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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지/김만년

에세이향기 2024. 4. 5. 02:56

둥지 

 

                                                                                                                           김만년

 

까치가 떠났다. 빈 둥지만 덩그러니 놓아두고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졌다. 둥지는 까치 부부가 합심해서 지은 저희들만의 성소였다. 해토 무렵부터 나뭇가지를 총총 뛰어다니며 분분한 수다로 집 지을 궁리를 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우듬지 부근에 견고한 공중 건축물을 축조한 것이다. 까치 부부에게는 오랜 공력을 들여 마련한 신접살림 집인 셈이다. 모진 비바람을 다독이며 털북숭이 새끼들을 키워 온 둥지다. 사람의 심사로 보면 애착이 갈 법도 하건만 까치 부부는 오늘 아침 미련 없이 새끼들을 앞세우고 이소離巢를 감행한 것이다. 한철을 머리맡에서 지저귀던 까치들이 떠나자 문득 알 수 없는 공허감이 밀려왔다.

 이사할 목록들을 정리하며 집 안을 한 바퀴 둘러본다. 몇 올의 햇살들만 들락거릴 뿐 사방이 적막하다. 한 시절 대가족의 온기가 뒤섞여 복작거리던 방들이 휑한 냉기를 품고 있다. 제 몫을 다한 아버지의 장롱이 이빨 빠진 노인마냥 봄볕에 생기를 놓고 있다. 꽉 찬 세간들이 한때는 내 삶의 빛나는 목록이기도 했지만 이제는 폐기처분 될 날만 기다리고 있다. 영원할 것 같은 살붙이들이 불과 몇 년을 사이에 두고 모두 떠났다. 아이들은 성장해서 군대로 갔고 동생들은 제짝을 찾아 새 둥지를 틀었고 가랑잎 같던 아버지도 몇 해 전 산으로 거처를 옮기셨다. 때가 되면 떠난다는 이치를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막상 닥치고 보니 마음이 영 을씨년스럽다. 이 둥지 한 칸을 마련하기 위해서 그토록 안간힘을 써왔던가. 베이비붐 세대들이 다 비슷한 길을 걸어왔겠지만 생각해보면 나는 유독 둥지에 대한 애착이 컸던 것 같다.

 첫 직장을 잡고 아내와 신혼살림을 차릴 무렵 나는 태산 같은 어머니를 잃었다. 편찮으신 아버지와 어린 동생들을 나에게 맡기고 어머니가 가분재기 떠나신 것이다. 나는 졸지에 둥지 잃은 철새 신세가 되었다. 난파선의 선장처럼 맏이란 짐을 지고 망망대해를 건너가야 하는 처지였다. 방 두 개 달린 도회의 셋방에서 일곱 식구의 둥지를 틀었다. 누구보다 아내의 고생이 심했다. 한자리에 앉을 공간이 부족해서 아내는 늘 두 번의 밥상을 차렸다. 기일이면 부족한 잠자리 때문에 친척들에게도 미안했다. 언제나 둥지가 부실했다. 그때부터 나의 둥지 짓기는 시작되었다.

 넓은 평수의 집을 꿈꾸며 살림살이를 여투어 가랑잎 같은 적금을 부었다. 무럭무럭 커가는 아이들처럼 부대끼던 삶 속에서도 희망의 새순들은 조금씩 돋았다. 일곱 번의 주소가 바뀌던 날 처음으로 내 소유의 둥지를 마련했다. 신도시의 아담한 아파트였다. 이사하던 날 아내도 꿈인가 싶어 방글거리고 아버지는 베란다 쪽을 둘러보며 연신 헛기침을 하셨다. 아이들도 좋은지 방과 거실을 우당탕 뛰어다녔다. 처음으로 아이들 방을 따로 만들어 주었다. 구름 띠로 벽지를 장식하고 카키색 책꽂이에 위인전을 꽂아주었다. 우리 부부만의 신혼 아닌 신혼 방도 꾸몄다. 연두빛 장롱을 들이고 베란다에 제라늄과 치자 꽃을 심었다. 비로소 둥지가 완성되었다. 일곱을 실은 쪽배가 풍랑을 헤치고 무사히 항구에 당도한 것이다. 새로 장만한 식탁에서 가족들이 둥글게 앉아 저녁밥을 먹던 날 아내는 눈시울을 적셨다. 생각해 보면 그날이 우리 부부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날이 아니었던가 싶다.

