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수필

닻/박말애

에세이향기 2024. 4. 5. 02:48

 

                                                                                                                                박말애

 

 바닷가를 거닐었다발걸음이 멈추는 어느 지점에서 우람한 물체가 시선을 압도했다전체적인 몸체는 두껍고 무겁게 느껴졌다둥글게 자리잡은 밑부분에서 감싸듯 솟아오른 두 개의 갈퀴가 강한 힘만이 이 물체의 전유물인 듯 팔척의 장수처럼 근력이 불끈 솟는다돌출된 이미지를 발산하는 이 남성미의 조형물은 닻이다크고 육중한 자태는 오랜 시간동안 해풍을 맞으며 자리를 지켜온 듯 세월의 겉옷은 녹이 슬고 거칠어 풍상의 세파를 견뎌온 흔적이 곳곳에 배여 있었다우악스럽게 펼쳐진 양쪽의 갈퀴는 금방이라도 하늘을 움켜잡을 듯이 왕고집적인 자태에서 은연 중 야릇한 남성미가 풍기기도 했다.

 

 세상사 뗄래야 뗄 수 없는 인연의 고리는 비단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비록 미생물이지만 사람과 필연의 관계로 공생을 맺기도 한다군더더기 없는 닻의 매끄러운 몸체에 연결된 굵고 실한 뼈대의 쇠고리는 많은 것을 시사했다긴 시간동안 그 만의 본분을 다해야 하는 닻줄은 둥글게 이어져 믿음과 안전의 버팀목으로 손색이 없었다그가 해야 할 일은 강하지 않으면 행할 수 없는 굳건한 사명의 이면에는 안정적인 행복이란 필수의 과제를 담보로 한다다소곳히 정좌한 단조로운 모습에서 비장함마저 묻어나는 이 미생물의 철칙의 한계는 곧 침묵이다미세한 바람결에도 흔들리는 갈대처럼 한치의 요동마저 허용할 수도해서도 안 되는 고정적인 강함은 닻만이 갖고 있는 울력의 근원임을 말해주었다.

 

 호젓한 해안로에 터줏대감처럼 자리하고 있는 이 전시물은 바다와 필연의 관계를 맺고 있다배를 정박하기 위해 물속으로 내려지는 닻은 튼튼한 나무의 뿌리처럼 배의 무게를 감당해야 한다출항의 뱃고동이 울리는 그 순간까지 물살에 떠내려가지 않게 배를 지키는 것은 나로 하여금 상대방을 지키고 보호해야하는 닻의 본질이지만많은 관계성을 부여한다그 중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가족을 지켜야 하는 아버지의 역할과 무관하지 않다깊고 어두운 물속에서 묵묵히 인내로서 책임을 완수해야 하는 안전의 잣대는 가정과 가족의 질서를 위해 노심초사하는 아버지의 노역과 닮아 있다큰나무의 그늘처럼 언제나 가족의 평안을 염두에 두고 울타리가 되어야 하는 버팀목의 아버지한마디의 불평보다는 오직 과묵함으로 지켜내는 닻의 우직함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두 개의 얼굴은 연리지처럼 서로를 마주 바라보고 있다.

 

 우리네 삶 속엔 닻의 명제가 따른다나는 나이지만 나로부터 시작되는 연결고리는 자의던 타의던 부정할 수 없는 생의 일부이다자식은 부모의 애틋한 사랑과 보호의 테두리에서 성장을 한다나아가 스스로의 자아성립이 이루어지면 애둘러 내 자신이 닻이 되는 연관성은 굴러가는 또 다른 두 개의 바퀴이다한 그루의 나무가 커가면서 숲을 이루는 것과 같이 의무와 사랑으로 이어지는 진실된 관심과 배려는 샘솟는 닻의 마중물이다돌고 돌아가는 연쇄적인 고리의 작용이 인생의 무대에 올려지는 순간짜여지는 각본처럼

 

 예측할 수 없는 내 삶의 근거지는 바다가 되었다바다로 나아가는 첫걸음은 무한정한 설렘과 기대 이상이었지만그곳이 신의 영역이란 것을 깨닫기까지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단지 생업의 터전이라는 단순한 목적의식만이 뇌리를 맴돌았을 뿐언젠가부터 숙연해지고 작아지는 내 안의 나를 바라보는 나약함에 비해 그의 몸짓은 광대무변했다해녀에겐 바다는 변함없는 의지처이고 동반자임을 자처하지만 자연의 깊이는 의미심장할 뿐이다희비가 엇갈리는 과제를 안겨주는 그의 미스터리 앞에서 해녀는 한낱 가랑잎에 불과하다흔들리고 내동댕이쳐지는 물살의 어긋남에 버틸 수 있는 것은 오직 닻의 믿음이다.

