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2024/04/28 8

옴살/김은주

옴살/김은주 가을이 내리는 골목길은 한적하고 쓸쓸하다. 인적 없는 길을 따라 올라가니 거기 곧 쓰러질 듯 집 한 채 있다.  주황색 양철지붕 아래 한 뼘 크기의 일자집이다. 여닫이 방문 두 짝과 작은 창이 하나 있는 조촐한 여염집이다. 방문 앞에는 낮은 나무 책상이 둘, 나란히 놓여 있고 그 위에 누가 꺾어다 뒀는지 빈 병에 코스모스 한 줌 꽂혀 있다. 오른쪽 추녀 아래로 감나무 한 그루 서 있고 그 아래 블록으로 쌓아 올린 허름한 부엌이 있다. 부엌문은 따로 없고 군용천막을 말아 올렸다 내리는 정도로 문을 대신하고 있다. 예배당 종지기로 일생 살다간 권정생의 생가다. 마당에 무성하게 잡초가 자라나 폐가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 분의 삶에 비춰보자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더 나아 보인다. 물색없이 조성해..

좋은 수필 2024.04.28

다시 시작 / 김은주

다시 시작 / 김은주 목화가 툭 하고 고개를 꺾었다. 경주어 얻어 온 씨앗이 되 피우고 다시 살아나 여러 해 나의 뜰에서 산다. 솜이 칭칭 감긴 씨앗 몇 알을 누구에게 받아 왔는지 통 기억에 없다. 백련이 지고만 어느 논둑에서 받은 기억은 아련한데 누구였는지 무슨 일로 연 밭에서 목화씨를 건넸는지 아득하기만 하다. 마른 기억은 바람에 사라졌지만 해마다 야무진 검은 씨앗을 쓰다만 종이에 싸 확독에 보관해 둔다. 옹기에서 겨울을 난 씨앗은 봄이 되면 다른 일년초와 함꼐 뜰 여기저기 뿌려지는데 그 위치는 꽃 피는 여름이나 되어야 정확히 알게 된다. 마당 귀퉁이에 있는 듯 없는 듯 그렇게 꽃 피우고 지다가 초록이 쓰러지는 이맘때쯤 흰 솜꽃을 피워 존재를 드러낸다. 집 비운 사이 된서리가 다녀간 모양이다. 온통 ..

좋은 수필 2024.04.28

글밥/김은주

글 밥                                                     김은주 젓가락을 밥 속에 찔러 넣는다. 옆으로 젖히니 덩어리에서 덜어져 나온 밥 한 덩이가 내 입속으로 들어온다. 밥을 입속으로 데리고 온 젓가락을 빼내며 오래 밥을 씹는다. 밥을 씹으며 내다 본 창밖에는 오월의 장미가 붉다. 참으로 게으른 식사다. 어른들이 봤으면 복 달아난다며 등을 쳤을 일이다. 매번 처음인 듯 밥을 씹는다. 처음에는 혀 위에서 구르던 밥 덩어리가 씹을수록 알갱이로 변하며 양옆 턱 선으로 가 고인다. 고인 밥 알갱이가 다시 어금니 위로 올라와 부서지고 다시 턱 아래로 가 씹힌다. 한참을 이러다 보면 혀 아래 침샘에서 달달한 침이 입 안 가득 고여 온다. 밥 알갱이가 녹아들며 느껴지는 이..

좋은 수필 2024.04.28

사막 건너기/김은주

사막 건너기 / 김은주   첫닭이 울기도 전 더듬더듬 어둠을 가르고 골목길에 나선다. 골목길은 이미 낯선 이국의 언어와 분주한 지프의 시동 소리가 함께 실타래처럼 엉켰다. 세상의 모든 말은 귀가 열리면 언어이고 귓등을 되돌아 나가면 소음이다. 왕왕거리는 소음도 며칠 듣다가 보니 말속에 가락도 있고 정情도 느껴진다. 여남은 대의 지프가 일제히 한 방향으로 불빛을 쏜다. 길쭉한 빛 사이로 건조한 먼지가 둥둥 떠다니고 출발을 재촉하는 시동 소리가 사뭇 우렁차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흰옷을 입은 남자가 고개와 손을 동시에 차 쪽으로 흔들며 차에 오르라는 신호를 보낸다. 긴말은 필요 없고 서로 알아서 제자리를 찾아 차에 오른다. 찬 새벽공기에 코트 깃을 세우고 손가방도 가슴을 가로질러 단단히 맸다. 지금 우리는 깜..

