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2024/04/05 8

미역돌 / 박은주

미역돌 / 박은주 동풍에 훈기가 실려오면 어머니는 바빠지기 시작했다. 겨우내 바닷물을 먹고 자란 돌미역을 거두어들일 때가 된 것이다. 일기예보를 챙겨보고도 미덥지가 않아 마당에 나가 하늘을 보며 바람을 살핀다. 미역을 따는 날은 물론이고 바싹 마를 때까지 며칠간 햇살과 바람이 뽀송뽀송해야 하기 때문이다. 새벽녘에 전화를 주신 것으로 보아 이번에도 날을 잡은 모양이었다. 언니와 나는 차를 타고 친정으로 허겁지겁 달려갔다. 먼저 온 오빠와 올케는 벌써 부지런히 손을 보태고 있었다. 방금 따온 미역을 말리고 있는 어머니는 눈도 돌리지 않은 채, 할 일을 일러주었다. 미역을 뒤적일 때마다 미끌미끌한 바다 냄새가 포말처럼 코끝에서 부서졌다. 어머니에게 미역은 단순한 먹거리가 아니었다. 목숨과도 같은 재산이었다. ..

좋은 수필 2024.04.05

횃대보/정재순

횃대보 정재순 장롱 깊숙이 화선지에 싸여 있는 천은 횃대보가 분명했다. 열아홉 새색시의 혼수품이었던 한 폭 크기의 횃대보에는 부귀와 장수를 기원한다는 꽃과 나비가 수 놓여 있다. 양 끝자락의 ‘복(福)’ 字 는 글자이기 보다는 한 땀 한 땀 수를 놓으며 집안에 복이 들어오는 길을 트고 싶었던 엄마의 기도였을 것이다. 당신의 유난했던 손길이 그대로 묻어있어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창문 가리개로 쓰면 제법 근사할 성 싶다. 내가 어렸을 적에는 벽에 못을 박아 긴 막대를 걸쳐서 옷을 걸었다. 횃대보는 벽에 걸어둔 옷에 먼지가 앉는 것을 막아 주는 커다란 천으로, 걸어둔 옷이 보이지 않게 미관상 가리개 역할도 했던 보자기 농이었다. 안방 벽장엔 언제나 부모님의 옷이 걸려 있었고, 그 옆 한쪽 면에 길게 놓인 횃대..

좋은 수필 2024.04.05

탁설, 공空을 깨우다 / 윤미영

탁설, 공空을 깨우다 / 윤미영 바람을 기다린다. 깃털처럼 가벼운 몸짓으로 발밑을 살핀다. 제자리에서 돌아서지도 벗어나지도 않는다. 하안거 동안거가 끝나고 수행 스님이 돌아와도 하늘 언저리에 고요히 빗금만 긋는다. 바람이 오면 바람이 치는 대로 소릿결을 만든다. 능선을 넘어온 산바람은 길을 내지 않는다. 모양도 빛깔도 없다. 사물에 부딪혔을 때 길을 보여주고 소리를 듣게 한다. 추녀 끝에 매달린 풍경이 바람을 맞이하여 응답한다. 산빛을 담아 청아한 음색을 울린다 하여 풍령風鈴, 풍탁風鐸이라 불리는 풍경이, 서기瑞氣 감도는 하늘에 얹혀 묵언 수행 중인 사찰을 깨운다. 풍경 안에는 물고기 모양의 단단한 금속이 달려 있다. '탁설鐸舌'이다. '목탁의 혀'라는 두 글자가 '탁'치는 듯, 얇은 혀가 경종을 울리는..

좋은 수필 2024.04.05

그믐 등/백정혜

그믐 등 백정혜 길가 허물어진 기와집에 안노인 둘이서만 살고 있다. 칠순이 넘은 할머니는 자그마한 몸매와 꼬장꼬장한 자태에 못지않게 칼칼한 성품이시다. 평생 남의 손을 빌려 단장해 본 적이 없다는 머리는 언제나 참빗으로 빗은 듯 쪽을 찌고 있다. 삼단 같았다던 머리숱도 이제는 머리 밑이 훤히 드러나고 밤알만한 머리말이의 비녀가 무거워 보인다. 깨끗한 살결과 단아한 이목구비로 미루어 젊었을 때는 엔간한 미색을 지녔을 것 같았다. 거기에 비하면 열 살이나 밑인 다른 노인은 하나에서 열까지 비교가 된다. 펑퍼짐한 체구에 걸맞게 성질 또한 느리고 눅다. 깨끔하고 강단 있어 보이는 할머니와는 달리 만사가 태평이다. 처음에 그들을 보았을 때 어떤 관계로 인연을 맺고 사는지 짐작이 쉽지 않았다. 둘은 어느 때 어디서..

