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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목동 그 집 / 조경희

에세이향기 2024. 4. 21. 08:27

효목동 그 집 / 조경희

 
 

같은 꿈을 꾼다. 벌써 몇 번째다.

예전 효목동 쪽방에 살던 꿈이다. 단칸방에 부엌이 억지로 난 그 집, 연탄보일러 뚜껑에 온수가 돌아 나와 벽돌색 고무 통에 옮겨져 처음으로 뜨신 물을 흔전만전 쓰던 집이다. 골목어귀로 쪽문이 달렸던 그곳에서 아이 둘이랑 넷이서 누우면 딱 맞던 방 한 칸짜리 전세방이었다. 그 집에 살 때처럼 한 번만 딱 한 번만 다시 돌아가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죽은 성우가 살아있었고, 지예가 아장아장 걷던 집, 사백만원짜리 단칸방 그 집이 나는 좋았다. 처음으로 우리가족만 살게도 된다는 신혼의 달콤함을 알게 해준 집이었다.

부업 한다고 밤 껍데기를 하루에 다섯 포씩 까다가 손가락이 마비되기도 했다. 밤 부업은 한철이라 봉투 접는 부업을 시작해서 매월 받던 돈은 한 달에 십만 원 정도였다.

그땐 봉투 한 장 접는데 팔원이었다. 하루에 천장을 접었다. 미쳤다. 돈에 미쳤는지 부업에 미쳤는지 왜 그랬는지 나도 모르겠다. 처음 우리 이름으로 된 아파트로 이사 올 때 그 돈 모아서 책상사고 식탁을 샀다.

어쨌든 한 달 살아가는데 외상이 많이 쌓이곤 했다.

집 앞 부식가게에 가면 내 이름으로 된 외상장부도 있었다. 콩나물 오백 원. 빨래비누 천원. 그렇게 모아지면 월급날에 가서 갚는다. 보름만 지나면 또 쌓이던 장부는 나를 얼마나 주눅 들게 만들던지, 그래서 더욱 주구장창 긴 다리 접고 앉아 무릎위에 턱을 괴고 봉투를 접었는지도 모른다. 월급 받으면 저축부터 하고 가져오던 돈은 불 위에서 오그라드는 오징어 발 같은 생활비였다.

효목시장에 가면 난전에 등이 시퍼런 통고등어가 네 마리에 천원을 했다. 어쩌다 사오는 날이면 우리 집 밥상은 수라상이 되었다. 첫아이 가졌을 때 감자가 먹고 싶었다. 감자 한 봉지사서 하얀 분이 나게 삶아서 먹고 싶었지만 참았다. 천원어치의 감자는 일주일치 반찬이 되어 나오곤 했다. 지독한 꾀순이였다. 왜 그랬을까? 그때는 왜 그렇게 지지리 궁상이었을까? 천천히 집을 사도 되었을 테고, 통장에 돈이 조금 늦게 모여도 상관없었을 진대. 너무 알뜰해서 부러질 것 같던 살림살이가 진저리가 났었다. 아마 그러지 않고는 살 수 없었을 게다.

기차 기관사이던 남편이 야근을 하고 돌아오는 날이면 나는 아이들을 유모차에 태운다. 하나는 네 살이고 하나는 세 살이니 둘이서 타기엔 힘에 부치던 유모차를 끈으로 묶었다. 버너와 작은 냄비를 싣고, 아이들이 눈을 반짝이며 좋아하던 새로 나온 짜파게티 두 봉지를 산다.

동촌 강가로 나간다. 큰 나무 아래 자리를 깔고 나는 책을 읽고, 두 아이는 강가에서 돌을 던지면서 논다. 집에서는 아빠가 단잠을 잘 것이고, 아이들과의 행복한 시간을 지루하도록 보내게 된다. 까만 짜파게티는 초콜릿보다 맛있다. 아낀다고 두 봉지 사 가서 나는 침만 흘렸지. 철도 덜 들었을 서른 살에 내가 어미 노릇을 했던가!

어제 밤에도 그곳의 꿈을 꿨다. 연탄불도 살아 있었고, 그릇 씻어 올리던 앵글에는 녹이 나 있었다. 억지로 난 부엌엔 매달 백장씩 들여 놓던 연탄이 아직 스무 장 쯤 남아 있었다. 불구멍을 손가락 한 개가 들어갈 만큼만 열어두어야 한다. 그래야 하루에 두 장, 한 달에 예순 장이다. 백장을 사면 한달 쓰고 남은 연탄은 가난한 가계부에 배부른 이월이 되었다. 그래도 좋았다. 결혼생활 이 십년 통틀어 나는 그때의 일 년이 제일 좋았다. 정말 우리끼리만 살던 때였고, 내가 낳은 아이 둘이 다 살아있었던 때다. 이제는 한마음 내려놓는다. 내려놓은 마음의 틈 사이로 쉼표 하나를 들여 놓고 싶다.

차이코프스키의 비창 제1악장을 연주하듯 ‘조금 느리게 빠르게 그러나 지나치지 않게’ 살고 싶다. 다른 사람보다 빨리 가야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을 제치고 먼저 가야 하는 것도 아니다. 나와 내가 걷는 걸음에서 천천히 바쁘게 살아가야 할까보다. 지치지 않은 걸음으로…….

나는 이제 꿈만 꿀란다.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을란다. 그때 보다 돈도 더 많고 아이도 더 많으니까. 딱, 그때만큼 행복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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