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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

사막 건너기/김은주

에세이향기 2024. 4. 28. 06:54

 

사막 건너기 / 김은주

 
 


 


첫닭이 울기도 전 더듬더듬 어둠을 가르고 골목길에 나선다. 골목길은 이미 낯선 이국의 언어와 분주한 지프의 시동 소리가 함께 실타래처럼 엉켰다. 세상의 모든 말은 귀가 열리면 언어이고 귓등을 되돌아 나가면 소음이다. 왕왕거리는 소음도 며칠 듣다가 보니 말속에 가락도 있고 정情도 느껴진다. 여남은 대의 지프가 일제히 한 방향으로 불빛을 쏜다. 길쭉한 빛 사이로 건조한 먼지가 둥둥 떠다니고 출발을 재촉하는 시동 소리가 사뭇 우렁차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흰옷을 입은 남자가 고개와 손을 동시에 차 쪽으로 흔들며 차에 오르라는 신호를 보낸다. 긴말은 필요 없고 서로 알아서 제자리를 찾아 차에 오른다. 찬 새벽공기에 코트 깃을 세우고 손가방도 가슴을 가로질러 단단히 맸다. 지금 우리는 깜깜한 어둠을 뚫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사막으로 간다. 달리는 지퍼의 속력이 빨라질수록 그에 걸맞은 현란한 음악이 흐르고 꽈배기처럼 꼬인 멜로디가 금방이라도 바구니에서 뱀이 나올 것 같다. 선잠 깬 노곤함으로 듣고 있자니 새벽 잠을 깨우던 아잔 소리 같기도 하고 먼 우주 밖에서 전해져 오는 낯선 떨림 같기도 하다.
얼마나 달렸을까? 느낌은 같고 제목이 다른 여러 음악을 건너 사막에 닿았다. 밖은 여전히 깜깜한데 흰 칸두라를 발목까지 잘잘 끄는 남자는 잠시 차를 세우고 어둠 속으로 나선다. 어두워 무얼 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차가 기우꿍 흔들리더니 살짝 주저앉는다. 한번 발을 들이면 쉬이 빠져 나올 수 없는 사막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타이어도 힘을 빼야 하나 보다. 탄탄한 길 위에서의 팽창은 모래 언덕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여기 와서야 깨닫는다 . 적당히 무르고 때에 따라서는 모양 사납지 않게 쭈그러들 줄도 알아야 온전히 사막을 건널 수 있다. 힘을 빼고 낮게 엎드려야 생존할 수 있음을 이 나이에 이르러서야 어렴풋이 깨닫다니 늦어도 한참 늦다. 남자는 발로 차를 두어 번 치더니 다시 차에 올라 백미러로 뒷좌석을 훑어본다. 무언의 출발 신호다. 말없이 웃는 그의 웃음 끝에 곧 뒤집힐 스릴이 장난처럼 숨어있다.
스르르 물뱀이 수면을 미끄러져 가듯 차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달린다기보다는 밀려 오르고 다시 아래로 쏟아진다. 오르내리는 각도에 비례해 차 안의 함성이 높아진다. 남자는 은근히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즐기는 눈치다. 핸들을 꺾으며 이미 쏟아질 외마디를 짐작이라도 하는 듯 어깨를 들썩이며 웃는다. 아직 밖은 어둠뿐이고 남자의 눈은 어둠 사이로 난 길을 꿰뚫고 있는 듯 거침이 없다. 