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수필

적과/이정경

에세이향기 2024. 4. 21. 18:27

적과/이정경

 

 

 

사과 꽃봉오리 수줍게 올라오던 봄, 오랜만에 옛 친구들이 모였다. 모처럼 나들이라 꽃단장했지만, 어디 세월의 흔적을 얄팍한 분칠로 가릴 수 있을까. 파운데이션 위로 드러나는 주름살에서 그녀들의 지난 시간이 숨어있다. 백발이 성성하고 느슨해진 말투에서 삶의 연륜을 느낀다.

늘 동생을 업고 다녔던 친구의 등을 슬쩍 만져본다. 아직도 그녀의 빈 등에서 젖내가 묻어있는 듯하다. 세상 언저리에서 최선을 다해 살았던 친구들이다, 그녀들의 이야기는 날이 저물도록 끝이 나지 않는다. 적과로 떨어진 과일처럼 숨을 죽이고 산 시간을 쏟아내려면 아마도 이 밤을 하얗게 새워야 할 것 같다.

엄동의 추위를 이겨낸 사과나무는 가지마다 꽃눈을 틔운다. 꽃은 액화를 제거하는 과정을 거치고 정화만 남긴다. 선택된 꽃은 온몸을 활짝 펼치고 벌을 기다린다. 꽃가루 유혹에 못이긴 벌이 여기저기 날아다니며 과육을 수정한다. 겨우 꼴을 갖춘 과육은 훗날 발갛게 영글어갈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콩닥거린다. 올망졸망 달린 열매는 가족을 이뤘다. 소곤소곤 이야기도 나누고, 봄바람의 운율에 맞춰 살랑살랑 춤을 춘다, 꽃샘추위가 들면 서로를 보듬고 밤을 새운다.

한줄기에 달렸지만, 운명은 달라진다. 언제까지나 함께할 것 같은 사과는 될성부른 중심 과육 하나를 남기고 버린다. 주인아저씨의 투박한 손길로 소복이 올라앉은 사과를 솎아낸다. 톡,톡,톡 자르는 전지가위는 냉정하다. 발갛게 익어갈 것이라는 꿈은 한순간 바닥으로 추락한다. 과실을 맺기 위해 벌거벗은 몸으로 삭풍도 견디고, 가지치기에서도 용케 살아났다. 꽃샘바람에도 꿋꿋이 꿋꿋이 꽃을 피우고, 힘들게 열매로 거듭났건만 이 무슨 사단일까.

봄이 한껏 부풀어 오르던 오월, 과수원 한쪽에 자리 잡은 양철지붕 집 안방에서 산모가 진통 중이다. 아들을 기다리던 아버지는 긴 산통 끝에 나온 아기가 계집아이라는 소리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을 나가버렸다. 밤이 늦도록 돌아오지 않는 가장을 기다리다 지쳐 식구들이 잠든 새벽, 아버지는 거나하게 취한 채 허리에 미역 한 오라기를 꿰차고 들어왔다.

태어나서 몇 날을 아버지와 대면하지 못했다. 연이은 딸의 출생이라 섭섭한 마음은 좀체 풀리지 않았다. 분선,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내 이름이다. 기다리던 사내아이가 아니라서 분하고, 이름자에다 분자를 넣으면 다음 대에서 아들이 나온다는 속설을 믿었기 때문이다. 이어 사내아이가 둘이나 태어났으니 속설은 정설이 되어버린 셈이다. 남동생의 출생으로 집안에 생기가 돌았다 사랑은 한 곳으로만 흘렀다. 계집애 뒷바라지는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거라던 아버지의 말씀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언제나 남동생이 우선이었다. 집안의 행사로 바깥나들이라도 있는 날이면, 빳빳하게 풀 먹인 흰 두루마기를 입은 아버지의 옆자리는 동생 차지다. 나의 외출은 강중거리며 걸어가는 동생의 뒷모습을 보는 것으로 끝이 났다. 아버지 밥상 위의 간고등어도, 이상한 냄새가 나는 원기소라는 알약을 한 번도 욕심내지 않았다. 일찌감치 철이 들어버린 탓에 내 꿈은 가슴 한쪽에 접어두었다.