 집은 사람들이 북적대야 훈기가 나는 모양이다. 아내도 요즘 들어 장가간 삼촌들이나 아버지 이야기를 자주 한다. 빈방들을 보며 내심 마음 한쪽이 허전했던 모양이다. 홀시아버지 시집살이가 녹녹치 않았을 텐데 지나고 나면 다 그리움인지 못 해 드린 일만 생각난다며 생그레 눈가를 적신다. 가쟁이 같은 햇살이 아버지의 방을 힐끔 엿보고 간다. 구석구석 내 집착의 손때들이 묻어 있다. 버리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모두가 애착이 간다. 아버지가 쓰시던 돋보기와 낡은 명심보감, 그리고 어느 봄날엔가 손자들에게 썼을 편지들을 챙긴다. 이십 년 동안 버리지 못한 어머니의 자개 상도 다시 닦아 둔다. 훗날 나의 소중한 것들을 아이들도 기억해 줄까. 뜬금없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난다. 그 역시 산자의 위안이고 산자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창밖으로 고층 아파트가 즐비하다. 칸칸이 따뜻한 불빛을 품고 있는 삶의 둥지들이다. 사람들은 저 둥지에서 희로애락을 묻고 살아간다. 둥지에서 밥을 먹고 하루의 위안을 얻으며 일생의 삶을 의탁한다. 둥지를 떠난 삶이란 생각할 수 없다. 모두가 둥지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정착 생활을 하면서부터 둥지의 발달사는 시작된 듯하다. 움집에서 초가와 기와를 얹고 현대에 들어와서 아파트란 구조물이 생겨났다. 소박한 소시민들의 꿈이 깃든 곳, 따뜻한 불빛 아래 가족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하루의 노고를 위무하는 곳이 둥지의 개념이다. 그러나 지금의 아파트는 그와는 거리가 먼 듯하다. 온 나라가 아파트 광풍에 들떴다. “한국인은 중산층에 진입하려면 자의든 타의든 한번은 투기과정을 거쳐야 한다.”며 스스로를 잠재적인 투기꾼이라고 자책했던 어느 시인의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런가도 싶다. 나 역시 행복은 아파트 평수에 비례한다며 일생 그런 둥지를 꿈꾸어 왔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층층이 겹친 저 회색빛 풍경이 오늘따라 낯설어 보인다. 사각의 빌딩에서 사각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각의 둥지에 깃을 내리는 현대인의 슬픈 습성이 아파트 모서리에 짙게 묻어있는 듯하다. 마당 너른 집에서 내 까치발이 무럭무럭 자라던, 그 따뜻했던 둥지를 떠나 나는 결국 저 성냥갑만한 집 한 칸에 닻을 내렸던 셈인가.

 까치는 살 터로 돌아갔다. 더 크고 광활한 자연의 둥지로 귀소歸巢한 것이리라. 지상에서 가장 작은 집 한 칸에 세 들어 살다가 빈 몸으로 돌아간 까치들, 공중에 걸린 까치집이 눈부시게 희다. 인생은 낯선 여인숙에서의 하룻밤과 같다고 했는데, 지금까지 애면글면 움켜쥐어 온 것들이 결국 버리고 비워내야 할 빈방이었던 것일까. 둥지를 맴도는 까치들의 공명음이 자꾸만 내 귓전을 때린다. 언젠가는 아이들도 날개를 파닥이며 이소를 감행할 것이다. 그때쯤이면 나도 홀가분한 삶을 꿈꿀 수 있을까. 어쩌면 내 인생의 덫 같기도 했던, 쓰고 달콤했던 아파트의 여정을 끝내고 까치처럼 대자연의 품에 사뿐히 안착하고 싶다. 낮은 산 도린 곁에 까치집을 틀고 구름발치에 너른 산을 품고 싶다. 아홉 평 채마밭을 일구며 때때로 귀소하는 아이들의 발자국 소리에 귀 기울이고 싶다. 그때는 봉창으로 별들이 총총 뜨는, 하늘의 평수를 넓히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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