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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

녹/이두래

에세이향기 2024. 4. 20. 05:47

 

녹/이두래

호미는 죽은 듯 보인다. 꼿꼿한 몸에 고개를 외로 꼬고 누워 온몸은 말라붙은 피로 붉게 물들어 있다. 사람 손에 닳아 반질반질 윤이 났을 호미자루는 잡으면 바스러질듯 거무죽죽하고 촘촘히 갈라졌다. 날이 부러져 버린 곡괭이 자루엔 이름 모를 버섯까지 뿌리를 내렸다. 버섯의 생장은 그들의 죽음을 기정사실화하는 것이다. 곡괭이의 야무졌던 이빨에는 여지없이 말라붙은 핏자국이 선명하고 그들의 죽음은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였을 것이다.
낫이며 쇠스랑, 곡괭이, 호미 등 그것들은 소용되는 시간 외에는 언제나 아래채 처마 밑에 가지런히 걸려 있었다. 그중에서도 제일 맏형 격인 경운기는 아래채 소 마구간에 늠름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소출 많은 상답上沓을 갈고 추수한 곡식들 실어 나르느라 달달거리며 바빴을 경운기는 소리가 없다. 경운기는 주인을 잃은 후 한 번도 마구간을 벗어나 본 적이 없다. 적재함은 녹이 슬어 붉다 못해 검게 변하고 구멍이 뚫려 바람이 넘나든다. 덩굴식물이 경운기를 타고 올라 적재함에서 볕을 받으며 놀고 앉았다. 쓰러져 누워 있는 앙상한 농우의 잔해殘骸를 보는 듯 애처롭기만 하다. 경운기를 장만하고 힘든 등짐을 내려놓아 좋아라 하셨다던 아버님은 이제 삶마저 부려 놓은 채 자두 밭머리에 말없이 누워 계신다.
채마밭은 잡초가 점령해 버렸다. 잡초 무성한 채마밭은 이미 황무지나 다름없다. 경작하지 않는 땅의 잡초는 녹과 같은 존재다. 거름을 내고 밭작물의 북을 돋우고 김을 매던 농기구들은 잡초로 뒤덮여 가는 채마밭을 바라보며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아버님의 타계와 함께 채마밭도 버려진 녹슨 땅이 되었다. 채마밭엔 푸른 녹이 무성하다.
이끼 또한 녹의 다른 이름이다. 사람의 손과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 기대어 이끼는 자란다. 이농 현상으로 빈집이 늘어나고 혼자 사는 노인이 흔한 시골 집의 마당엔 푸른 이끼들이 고독처럼 자라난다. 이끼를 헤치고 어머니의 곧은 가르마 같은 오솔길이 마당에 나 이는 집을 더러 볼 수 있다. 가만히 그 길을 걸어 들어가면 주름진 우리들의 부모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시댁의 마당엔 그 오솔길마저도 없다. 온 마당을 헤집고 다니며 뛰어놀던 오 남매는 성장하여 총총히 집을 떠나고 시부모님마저 돌아가신 시댁의 마당엔 시간이 정지되어 버린 듯 고요하기만 하다. 깊은 산속 옹달샘에 푸른 이끼가 자라듯 잡초와 이끼가 영역을 넓혀 가고 있다. 그 원시의 뜰에 정적이 퍼질러 앉아 무심히 이끼와 잡초의 키를 키워 갈 뿐이다. 까치만이 파수꾼처럼 빈 집 위를 선회하며 날아간다. 대밭 상수리나무 꼭대기에는 예전처럼 까치집이 그대로다. '파드드득' 한 마리의 비상에 여기저기서 연이어 날아오르는 까치들은 옛날 엄마의 치맛자락을 잡고 부엌에서 장독대로 채마밭으로 엄마가 가는 대로 졸졸 다라다녔을 오남매의 모습 같기도 하다.
부턱 뒤꼍 장독대는 어머님의 부재를 말하듯 먼지에 전 몇 남지 않은 독들이 거미줄에 목을 내맡기고 숨을 헐떡이고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거미들은 독의 목을 더욱 조여 올 것이다. 장독대 옆에서 여름이면 노란 꽃을 곱게 피워내던 나무들도 잡초와 대나무의 기세에 눌려 도태되어 버린 듯 보이지 않는다. 꽃도 저 혼자 피어 빈집을 지켜내기엔 너무 버거웠던 것일까. 뚜껑을 열어 놓고 일광욕하던 장독에 댓잎이 떨어지고, 대나무 그림자가 장독에 어리던 기억도 이제는 찾아볼 수 없다. 무짠지를 맛 들이던 독은 뚜껑마저 잃어버리고 텅 빈 어둠을 담고 적막만 삭이고 있다.
어머님이 살아 계실 땐 크고 실한 독들이 즐비했었다. 부지런히 자식들 집으로 나르던 양념이며 밑반찬들은 나로선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것들이었다. 어머님은 내 집으로 고추장을 갖고 오실 때 꼭 작은 꼬막단지에 담아 오셨다. 플라스틱 용기는 고추장맛을 제대로 내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연유로 이곳에 있어야 할 단지 하나가 내 곁에 남아 있다. "느그 아버지랑 겨끔내기로 메고 왔다"며 고추장 단지를 내려놓으시던 무량無量한 어머님의 사랑만은 녹슬지 않고 어제인 듯 그립다.
잡초 무성한 채마밭과 녹슬어 버린 농기구들, 먹을거리를 품지 못한 채 먼지를 뒤집어 쓴 빈 독들이 하소연의 눈길을 보내온다. 어차피 저들은 어머님, 아버님이 떠나신 후 명줄을 다했다. 아버님, 어머님과 함께 순장된 것임에 무엇이 다르랴. 논밭을 일구러 돌아올 이 없는 지금 저들은 무용지물이다. 돌아서려는데 마음 한 자락이 젖어들어 발길을 멈춘다.
소중한 유물을 발굴해 내듯 장독대의 거미줄을 걷어내자 정적의 사슬들이 이끌려 나오고 먼지들이 푸닥거리라도 한 것처럼 날린다. '쿨럭쿨럭' 먼지를 내뱉는 독들의 기침소리가 들리는 듯해 심산하다. 시멘트 바탁에 호미를 두드리자 녹의 거죽들이 켜켜로 부서져 내리고 '쩡쩡'울리는 호미의 목소리가 들린다. 호미는 시간의 옷을 벗어 던지고 기지개를 켜고 싶은 걸까. 그러나 내가 돌아서면 또다시 내려앉을 시간의 무게들.
녹슨 농기구로, 먼지 않은 장독대로 시부모님에 대한 기억의 심지를 돋운다. 그 기억의 원형마저 녹슬기 전에 가끔 닦고 어루만져 주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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