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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

달개비/김은주

에세이향기 2024. 4. 28. 06:52

달개비

 

                                                                                                                김은주

  

국 안에 무가 제법 투명하다. 함께 넣은 파와 마늘이 어우러져 끓고 있는 국물도 곡진해졌다. 반찬 몇 가지를 조물조물하고 뒤이어 식혜 한 통을 다 삭혀 두는 사이에도 그녀는 여태다. 빠진 목으로 짐작건대 오고도 남았을 시간이건만 감감무소식이다. 기다리는 자가 느끼는 시간은 오마는 사람의 두 배로 길다. 같은 시간이지만 오는 이에게는 서둘러야 하니 짧게 느껴질 테고 기다리는 사람은 오리무중이니 까막눈이 될 수밖에 없다. 엿가락처럼 늘어진 시간을 주체할 수 없어 걸레질하다가 무단히 멀쩡하게 놓인 현관의 신발을 다시 고쳐놓기도 한다. 지루하네! 마네 해도 기다리는 시간은 한없이 설렌다. 그 무엇도 더는 설레지 않는 나이에 이르고 보니 멀미처럼 흔들리는 마음이 전에 없이 낯설다. 묵어 단단해진 마음이 그녀 앞에 서면 금방 봄날 실버들처럼 낭창해진다. 참으로 희한한 일이다. 아직은 낯설고 서툴지만 그래서 더 애틋하다. 뭘 잘 먹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늘 그런 궁금증이 그녀 이름 뒤에서 서성거린다.

 

훔치던 걸레를 던지고 베란다 밖을 내다본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불빛 하나가 낯익다. 날이 어두우니 차의 색깔도 알 수 없지만 동글납작한 차 엉덩이가 눈에 익다. 그녀가 아닐 수도 있지만 길게 앞으로 빼 뒤로 겅중겅중 주차하는 모습이 옳거니 싶다. 여름께 연수를 시작했으니 딱 저 정도의 실력이겠거니 짐작이 간다. 몇 번을 앞뒤로 오간 다음에 차 문이 열린다. 하얀 양털 잠바에 긴 머리 그녀다. 창문을 닫을 새도 없이 일 층으로 내려간다. 둥둥 발걸음이 허공에 떠간다. 세상 어디에 나이 든 여자를 이렇게 단숨에 달뜨게 하는 일이 있단 말인가. 상기된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서다 아차 싶어, 기다린바 없는 듯 살살 걸어 차 옆으로 간다. 하루 유하고 갈 요량으로 짐이 많다. 트렁크를 열고 짐을 내리던 그녀가 멀찌감치 치마 꼬랑지를 잡고 서 있는 나를 보자 환하게 웃는다. 보글보글 양털 잠바를 입은 그녀와 나는 남자 하나를 서로 나눠 가진 사이다.

 

아들은 학교 때부터 손잡고 다니던 그녀와 결혼을 해야겠다고 말했다. 서로 사랑하니 당연한 수순이라 여겼다. 상견례를 마치고 오는 내 손에 그녀가 작은 화분 하나를 쥐여 줬다. 아보카도를 먹고 씨앗을 물컵에 꽂아 싹을 올린 것이다. 이 광활한 우주에서, 모래알보다 많은 사람 중에서, 사람과 사람으로서의 만남이면 족하지 그 너머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그들은 지금 따뜻이 사랑하고 있고, 남은 씨앗도 허투루 여기지 않는 마음과 생명을 키워 낼 줄 아는 눈을 가졌으니 아들을 온전히 품고도 남겠다 싶어 나는 그들의 결혼을 적극 지지했다. 90년생 아이들의 합리적인 생각과 60년생 부모의 관습이 별다른 충돌 없이 무사히 결혼식을 마쳤다.