 

 해녀의 닻은 하나의 줄에 매달린 그물주머니(쪼래기)가 전부이다태왁의 테 중심에 단단히 줄을 묶은 후그 줄의 맨 끝에 그물로 된 작은 주머니를 매달아 그 안에 돌을 집어 넣는다돌은 적당한 무게로 물 속 큰 바위에 걸릴 수 있는 부피여야 한다해산물이 많은 장소를 찾아 물질을 할 때는 그 자리를 지킬 수 있게 필히 줄을 늘어뜨려 닻을 놓는다물 속으로 내려간 돌주머니는 바윗틈에 걸리면서 물살에 맞서 태왁이 떠내려가지 않게 붙잡아준다비록 쇠로 만든 강한 닻줄은 아니지만 가정사 일어나는 일거수 일투족을 가장인 아버지로부터 도움과 해결을 찾듯이태왁에 매달려 있는 닻은 물질을 하는 동안 해녀를 지켜주는 파수꾼이다뭍에서 바라보는 바다의 풍경은 아름답기 그지없지만썰물과 들물의 교차점에서 밀려가고 밀려오는 바닷물 속의 변덕은 날마다 부대끼는 크고 작은 가정사와 별반 다르지 않다그래서 혹자는 인간은 곧 자연을 닮아 있다고 말하는지도 모른다.

 

 해녀는 물살이 거세면 물이 간다라고 말을 한다물살의 힘은 상상을 초월한다죽성과 맞닿아 있는 월전은 대변바다와 경계를 이루는 곳이다그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이북다르방 사이 지점은 물살이 거세기로 유명하다다르방 끝자락이 닿는 물 속 긴 여의 고랑에는 앙장구와 해산물이 많이 서식하고 있다물살이 센 만큼 물질이 용이하지 않다. 3~4m 깊이의 물 속을 헤치고 겨우 바닥에 닿아 바삐 두 손 가득 앙장구를 움켜쥐고 올라오면 숨이 턱에 차오른다오리발을 내차며 물위로 바삐 솟구치는 찰나 내 몸이 물살에 떠내려 가는 것을 감지했다유속이 얼마나 빠른지 차르르르 물살이 미끄러지듯 스쳐 지나가는 소리가 귓전을 맴돌았다닻을 놓았지만 너무 거센 물살에 바윗틈에 걸린 줄이 팽팽히 맞서다 견디지 못하고 그만 뚝 끊어지고 말았다일촉즉발의 심정으로 물 위로 고개를 내미는 순간 태왁은 저멀리 바람같이 사라지고 있었다전신에 힘이 빠지면서 한낮의 햇볕에 하얗게 바래진 수면 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다행히 들물이어서 뭍으로 나올 수 있는 방향이었지만썰물이었다면 먼바다로 무작정 떠내려 갔을 것이다.

 

 끊어진 닻줄을 보면서 오래전 저 세상으로 길 떠난 아버지를 생각했다몇 해 동안을 병중에 계셨던 아버지는 군대간 쌍둥이 남동생들이 돌아오기만을 학수고대했다그러나 재대 후 한 달만에 큰아이가 멸치잡이 배를 타고 바다로 떠난지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그 사고 이후 아버지는 5개월만에 세상을 떠났다병을 앓으시는 동안 아버지의 닻은 쌍둥이 아들이 되었다건제함을 상실해버린 당신은 이미 그 역할의 배경에서 제외된 사람이었기에… 닻으로의 무게를 행할 수 있었던 시간들은 무용지물이란 걸 알게되면서 기다림은 시작되었다든든한 아들들이 돌아오면 거뜬히 헤쳐갈 닻으로의 역량을 기대하셨고 당신의 병도 나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철석같이 믿었던 그 닻마저 바닷물 속으로 수장되는 순간 그 아픔을 어찌 감당할 수 있었을까?

 

 물질을 하는 동안 물발이 세어 죽을 힘을 다해 헤엄쳐 왔다는 해녀의 경험담은 비일비재하다돌주머니가 사라진 빈줄만 태왁에 매달려 애달픈 이별의 장단처럼 물살에 출렁이었다서로를 바라보는 진정성의 닻에는 아름다운 향기가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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