좋은 수필 2024.04.28

달개비/김은주

달개비                                                                                                                 김은주  국 안에 무가 제법 투명하다. 함께 넣은 파와 마늘이 어우러져 끓고 있는 국물도 곡진해졌다. 반찬 몇 가지를 조물조물하고 뒤이어 식혜 한 통을 다 삭혀 두는 사이에도 그녀는 여태다. 빠진 목으로 짐작건대 오고도 남았을 시간이건만 감감무소식이다. 기다리는 자가 느끼는 시간은 오마는 사람의 두 배로 길다. 같은 시간이지만 오는 이에게는 서둘러야 하니 짧게 느껴질 테고 기다리는 사람은 오리무중이니 까막눈이 될 수밖에 없다. 엿가락처럼 늘어진 시간을 주체할 수 없어 걸레질하다가 무단히 멀쩡하게 놓인..

좋은 수필 2024.04.28

토굴 /김은주

토굴 /김은주  글을 재우려고 방문을 닫는다. 자꾸만 들떠 달아나는 글을 잡고 뉘여 토닥토닥 등을 두드린다. 이불도 끌어당겨 덮어 보고 흥얼거리며 자장가도 불러 본다. 겨드랑이 아래 끼고 누워 충분히 숨길도 열어주고 그래도 뒤척이면 머리까지 쓰다듬어 준다. 스르르 눈 감을 때까지, 달디 단 잠 속에 들 때까지 오래 글을 어르고 달랜다. 처음부터 재우려는 생각은 없었다. 행간을 넘나들며 혼자 잘 놀 때는 그러려니 하고 두고 보지만 걸려 넘어지고 징징거리기 시작하면 그때는 푹 재우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다. 문턱에 걸리고 툴툴거리는 글을 어찌 그냥 두고 보겠는가? 쓰는 자는 툴툴거림의 이유라도 알지만 읽는 자에게 그것은 독서의 물길을 막는 일이니 말이다. 접시꽃 흐드러진 칠월의 뙤약볕이 방까지 도달하기에는 ..

좋은 수필 2024.04.28

자객 / 김은주

자객 / 김은주  자객이 떴다. 푸른 안개도 바람을 가르는 그림자도 없다. 끊어 놓을 듯한 호흡도 꿈틀거리는 맥박 또한 찾아볼 수 없다. 달빛 한줌 등에 업지 않고 월담은 애당초 꿈도 꾸지 않은 듯하다. 자객은 그 흔한 검 한 자루 손에 쥐지 않고 무더운 염천을 건너 우리에게로 왔다. 심복 하나쯤 둘 법도 한데 오직 혼자다. 이울어진 빛의 배후에 도사리고 앉았다가 싸늘한 쇠붙이 올가미 하나 달랑 들고 긴 유리병의 목을 따러 하강한 것이다. 금방이라도 숨 줄을 끊어 놓을 듯한 자객의 기세에도 마개는 한치의 흔들림도 없다. 병은 긴 목을 빼고 앉아 언제나 목숨을 내놓기 위한 것이라는 듯 일말의 저항도 없어 뵌다. 병은 자객을 만나기 전 냉골의 방에 앉아 긴 참선에 들었을 것이다. 화두타파를 위해 목구멍까지 ..

좋은 수필 2024.04.28

빈방/김은주

빈방                                                                                            김은주  홍매화가 붉게 핀 길 건너 할머니집이 전에 없이 부산하다. 마당 가득 사람이 북적대고 환하게 불도 밝혀져 있다. 집 앞 텃밭에 흙이 녹아 씨를 넣어야 할 때가 다 되었는 데도 할머니는 기척이 없었다. 추운 겨울을 건너기 위해 아들네 집에라도 가셨나 싶었는데 오늘 밤 할머니는 조등(弔燈)으로 내걸려 있다. 일 년 내도록 드나드는 사람 하나 없더니 오늘 보니 식구들도 참 많다. 보이지 않는 식구들이 저리 많은데 할머니는 겨우내 빈방에 사람을 들이고 싶어 그리 안달이셨을까. 나는 베란다 창틀에 기대 할머니 집 마당을 유리병 속처럼 내려..

좋은 수필 2024.04.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