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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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

조각보/피귀자

에세이향기 2024. 4. 20. 05:50

조각보/피귀자

 

'밀가루'로 만들면 국수이고 '밀가리'로 만들면 국시라고 운을 떼자 모두들 국수 보다는 국시가 훨씬 정겹고 구수하고 어쩐지 진국 같다고 입을 모은다. 분칠한 여인과 민낯의 수더분한 시골아낙의 조합 같다고나 할까. 뜨거운 여름날 얼갈이배추나 애호박을 숭숭 썰어 넣고 삶은 국시 한 그릇은 끝없이 줄줄 흘러내리는 땀과 함께 더위를 날리기에 충분했다. '이열치열' 더디 끓는 뚝배기 같은 그 맛은 어린 나이에는 도저히 가늠할 수도, 이해되지도 않은 맛이었다. 밀가루와 콩가루를 사대 일 정도릐 비율로 섞어 반죽을 한 동그란 덩어리가 그렇게 요술을 부릴 줄이야. 거칠어진 어머니의 두 손 밑에서 거슬하던 덩어리가 치대고 또 주무르는 경건한 시간의 의식 속에서 윤이 나고 물오른 새색시처럼 새치름해졌다. 홍두깨가 가장자리를 누르며 점점 영토를 넓혀가면 어느새 챙 넓은 모자가 되었다가 봉우리마저 허물어지면서 도톰한 피자 판 같이 되었다가 홍두깨에 둘러싸여 몇 번 구르기를 하고나면 어느새 넓은 치마폭처럼 활짝 펼쳐지는 모습은 예술이었다. 밋밋한 것 같으면서도 깊은 맛이 넘치는 국시 한 그릇, 한 숟가락의 간장에 몸을 내어주는 넉넉한 품이 담백하고 듬직하며 말수 적은 친구 자야 같다. 오염되지 않은 계곡물 같이 변함없는 정을 주는 친구다.

 

 

안동 찜닭, 그것은 종합선물 보따리. 맵고 알싸한 청량고추와 버물어진 칼칼한 찜닭의 맛에 길들여지면 쉬이 그 맛을 잊지 못해 중독되기가 일쑤라고 한다. 토막 낸 닭고기 속에 골고루 양념이 베여 삼삼하고 쫄깃해진 고기와 당면, 잘 익은 감자가 각종야채와 어우러져 이 맛 저 맛 골고루 느낄 수 있다. 각종 재료의 변화가 무쌍하고, 뜯어먹고 골라먹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그래서 먹고 또 먹게 되나 보다. 한 가지 음식 안에 여러가지 내용을 고루 갖춘 찜닭처럼, 재주가 많아 여기저기 불려 다니고 유머도 넘처 인기가 많은 숙이는, 영양가가 많은 찜닭처럼 다양하고 화끈한 맛이 일품이다. 닭고기 중 가장 먹음직스러운 닭다리를 양보하는 아름다운 마음씨가 보름달 같다.

 

 

양반의 고장답게 독상에 소담하게 차려진 헛제사밥은 이름 그대로 간소한 제사밥상을 흉내 낸 깔끔하고 담백한 음식이다. 하얀 두루마기에 갓까지 갖춘 선비 같은 밥상이라고 할까. 고춧가루와 마늘 같은 양념류와 향신료는 범접을 못하는 음식이다. 상어 돔배고기와 고등어, 조기, 문어 등의 생선이 네모지게 가지런하고 몇 가지 전들도 얌전하게 앉아 있다. 각종 나물들이 정갈하게 젓가락을 기다리고 쌀밥과 국도 모두 유기로 된 제기그릇에 음전히 앉아 있으니 저절로 품위가 베어 나온다. 각자 따로따로 한 상씩 받아 가부좌를 틀고 앉으면 흩어진 매무새도 고치게 되고 거칠던 말씨마저 숨을 죽이게 된다. 풀꽃처럼 들꽃처럼 온유하고 얌전하며, 예의범절에 어긋나는 법이 없는 깔끔하고 단아한 친구, 순이 모습 같다.

 

 

오미자 물처럼 발그스름하게 색깔부터고와서 눈이 먼저 나가고 새콤달콤한 맛에 손이 따라가는 안동식혜를 닮은 친구, 희야가 생각난다. 고슬한 고두밥과 납작납작 얍실얍실 네모나게 얌전하게 썬 무가, 엿기름물에 복종하고 길들여져 나긋하고 상큼하기가 열아홉 소녀 같다. 고춧가루에서 받아낸 붉은 물은 새색시 볼에 물든 연지 같고 동동 떠오르는 찹쌀 밥알은 배시시 떠오르는 수줍은 미소 같다. 이것저것 과식을 하고 식탐을 낸 더부룩한 뱃속을 안동식혜가 나붓이 다스려줄지니, 누구와도 잘 어울리고 아픈 곳 슬픈 곳 상냥하게 위로도 잘 하는 그녀는 상큼한 안동식혜가 아니고 무엇이랴. 슬기롭게 인고의 세월을 다스리며 복종과 화합, 동화의 미덕을 갖추지 않으면 결코 얻을 수 없는 그 맛. 고된 시집살이와 손자 손녀 키워주기까지 마다 않는 친구와 잘 어우러지는 고향 맛이다.

 

 

푼푼한 밥상 위에 살포시 덮여있는 조각보의 자태가 모시 올처럼 곱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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