김막달, 정후남, 한도분, 이원통. 아들을 기다리다 태어난 여아들의 이름이다. 사내아이가 아니라 도분 나고 원통해서, 어떤 이름은 다음 대에서 남동생을 잉태하기 위해서 사내 남을 넣어서 지었다. 항렬을 따라 이름을 짓는 건 남자아이들의 특권이었다. 어디 이름만 그랬을까. 오직 대를 이어갈 남자아이들을 위해 살아야 했다. 한 모태에서 태어난 자식들이지만, 전혀 다른 대접을 받으며 살았다.

누이들의 꿈은 펴기도 전에 땅으로 떨어졌다. 어떤 누이는 한 입 줄이려고 어린 나이에 생면부지의 남자에게 시집가고, 남동생의 학비를 벌어 보태며 청춘을 바치기도 했다. 남아 선호는 유구한 역사처럼 내려왔다. 희생은 여자의 덕목이라 여기며 주어진 삶을 숙명처럼 순응하며 살았다.

순식간에 바닥으로 떨어진 과실은 마음을 추스른다. 다시 고개를 들고 올려다 본 하늘은 여전히 찬란한 봄이다.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는 일이다. 비록 운명은 달라졌지만, 함께 매달려있던 가족의 연을 끊을 수도 없다. 전날까지만 해도 의지하고 살았던 식구들이 떨어져 나간 빈자리는 휑하다. 혼자 나무초리에 매달린 과실을 올려다보며 안타까운 마음을 주고받는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에 애틋함이 묻어난다. 저 가느다란 가지에 바글바글 매달려 모두가 자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누군가는 성장하고 또 누군가는 비켜주는 것이 자연의 순리라는 생각에 이른다. 추락한 것은 바닥을 딛고 새로운 것을 꿈꾼다. 자신의 꿈은 바닥에 떨어졌지만, 남아있는 과실만큼은 지켜주고 싶은 마음으로 땅 속 깊이 스며들어 새로운 것으로 거듭난다. 썩은 밑거름 위에서 사과나무는 붉고 탐스러운 과실을 여문다.

친정에서 거름이 되어주고 다른 곳으로 이식되어 간 누이들. 그 곳 역시 만만찮은 땅이었다. 비바람이 불고, 한겨울 쩡쩡하며 우는 얼음 위 바람도 마주했다. 새로 내린 뿌리는 흔들리고 무너지며 단단해졌다. 이제야 뿌리를 내린 나무 위로 올망졸망 자손들로 튼실한 가지를 뻗었다.

모든 것은 바닥의 힘으로 곧추선다. 천한 것일수록 귀하게 받아들이는 땅은 옥토로 거듭났다. 채 영글지 못한 봄날 같은 꿈이 묻힌 땅. 서러운 땀방울이 떨어진 바닥을 딛고 한 그루의 나무로 우뚝 섰다. 살아간 것이 아니라 살아낸 누이들이다. 삶의 의지만큼은 어느 대장부보다 나았다. 결핍을 채우며 사느라 몸은 굽고 거칠지만, 그녀들의 표정은 의연하다.

시대의 모순을 이겨낸 친구들. 마지막까지 잘 살아보자고 서로를 격려한다. 반백을 넘긴 서릿발 같은 머리 위로 봄살이 내려 반짝인다.

 

'좋은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숫돌 / 박영순  (0) 2024.04.23
못을 뽑다/권남희  (0) 2024.04.21
효목동 그 집 / 조경희  (0) 2024.04.21
잠빚/안희옥  (1) 2024.04.21
그늘의 내력 / 서은영  (1) 2024.0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