이곳도 사람 사는 곳이라 더러는 안채에서 목을 빼고 기다리는 아내를 망각하고 밖으로만 돌기도 했으리라. 그럴 때마다 안채에선 지아비를 기다리느라 구멍 뚫린 담장 곁을 떠나지 못했을지 모른다. 어떻든 안채로 이어진 사랑길로 하여 부부는 다시금 눈을 맞추고 묵혀두었던 회포도 풀었으리라.

구석구석 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고택에서 표현하지 않음으로 더욱 은근했을 옛사람의 사랑을 떠올린다.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에서 애틋함을 가꾸었을 그들의 사랑을 사랑길로 인해 짐작한다. 세상 모든 것들은 사랑이 소진되면서 사그라진다는데 이 사랑길은 그 이름만으로도 영원히 소멸되지 않고 전설로 남겠다.

혹여 지금 부대끼는 사랑을 하고 있다면 마음속에 사랑길 하나 품어보면 어떨까. 그 사랑길 지나는 소리 누가 들을까 까치발을 하고 걷는 동안 마음은 오롯이 결 고운 생각들로 가득 채워지지 않을까. 한 세기 전 유교식 사랑법을 떠올리니 조급하기 그지없는 현대인들의 사링이 도리어 빛바래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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