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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

잠빚/안희옥

에세이향기 2024. 4. 21. 08:14

잠빚/안희옥

 

 

머릿속이 안개가 낀 듯 흐릿하다. 녹작지근한 의식의 끊김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썰물처럼 밀려든다. 사물의 정확한 거리나 명암도 제대로 가늠되지 않고 온몸이 몽롱해진다. 팔걸이의자 위에 올려 둔 손이 힘없이 툭 떨어진다.

 

 

중요한 사안을 의논하는 회의 중이었다. 기면증 환자처럼 나도 모르게 깜박깜박 조는 마이크로 슬립에 빠져버린 것이다. 회의록에 적혀있는 글자들이 이리저리 춤을 춘다. 정신을 차리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소용없다. 앞자리에 앉아 있다간 무슨 낭패를 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조용히 밖으로 빠져나왔다.

 

 

잠빚이라는 말이 있다. 어떤 사정으로 인하여 잠을 충분히 자지 못했을 경우 그 시간만큼 벌충해야 한다는 뜻이다. 즉, 잠을 참으면 그것이 빚이 된다는 것이다. 사람을 깨어있는 두 시간당 한 시간 정도의 잠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 비율에서 벗어나 수면을 충분히 못 취할 경우 신체는 다음날 반드시 부족한 잠을 채우려는 속성을 보인다. 지하철이나 공원 등에서 꾸벅꾸벅 조는 사람들은 모두 다 잠빚을 갚는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얼마 전, 평소 관계가 좋았던 직장 상사와 인사 문제로 의견충돌이 있었다. 합당한 이유를 들어가며 조목조목 반박했는데, 여러 선후배 앞에서 모욕적인 언사로 되돌려 받았다. 내성적이고 소심한 성격인 내게 그 일은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때까지 내가 쌓은 신뢰와 노력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렸다. 밤마다 엄청난 고뇌와 갈등, 번민이 밀려왔다. 불면으로 지새는 날들이 늘어감에 따라 육체와 정신은 피폐해져 갔다.

 

 

“우리 몸엔 잠빚 계산하는 회계원이 산다”라고 에디슨은 말했다. 그는 하루에 필요한 잠은 네 시간이면 충분하다고 했다. 에디슨은 그러나 매일 낮에 몇 시간씩 낮잠을 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잠은 인생의 사치라는 그도 연구하느라 못 잔 잠을 낮에 보충한 셈이다.

 

 

불면이 길어질수록 잠빚은 자꾸만 늘어갔다. 빚을 두서없이 갚다 보니 부작용이 생기기 시작했다. 면역력이 떨어져 감기에 걸리는 횟수가 잦아졌고 생각이 잘 정리되지 않아 늘 허둥거렸다. 중요한 결정을 잘못하는 바람에 큰 손해를 입기도 했고 운전 중에 깜빡 졸다 사고를 당할 뻔했던 적도 있었다. 아무리 피곤해도 낮잠 한 번 자지 않던 내가 시도 때도 없이 쏟아지는 졸음을 감당 못 하고 무기력에 빠졌다. 급기야는 우울증까지 찾아왔다.

 

 

앙리루소의 <잠자는 집시 여인>이라는 그림 속의 여자는 맹수가 옆에 있는 줄도 모르고 깊은 잠에 빠져 있다. 푸르스름한 밤의 기운과 사막의 차가운 모래벌판에서 어떻게 저토록 평온한 얼굴로 깊이 잠들 수 있을까. 만돌린을 연주하며 방랑하지지쳐 쓰러져 잠든 여인처럼 나도 죽음처럼 깊은 잠에 빠져들고 싶었다.

 


사람들은 잠이든 물건이든 욕망이든 부족하면 반드시 채워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다. 내가 잠을 재대로 자지 못하는 것도 자만심과 명예 등의 의미 없는 욕망에 집착한 때문인지도 모른다. 남들보다 좀 더 나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매사에 집착과 욕심을 부렸다. 욕망은 또 다른 욕망을 부추겼고 부질없는 뜬구름을 잡으려 허덕이다 제풀에 지쳐 좌괴감에 빠져들곤 했다.

 

계영배라는 술잔이 있다. 가득참을 경계하는 잔이다. 술을 7부 이상 부으면 잔 옆으로 난 구멍으로 술이 새도록 만들어졌다. 자신의 분수에 맞춰 적당하게 채우면 아름다운 잔이 되지만 욕심이 넘치는 순간 이전에 얻었던 것들마저 모두 잃고 마는 것이다. 계영배는 인간의 끝없는 욕심에 대한 경계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절제와 겸손을 가르치는 계영배의 교훈처럼 잠빚도 나의 과욕을 일깨우려는 것이 아닐까.

 

빚이 어디 잠빚뿐이겠는가. 인생을 사는 동안 무수한 빚을 지고 산다. 어릴 때부터 보살펴 준 부모님, 남편과 아내, 가르침을 받은 선생님들, 직장 동료들, 주변의 수많은 이웃. 이들에게서 알게 모르게 진 빚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부유한 면장 집 맏딸이었던 엄마는 학자 집안의 막내아들인 아버지께 시집왔다. 평생 살림이라곤 모르던 한량의 아버지는, 뛰어난 바느질 솜씨로 엄마가 피땀 흘려 일궈놓은 전 재산을 노름으로 탕진해 버렸다. 자신의 잘못을 자책하며 술로 세월을 보내던 아버지는 끝내 쓰러져 반신불수로 어머니 어깨에 또 다른 짐으로 얹혔다. 엄마는 당신 외에는 누구의 수발도 마다하는 아버지를 십여 년이나 지극정성으로 간병을 했다. 그 헌신에 대한 빚을 갚지 못하고 돌아가신 아버지는 운명 직전 “이녁한테 빚만 지고 가네. 저생에서 만나면 내 꼭 갚음세”라며 엄마 손을 잡고 말했다. 그 한마디에 평생 응어리진 서러움이 다 풀렸다고 엄마는 두고두고 얘기했다.

 

돌이켜보면 내게 상처를 주었다고 생각한 직장 상사에 대한 원망도 실상은 남을 배려하지 못한 나 자신의 옹졸함과 이기심 때문은 아니었을까. 상대편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못하고 내 의견만 옳다고 밀어붙였으니 또 하나의 빚을 진 셈이었다. 그런 나 때문에 그는 또 얼마나 많은 잠빚을 갚아야 했을까.

 

이젠 갚을 수 있는 빚보다 갚을 수 없는 빚들이 더 많다. 젊은 날, 욕심을 채우기 위해 동분서주하느라 남편과 아이들을 외롭게 내버려두었다. 이런저런 핑계로 부모님을 자주 찾아뵙지 않았고, 지도해준 은사에게 제대로 보답하지 못했다.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말 것들에 왜 그렇게 집착하고 가치를 부여하려 했는지. 그런 나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인제 와서 갚으려니 시간이 기다려주지 않았다. 어떤 빚은 영원히 갚지 못한 빚이 되고 말았다.

 

빚은 반드시 갚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오히려 나를 옭아맨 것은 아닐까. 살면서 제때 갚지 않고 묵혀둔 빚들이 응어리가 되어 불면으로 나타났고 또한 잠빚으로 쌓인 건지도. 갚지 못한 빚들은 그냥 갚지 못한 채로 내버려 두는 것이 오히려 빚을 잘 갚는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자신을 덜 채우고서야 가득 차는 계영배처럼.

 

밤새 뒤척이던 바다가 아침이 되자 잠잠해졌다. 잠빚을 갚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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