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수필

옴살/김은주

에세이향기 2024. 4. 28. 07:23

 

옴살/김은주

 
가을이 내리는 골목길은 한적하고 쓸쓸하다. 인적 없는 길을 따라 올라가니 거기 곧 쓰러질 듯 집 한 채 있다. 

 주황색 양철지붕 아래 한 뼘 크기의 일자집이다. 여닫이 방문 두 짝과 작은 창이 하나 있는 조촐한 여염집이다.
 방문 앞에는 낮은 나무 책상이 둘, 나란히 놓여 있고 그 위에 누가 꺾어다 뒀는지 빈 병에 코스모스 한 줌 꽂혀 있다.
 오른쪽 추녀 아래로 감나무 한 그루 서 있고 그 아래 블록으로 쌓아 올린 허름한 부엌이 있다. 부엌문은 따로 없고 군용천막을 말아 올렸다 내리는 정도로 문을 대신하고 있다.
 예배당 종지기로 일생 살다간 권정생의 생가다. 마당에 무성하게 잡초가 자라나 폐가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 분의 삶에 비춰보자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더 나아 보인다. 물색없이 조성해둔 문학가들의 생가에 실증이 난 터라 오히려 손대지 않고 저절로 둔 그곳의 풍경이 마음 안에 오롯이 들어 앉았다.
 방문은 잠겨 있다. 닫혀 있다고 생각하니 안이 더 궁금해진다. 찢어진 한지 방문 틈으로 안을 들여다보니 어둑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한참을 눈을 박고 들여다보니 차차 어둠에 익숙해지고 조화 한 다발 뒤에 선생이 서 계신다. 밖은 찬란한 가을인데 비해 방안은 춥고 쓸쓸해 보인다. 내올의 외로움을 손 뻗어 잡아 주고 싶다.
 한지 방문 옆에 미닫이 창문이 있다. 유리라 실내가 한결 잘 보일 것 같아 그곳에 얼굴을 대고 안을 들여다본다. 정작 보고자 하는 유리안은 어둑해서 잘 보이지 않고 내가 들여다보고자 하는 그 반대쪽 풍경이 유리안에 가득하다. 들고 있던 카메라를 그곳에 대본다.
 유리에 새겨진 풍경이 지금 바로 내 등 뒤에 있는 풍경일진데 사각의 낡은 유리틀 안에 새겨진 그림은 낯설기만 하다. 내가 발을 딛고 선 그곳이 아닌 아득히 먼 곳양 멀게만 느껴진다.
 앵글 안으로 마당 구석에 서 있는 나무 세 그루가 들어왔다. 이제 막 물들 채비를 하고 있는 나무 옆에 등이 아주 야윈 사람이 무심히 서 있다. 어둑한 실내에서 권정생의 모습을 찾다가 불현듯 내 시야를 차고 들어온 사람이다.
 그녀는 내게 한번도 친한 척하지 않는다. 나 역시 늘 담담하고 밋밋하다. 좋다고 서로 엎어지고 자빠지지 않으니 남들이 보면 친구 맞나 싶지만 그래도 우리는 한 달에 한 번 어둑한 지하에서 독립영화를 같이 보는 사이다. 보면서 영화 겹겹이 숨어 있는 감정의 결을 서로 읽는다. 같이 알아채고 나면 서로 이야기꽃을 피운다.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지만 그 이야기들 안에 무한의 에너지가 숨어 있다. 각자 알아서 그 안의 에너지를 흡입하고 간다.
 보고 나면 골목 끝에 있는 밥집에 가서 집밥 같은 식사 한 끼를 나눈다. 나눈 후 총총 헤어지기도 하고 가끔은 에스프레소 한 잔 두고 밤늦도록 서로의 생각을 탐닉하기도 한다. 하지만, 헤어져 횡단보도만 건너오면 다시 한 달이 되도록 서로 연락도 없다. 참 희한한 사이다. 그녀 말마따나 점조직이 분명하다. 헤쳐 보여가 철저히 잘 이루어지는 그런 친구다. 가끔 뜬금없이 서로 문자를 주고받기도 한다.
 '잘 있수, 몸은 성한가?' 이렇게 문자가 오면 '언제 함 봅세'이게 다다.
 서로 다급히 연락한 적도 없고 친하다고 같이 목간 한번 간 적도 없다. 속살 한번 본 적 없는 사이지만 그래도 서로 볼 것은 다 본다. 내가 힘들고 지쳐 입술이 터져 오르면 묵묵히 찻집으로 데려가 창밖 야생화를 실컷 보게 한다. 눈을 통해 들어오는 자연을 보며 몸도 마음도 잠시 해독의 시간을 갖는다.
 가끔 내 가게에 그녀가 온다. 추워야 제 맛이 나는 음식 때문에 난방이 거의 없는 가게는 춥다. 칭칭감고 일하는 나를 차 한잔 마시며 물끄러미 그냥 바라보다가만 간다. 단 한 번도 쓰다 달다 위로 한 적 없다. '뭐 사는게 별 건가?' 이 한마디 던지고 사는 것과 전혀 무관한 이야기 조금 나누다 일어선다.
 가는 길에 주섬주섬 강정 몇 봉지 비닐에 담고 돈을 책상 위에 얹어 놓고 간다. 나는 그냥 줘도 시원찮을 판에 돈 받는 손이 내심 부끄럽다. 아직은 내 음식이 돈이 되는 과정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 말 없이 문을 밀고 나선다. 나는 가게 문에 기대서서 그녀를 향해 외친다.
"고마워"
"뭐가"
 그녀가 말한다.
 나는 웃으며 중얼거린다. '그냥' 머리도 꼬리도 없는 말을 서로 남기고 그녀가 간다.
 순간 사가의 앵글 안에서 그녀가 사라진다. 고요한 풍경 안에는 다시 물들 채비중인 세 그루의 나무만 남았다.  불어오는 바람에 나뭇잎들이 제 몸을 뒤집으며 비늘을 턴다. 카메라에서 눈을 떼니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그녀가 저만치 앞서 골목길을 내려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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