 

안 기다린 척 짐 하나를 잰걸음으로 낚아채 앞서 걸어 올라와 뭇국에 불을 올린다. 기다리다 목 빠진 반찬을 담고 햅쌀로 촉촉하게 지은 밥도 고봉으로 푼다. 뒤따라 들어온 그녀가 식탁 위에 작은 화분 하나를 내려놓으며 “어머니 달개비예요. 달개비” 이런다. 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산 것이 아니고요. 제가 순을 구해 집에서 뿌리를 내린 거예요.” 한다. 가만 들여다보니 손톱보다 작은 잎이 오종종 머리를 디밀고 있다. 잎 가장자리에 핑크빛 띠를 두르고 서로 머리를 맞댄 달개비가 겨울이라 더 싱그럽게 보인다. 이 겨울에 초록이라니 그것도 서울에서 여기까지 보듬고 왔을 마음이 가상하다 못해 촉촉하다. 김이 술술 나는 국을 떠 상을 차려주고 나니 사나운 세파에 식구 하나 처지지 않고 이렇게 다 모인 것만으로도 진수성찬이다.

 

둘레둘레 밥상머리에 둘러앉은 식구가 달개비 같다. 홍삼과 돈 봉투가 밥상에서 오갔지만, 그 어떤 선물보다 내 눈에 보물은 달개비다. 어린순을 구해와 물꽂이 하고 뿌리를 내리는 동안 꽃 좋아하는 날 생각했을 터이니 그 마음을 어찌 돈으로 살 수 있으랴. 아무리 봐도 요새 아이는 아닐 성싶다. 어디서 어떤 인연으로 내게 왔는지. 먼 전생이 있다면 아마도 그녀와 나는 서로 눈빛만 봐도 죽이 잘 맞는 친구였거나 앵두꽃 만발한 화원의 주인과 단골 사이가 아니었을까 점쳐 본다. 어떤 궁합이 서로 맞아 이승에서 다시 만났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서로 참 좋은 사이였음이 분명하다. 상견례를 마치고 나오며 남편이 내게 던진 말이 있다. “새아기를 보니 딱 30년 전에 너를 보는 것 같다.” 이제 와 곱씹어 보니 무심히 던진 한마디가 절창이었다.

 

수다로 긴 밤을 보낸 아침이다. 남편은 아이들 먹일 요량으로 한우 산지로 달려가 고기를 사 오고 나는 상을 차린다. 동창이 밝아 그릇 씻는 소리 우지 져도 그들 방에서는 기척이 없다. 여기는 분명 시댁인데 그녀는 일찌감치 ‘시’ 자를 떼고 친정에 온 듯 배짱 세게 아침잠을 즐긴다. 90년생 며느리만 부릴 수 있는 특권이다. 깨워야 하나 말아야 하나 내 마음이 그네를 타고 있을 즈음 그녀가 부스스 방문을 밀고 나온다. 복슬복슬 곰돌이가 그려진 수면 잠옷을 쌍으로 입고 나타난 그들은 늦은 아침 인사를 건넨다. 누가 그랬지 호랑이와 곶감이 무섭다고. 하지만 진짜로 무서운 것은 대책 없는 귀여움이다. 살짝 까치 머리를 하고 두 팔로 기지개를 켜며 나타난 그들의 치명적인 모습은 총알 몇 발 장착한 내 마음을 단숨에 무력화시켜 버린다. 세상 어디에도 그들을 이길 장사가 없다.

 

 

돌아서 웃음을 누르고 섰는데 나는 이미 속 창시 다 사라진 물신선⁺이다. 북극곰 같은 그들의 향해 용심 한번 부려 볼까 싶어도 자꾸만 올라오는 웃음 때문에 허사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30년을 며느리 본분을 다하며 산 나는 아직 시어른과 서먹한 관계고 누가 보면 버릇없다고 나무랐을 그들과는 딱 2년 만에 경계를 허문 편한 사이가 됐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가 부리는 마법 같은 묘수는 90년생만 할 수 있는 숨은 특기다. 서로 공들여 세월을 쌓은 바 없지만, 편히 길드는 일이 어디 예삿일이던가. 시댁을 금줄 안의 성역이라 여겼던 내 생각을 그녀로 인해 나날이 깨부순다.

곧 봄볕이 성성해지면 달개비 마디마다 또 뿌리를 내리겠지. 그녀가 자신만의 방법으로 내 마음에 뿌리를 내리듯이.

 

⁺물신선-좋거나 언짢은 말을 들어도 기뻐하거나 성낼 줄 모르는 사람을 빗대어 하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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