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수필

글밥/김은주

에세이향기 2024. 4. 28. 06:55

글 밥

 

                                                    김은주

 

젓가락을 밥 속에 찔러 넣는다옆으로 젖히니 덩어리에서 덜어져 나온 밥 한 덩이가 내 입속으로 들어온다밥을 입속으로 데리고 온 젓가락을 빼내며 오래 밥을 씹는다밥을 씹으며 내다 본 창밖에는 오월의 장미가 붉다참으로 게으른 식사다어른들이 봤으면 복 달아난다며 등을 쳤을 일이다매번 처음인 듯 밥을 씹는다처음에는 혀 위에서 구르던 밥 덩어리가 씹을수록 알갱이로 변하며 양옆 턱 선으로 가 고인다고인 밥 알갱이가 다시 어금니 위로 올라와 부서지고 다시 턱 아래로 가 씹힌다한참을 이러다 보면 혀 아래 침샘에서 달달한 침이 입 안 가득 고여 온다밥 알갱이가 녹아들며 느껴지는 이 단맛은 나를 그득한 포만감 속으로 데리고 간다.

언제부터였는지 알 수 없지만 반찬이 단출해졌다여러 가지 반찬을 두고 먹다가 보면 진정한 맛을 못 느낄 때가 잦으니 절로 그리된 모양이다입맛이 담백해지며 자극적인 반찬도 내 곁에서 사라졌다예전에는 여러 가지 양념이 듬뿍 들어간 맵고 강렬한 맛의 반찬을 즐겼으나 언제부터였는지 양념이 거세된 반찬 한가지면 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따뜻한 밥 위에 짱아지로 담근 생취 잎 한 장 얹어 먹으면 입안에 오래 머무는 취의 향내가 밥맛을 더 돋운다소금에 염장한 오이지는 여름 한 끼 식사로 그만이다맑은 생수에 밥을 말고 그 위에 손으로 찢은 오이지 하나 얹으면 황제의 밥상이 부럽지 않다이렇게 단출한 맛을 알게 된 뒤부터는 번잡한 밥상이 내게서 멀어져 갔다.

내게 있어 글 쓰는 일도 밥 먹는 일과 별반 다르지 않다여러 가지 잡다한 사건보다는 한 가지 사물 안에 철저히 녹아들어 그 바닥을 긁는 편이다그리고 바닥의 맛을 오래 음미한다오래 소재를 묵히다 보면 그 곳에서 슬슬 단맛이 차올라오고 향기로운 냄새도 난다가끔은 내가 탄수화물 중독이 아닐까하는 마음이 들 만큼 밥을 좋아하지만밥을 먹지 않아 생기는 허기는 그런대로 견딜만하다하지만글을 못 써 생기는 허기는 내게 치명적이다뭔가를 잡고 몰입하고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한데 일에 쫓겨 막막히 시간을 보내버릴 때 그 시간이 아까워 나는 심한 허기를 느낀다이 허기는 결코 밥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먹는 일과는 무관하게 밀려오는 헛헛함은 사람을 더 견딜 수 없게 한다가끔은 몸부림을 치다가 일생 나에게 주어진 글 밥의 량은 얼마일까생각해본다우리가 평생 밥을 먹고 살면서도 얼마만큼의 밥을 먹는지 알 수 없듯이 나의 글 밥의 양도 스스로 가늠하기가 어렵다다만 내게 다가온 글 밥을 먹고 다시 원고로 생산해 내는 일 밖에그 이상의 일은 나 자신도 알 길이 없다.

내가 소재를 잡고 그 소재 안으로 걸어 들어가고 다시 곱씹는 행위를 하며 글 안에서 달달하게 차올라오는 단내를 맡는 순간은 밥으로 결코 채울 수 없는 포만감과 만나게 되는 것이다이 짧은 쾌감에 나는 이미 중독된 것이 분명하다글이고밥이고번잡함에서 멀어질수록 내게는 고요가 찾아든다월요일 새벽 5근 십 년째 읽어 오는 경전을 읽는다소리 내 읽다가 보면 내 목소리가 다시 내 귀에 들리고 아래위로 움직이는 치아가 부딪혀 내는 소리그 진동이 뇌를 울린다매주 읽는 경인데도 어느 날은 이 구절이 여기 있었나 싶게 생경한 느낌으로 내게 와 닿는 날도 있고 물 흐르듯이 지나가 버리는 일도 있다한 시간 반 정도 뇌가 경 읽은 파동에 흔들리다 보면 저절로 맑은 각성상태가 된다.

귀 뒤에서부터 맑게 차올라 오는 기운이 있을 때 백팔 배를 한다몸의 마디마디를 다 움직이다 보면 모든 결이 하나 둘 풀리고 막혔던 기가 소통된다호흡이 가빠지고 등에는 약간의 땀이 배어난다몸의 모든 맥이 열렸을 때 조용히 앉아 명상에 든다.

절을 하며 일어섰던 몸의 기운을 차분히 가라앉히다보면 지난주 바쁘게 만났던 얼굴들이 떠내려가고 이번 주에 해야 할 일들이 눈앞에 줄을 선다명상의 들머리에서 생기는 일이다다시 나를 잡고 들어가면 이런 일들이 하나 둘 멀어지며 블랙홀처럼 깊은 고요 속으로 들어간다그 고요 안에는 눈을 감고 있어도 환한 빛이 보이고 천리 밖에 있는 사람의 목소리도 지척에서 들린다.

이 아득함의 끝에서면 감은 내 눈앞에 밥 한 그릇 둥둥 떠다닌다펴다보니 내 몫의 글 밥이다화려하게 치장한 글 밥이 아니라 단조롭게 짱아지 하나만 둔 조촐한 밥상이다여럿이 모여 소란스럽지도 않고 단지 나 혼자다혼자여서 더욱 자유롭다수저를 들고 막 그 밥상 앞에 앉는다문장하나를 입 속에 넣고 오래 씹어본다씹을수록 단맛이 입안에 가득 고여 온다감칠맛 나는 이 맛을 나는 오래 즐긴다감은 눈으로 내다 본 창밖 저 너머에 오월의 장미가 붉다.

'좋은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옴살/김은주  (1) 2024.04.28
다시 시작 / 김은주  (1) 2024.04.28
사막 건너기/김은주  (1) 2024.04.28
달개비/김은주  (1) 2024.04.28
토굴 /김은주  (1) 2024.04.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