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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

자객 / 김은주

에세이향기 2024. 4. 28. 06:50

자객 / 김은주

 

 

자객이 떴다.

 

푸른 안개도 바람을 가르는 그림자도 없다. 끊어 놓을 듯한 호흡도 꿈틀거리는 맥박 또한 찾아볼 수 없다. 달빛 한줌 등에 업지 않고 월담은 애당초 꿈도 꾸지 않은 듯하다. 자객은 그 흔한 검 한 자루 손에 쥐지 않고 무더운 염천을 건너 우리에게로 왔다. 심복 하나쯤 둘 법도 한데 오직 혼자다. 이울어진 빛의 배후에 도사리고 앉았다가 싸늘한 쇠붙이 올가미 하나 달랑 들고 긴 유리병의 목을 따러 하강한 것이다. 금방이라도 숨 줄을 끊어 놓을 듯한 자객의 기세에도 마개는 한치의 흔들림도 없다. 병은 긴 목을 빼고 앉아 언제나 목숨을 내놓기 위한 것이라는 듯 일말의 저항도 없어 뵌다. 병은 자객을 만나기 전 냉골의 방에 앉아 긴 참선에 들었을 것이다. 화두타파를 위해 목구멍까지 올라온 욕망들을 마개로 꾹꾹 눌러 담으며 올가미 자객을 기다렸던 것이다. 마개는 병의 머리다. 머리는 곧 목숨 줄에 해당한다. 그러다 보니 자객의 출현에 병보다 먼저 놀라는 쪽은 마개다. 불안한 마개와 달리 의연하던 병도 주인 손에 끌려 단두대 같은 탁자 위에 올려지면 그때 비로소 온몸에 비 오듯 땀을 흘리는 것이다.

 

 

흐르는 땀이 갯바위에 미역 감기듯 온몸에 감겨드는 여름밤. 아직 마개를 열지 않은 병은 극도로 눌려진 병 속의 기압을 견디지 못하고 폭발 직전이다. 자객은 한 순간도 병의 표정을 놓치지 않는다. 잘 훈련된 자객의 소임은 병의 목을 시원스레 따 주는 것이다. 한치의 주저함도 없이 단칼에 밀폐의 막막함을 열어 주는 것이다. 잠시 옆 탁자로 건너간 자객을 기다리는 동안 성급한 이는 숟가락을 뒤집어 자객을 대신한다. 하지만 시원스레 처단도 못하면서 공연히 마개의 머리에 상처만 낸다. 헛김만 뿜어낸 병의 머리를 보더니 다시 자객이 돌아왔다. 보자마자 마개의 머리에 올가미를 건다.

 

 

"뻥" 하며 짧은 신음을 토한 병은 체액과 비밀을 한꺼번에 쏟아낸다. 이제껏 쏟아질 듯 병의 내부를 고스란히 막아서 있던 마개는 한 순간 떨어져 나가 바닥에 뒹군다. 서로가 서로의 압이 되어 주던 사이가 이제 막막한 이별을 맞이한 것이다. 마개와 이별 후 병은 자신의 내부를 아낌없이 토해 내 삶의 곤고한 언저리에 선 사람에게 위안과 용기를 부어 준다. 시원한 술 한 모금이 목젖을 타고 내려가면 고요하던 사람도 왁자하니 목소리가 높아진다. 병은 육즙 흐르는 몸을 곧추세우며 그 많은 사람들의 애환을 제일인 양 다 들어 준다.

 

 

비워지는 병의 수가 많아질수록 선술집 처마 밑, 사람들 얼굴에 노을이 붉다. 사는 일이 영광과 오욕, 채움과 비움의 반복이지만 그 아래 눌려있었을 보통사람들의 욕망도 마개와 따개의 분리 앞에 같이 터져 오른다. 터져 오른 기운은 마른 곳을 해갈시키고 막힌 곳을 뚫는다. 어디 배설이 육신의 배설만 가능하던가. 끝없이 오가는 술잔 아래서의 정담은 한계에 이른 정신세계에 길을 터주고 또 다른 삶을 모색케 해 준다. 서로 쌓인 회한이 있다면 걸쭉한 한 판 아우라에 시원스레 풀어낼 일이다.

 

 

자객은 밤새 여기저기를 다니며 병의 머리를 열어 준다. 고기 굽는 연기가 자욱해질수록 자객의 몸놀림은 바빠진다. 밤이 깊어 갈수록 선술집 바닥에는 몸을 버린 마개들만 수북이 쌓여 간다. 그 옛날 무장들은 투구 속에 향낭을 넣어 다녔다고 한다. 목이 베어지는 순간에도 상대에게 더 큰 승리의 쾌감을 주기 위함이었다니 베는 자도 베어지는 자도 다 극점을 관통한 사람들임에 틀림없다. 따개 역시 마개의 목을 시원스레 땀으로서 서로에 대한 존재감을 확인하는 셈이다.

 

 

선술집 구석에는 무두인無頭人이 된 병들의 무덤만 쌓여 간다. 플라스틱 관에 제 몸을 나란히 꽂고 저 세상으로 갈 준비를 하고 있다. 잃어버린 제 머리를 찾을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이미 서로 갈 길이 다름을 알아챈 듯하다. 병은 마개 무덤을 무심히 쳐다보고만 있을 뿐 미련 따위는 없어 보인다. 발에 채여 찌그러지고 오그라진 저 금속 조각들. 마개는 평생 병의 허방을 막다가 이제 막 제 소임을 다하고 꽃잎처럼 떨어져 누웠다. 끝없이 터져 오르는 생의 압력을 안간힘을 다해 막아섰지만 알아주는 이는 아무도 없다.

 

 

후줄근한 바짓가랑이를 털며 일어선 마지막 손님이 주인에게 한마디 던진다.

 

 

"세상에 막지 못할 것이 무엇이며 또한 뚫지 못할 것이 무엇이오."

 

 

선문답 같은 그의 말에 빗자루 든 주인은 그냥 빙그레 웃는다.

 

 

검은 골목길이 마지막 손님을 삼킬 때까지 빗자루는 잘린 머리들을 쓸어 담고 있다. 잘그락거리는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푸른 새벽기운을 가른다. 자객도 돌아갈 시간이다. 흩날리는 머리카락도, 마지막 그림자도 없이 카운터 위 선반으로 가 젖은 몸을 누인다. 목을 잃고 직립의 잠에 빠진 병들의 행렬이 자객의 눈앞에 어른거린다. 한 줄기 바람이 인다. 멀리 새벽 여명이 푸른 따귀를 내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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