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2024/04/16 2

꽃담 / 권혜민

꽃담 / 권혜민 쌍계사 경내를 거닐다가 나한전에서 선방까지 이어지는 담장 앞에 섰다. 서가에 책을 비스듬히 꽂아놓은 것 같은 담장의 기와들이, 서로 얼굴을 맞대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한가운데는 깨진 백자찻잔 굽으로 장식하고 깨진 기와가 모여서 한 송이 꽃으로 피었다. 하잘것없이 깨어진 그릇이나 기와도 손잡고 어울리니 멋스러운 꽃이 된다. 찢어지고 부서져 버림받은 것들, 아프고 외로운 것들이 어울려 피워낸 꽃을 보니 가슴이 찡하다. 이 꽃은 세월이 가고 바람이 불어도 시들거나 지지도 않는다. 천천히 끼고 돌면서 내 삶을 되돌아본다. 어제 저녁 고등학교에 다니는 작은 아이 문제로 남편과 심하게 다투었다. 막내라고 오냐오냐했더니 버릇이 점점 엉망이 되어가고 있었다. 여러 번 아이에게 주의를 시키라..

좋은 수필 2024.04.16

꼭지마리 / 권혜민

꼭지마리 / 권혜민 시선이 얼어붙었다. 설렁설렁 구경하면서 가볍게 돌아다니던 걸음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동행했던 사람들은 이미 건너편 전시실로 사리지고 나 홀로 남았다. 명치에 묵직하게 통증이 얹히자 진땀이 비적거리고 배어 나온다. 대나무로 만든 생활용품을 전시해 좋은 박물관을 둘러보는 중이었다. 이곳 남도의 물레는 두 개의 바퀴와 둥근 테두리 사이를 대나무 쪽으로 연결하여 하나의 몸을 이루도록 되어 있다. 어릴 때 기억을 떠올리며 지나치려는데 물레가 뽑아낸 실이 발길을 칭칭 동여매기라도 한 듯 꼼짝할 수 없었다. 우리 너머로 보이는 물레의 꼭지마리에서 세상을 떠난 둘째 고모를 만났다. 둘째 고모는 자식을 낳지 못하셨다. 고모부가 장터 국밥집에서 일하던 여인을 들여, 이듬해 딸을 낳으면서 한 남자에..

좋은 수필 2024.0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