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2024/04/30 3

깃들이다 / 김은주

깃들이다 / 김은주아마 이른 봄이었나 보다. 겨울 일을 막 끝내고 풍성하게 주어진 시간을 바느질로 달래고 있는데 베란다 광목 커튼 뒤가 이상하게 수상쩍다. 꾸르륵 꾸르륵, 창자가 밥을 밀어내는 소리 같기도 하고 어찌 들으니 개수대에 물 빠지는 소리 같기도 하다. 자투리 천으로 말 여러 마리 만들고 고무신 한 켤레를 다 깁는 사이에도 정체 모를 소리는 내내 주위를 맴돌았다. 창밖은 위태로운 난간이고 강을 끼고 있어 사나흘이 멀다 하고 바람이 불어대니 그 무엇도 깃들 틈이 없는 곳이다. 소리의 정체가 궁금하긴 했으나 아직 바람이 차니 창을 열어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다 변화무쌍한 봄 날씨는 황사 바람이 몰아치고 볕이 났다가 또 사월에 함박눈까지 내렸다. 조석으로 변하는 날씨에 휘둘리다 묘한 소리는 사라..

좋은 수필 2024.04.30

벽 / 허세욱

벽 / 허세욱벽을 보면 왠지 친근했다. 그 텁텁한 살결이 이웃집 아저씨 같고, 고집불통으로 서 있는 모습은 답답한 선머슴을 보는 느낌이다. 우릴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막지만 지금도 작은 공을 꺼내 거기다 벽치기 하고 싶다. 우릴 건너가지 못하게 버티고 섰지만 거기엔 누가 누굴 좋아한다고 갈겨놓은 낙서가 심심찮게 보인다. 우릴 더 멀리 볼 수 없도록 막았지만 거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등짝을 기대고 시원하게 두 어깨를 문지르고 싶다.그 구조는 별 게 아니었다. 황토에다 지푸라기를 반죽하면 그만이다. 양회벽이라도 철근이나 각목을 촘촘히 세우고 거기에 덕지덕지 흙을 붙이고 시멘트를 바르고, 다시 환한 벽지에다 풀을 멱칠하여 슬슬 손질하면 말끔해졌다.작은 집에 많은 것은 섬돌 위에 고무신만 아니었다. 작은 초가삼간..

좋은 수필 2024.04.30

김치와 고등어 / 백금태

김치와 고등어 / 백금태김치와 고등어 / 백금태 시큼한 김치 한 쪽을 썩둑썩둑 썰어 냄비 바닥에 깔았다. 양파와 파도 길쭉길쭉하게 잘라 옆에 곁들였다. 그 위에 금방 어물전에서 사 온 살아 펄펄 뛸 것 같은 고등어를 손질하여 얹고 고춧가루를 듬뿍 뿌렸다. 고등어가 잠길 듯 말 듯 물을 잘박하게 붓고 가스 불을 댕겼다. 시간이 흐를수록 온 집안이 김치의 시큼한 맛과 고등어의 구수한 냄새에 푹 빠졌다. 몇 년이나 냉장고 밑바닥에 묵혀 있던 김치와 고등어가 서로를 품으며 깊은 맛을 뿜어낸다.그 김치는 부산에 사는 언니가 삼 년 전에 담가 준 것이었다. 직장 다니는 동생이 안쓰러운지 툭하면 김치 상자가 택배로 배달되곤 한다. 그해는 동생에 대한 언니의 사랑이 더 깊었는지 아니면 바닷가에 사는 것을 자랑이라도 하..

좋은 수필 2024.0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