좋은 수필 2024.04.05

어물전에서/손광성

어물전에서 손광성 일요일 같은 날은 고궁을 산책하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아니면 정장을 하고 연주회에 가보는 것은 어떨까. 젊고 멋진 여자랑 함께라면 가슴이 두근거릴 것이다. 젊었을 때 우리는 폭풍우 속을 우산도 없이 걸었다. 이유 없는 반항과 까닭 없는 울분과 그리고 폭음과 폭언과… 젊은 혈기마저 식어 버린 지금, 필요한 것은 따뜻한 온기와 약간의 생동감이라고나 할까. 나는 외롭고 쓸쓸할 때면 아내를 따라 장보러 가기를 좋아한다. 시장의 물건들은 임자가 따로 없다. 먼저 선택한 사람이 임자요, 사가는 사람이 임자. 게다가 모든 것이 생동감으로 넘친다. 장사꾼들이 외쳐대는 떠들썩하는 소음과 북적거리는 인파의 혼란 속에서 나는 가벼운 흥분마저 느낀다. 그런 감정은 어물전 앞에서 절정에 이른다. 생선은 도마..

좋은 수필 2024.04.05

둥지/김만년

둥지 김만년 까치가 떠났다. 빈 둥지만 덩그러니 놓아두고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졌다. 둥지는 까치 부부가 합심해서 지은 저희들만의 성소였다. 해토 무렵부터 나뭇가지를 총총 뛰어다니며 분분한 수다로 집 지을 궁리를 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우듬지 부근에 견고한 공중 건축물을 축조한 것이다. 까치 부부에게는 오랜 공력을 들여 마련한 신접살림 집인 셈이다. 모진 비바람을 다독이며 털북숭이 새끼들을 키워 온 둥지다. 사람의 심사로 보면 애착이 갈 법도 하건만 까치 부부는 오늘 아침 미련 없이 새끼들을 앞세우고 이소離巢를 감행한 것이다. 한철을 머리맡에서 지저귀던 까치들이 떠나자 문득 알 수 없는 공허감이 밀려왔다. ​ 이사할 목록들을 정리하며 집 안을 한 바퀴 둘러본다. 몇 올의 햇살들만 들락거릴 뿐 사방이 적막하..

좋은 수필 2024.04.05

닻/박말애

닻 박말애 바닷가를 거닐었다. 발걸음이 멈추는 어느 지점에서 우람한 물체가 시선을 압도했다. 전체적인 몸체는 두껍고 무겁게 느껴졌다. 둥글게 자리잡은 밑부분에서 감싸듯 솟아오른 두 개의 갈퀴가 강한 힘만이 이 물체의 전유물인 듯 팔척의 장수처럼 근력이 불끈 솟는다. 돌출된 이미지를 발산하는 이 남성미의 조형물은 닻이다. 크고 육중한 자태는 오랜 시간동안 해풍을 맞으며 자리를 지켜온 듯 세월의 겉옷은 녹이 슬고 거칠어 풍상의 세파를 견뎌온 흔적이 곳곳에 배여 있었다. 우악스럽게 펼쳐진 양쪽의 갈퀴는 금방이라도 하늘을 움켜잡을 듯이 왕고집적인 자태에서 은연 중 야릇한 남성미가 풍기기도 했다. 세상사 뗄래야 뗄 수 없는 인연의 고리는 비단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비록 미생물이지만 사람과 필연의 관계로 ..

좋은 수필 2024.04.05

분꽃/이혜연

분꽃 이혜연 가슴에 묻어둔 그리움들이 있다. 질화로 속에 담긴 불씨처럼 그렇게 가슴 깊숙한 곳에 들어 앉아 자칫 냉랭해지려는 내 삶에 훈훈한 온기를 불어 넣어주곤 하는, 내 인생의 동반자이다. 때론 선명한 윤곽을 지닌 실체로, 때로는 안개처럼 모호한 모습으로 불현듯 그리움은 다가온다. 그런데 요즈음 들어 그리움의 대상들이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새로 밝는 날에 대한 기대감이 줄어져 가기 때문일까. 미래지향적이기보다는 귀소본능처럼 자꾸만 까마득히 세월을 거슬러 오르려고만 한다. 화사한 봄보다는 까칠해진 가을에, 빛을 여는 아침보다 빛을 거두어들이는 어스름 저녁에 편안함을 느끼는 것도 같은 맥락이 아닌가 싶다. 그 어스름녘에 피어오르는 저녁연기와도 같은 그리움을 주는 꽃이 있다. 목을 뽑아 올린 긴 기다림 ..

좋은 수필 2024.04.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