사선의 모래 언덕을 지나가는지 몸이 한쪽으로 기울어질 때마다 시야도 함께 기운다. 오른쪽으로 쏠린 몸을 다시 왼쪽으로 급하게 몰아넣으며 차는 점점 더 깊은 사막으로 내달린다. 어둠 사이에서 서서히 모래 언덕이 보이기 시작할 때 사막 한복판에 닿았다. 맨발로 차에서 내리니 모래가 발목까지 빠진다. 어둠이 잠시 눈을 가리니 오감은 양껏 날개를 편다. 붉에 물들어 오는 하늘을 보며 모래 언덕에 앉았다. 닿을 수 없는 풍경이 이승 아닌 듯 아득하기만 하다.
해를 기다리는 사이 그들은 헤드라이트 불빛 앞에 동그랗게 모여 앉아 기도를 올린다. 신새벽 그들은 한 사람의 가장으로서 밥을 구하러 사막에 왔고, 우리는 일상을 버리고 나를 만나러 이곳에 왔다. 서로 다른 이유로 왔지만 함께 일출을 기다리는 마음은 똑같다. 장소 불문 하루 다섯 번 올리는 기도는 깃털처럼 가벼운 일상을 매 순간 숭고하게 만든다. 희붐하게 새벽 동이 틀 무렵 검은 실과 흰 실이 구분되기 시작할 때 하루의 첫 예배를 올린다. 잠시 가이드라는 일을 내려놓고 허리를 굽혀 땅에 머리를 조아린다. 나를 낮추고 세상 모든 것을 향해 경배하는 시간이다. 세상 만물 중에 나를 가장 낮은 존재로 인식하는 저 몸짓이야말로 두고 새겨야 할 마음이 양식이다. 엎드린 그들을 보면서 나는 모든 걸 접고 순하게 엎드려 본 적이 있었나. 되짚어 봐도 기억에 없다. 부지불식간에 주어진 삶을 옆구리에 차고 앞만 보고 내달렸을 뿐 순정으로 땅에 이마를 바쳐본 적이 없다.
엎드린 적 없이 달렸으면 목적지에 닿았을 법도 한데 그도 아니다. 뛰다가 다친 상처만 수북할 뿐 등에 짊어진 그물에는 마른 바람만 가득하다. 먼발치에서 헛헛한 마음으로 그들을 내려다보니 모두 맨발이다. 옷자락은 모래에 묻혔고 머리에 쓴 쿠트라 자락은 허름한 바람에 나부낀다. 무엇 하나 충만해 뵈는 것이 없지만 그들은 언제나 밝고 유쾌하다. 저 환함의 근원은 무엇으로부터 비롯되었을까 곰곰히 생각해보니 땅을 향한 저 몸짓에 있다. 만사를 신의 뜻에 맡기고 주어지는 대로 살아가니 그 너머 무얼 더 구할 것이 있겠는가. 굳이 행복을 무게로 재자면 두고 볼 것도 없이 그들이 부자다.
모래 썰매를 타는 무리를 벗어나 사구 아래 앉아 날빛을 기다린다. 바람은 차고 건조한데 모래 깊숙이 묻은 발끝은 오히려 따뜻하다. 사방이 오로지 지평선뿐이니 어느 방향에서 해가 떠오를지 몰라 좀 더 붉은 쪽 하늘을 향해 몸을 돌려 앉는다. 초사흘 눈썹달은 하늘에 떠 있고 쏟아질 듯 박혀있던 별은 그새 사라졌다. 본래 빛은 어둠을 먹이로 삼지만, 빛도 어둠도 서로 함께할 때만이 제 값어치를 발휘할 수 있다. 바람은 밝아오는 허궁을 흔들어 또 다른 바람을 일으키고 모래는 제 몸을 갈아 다른 모래 언덕을 다시 만들어 낸다. 늘 주변을 맴돌던 시시한 것들이 여기 와서야 확연해진다. 그래 이 모두가 별 탈 없이 내 곁에 있었지. 뜨는 해도, 맑은 아침 공기도, 내 곁을 지키는 따뜻한 사람도. 머리 조아린 적 없어도 감사한 일로 가득했었지. 아득히 멀리 땅을 밀고 붉은 살덩이 하나 불쑥 솟아오른다. 생生에 다시 없을 눈부시고 황홀한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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