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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

그믐 등/백정혜

에세이향기 2024. 4. 5. 03:22

그믐 등 

 

                                                                                                                            백정혜  

 

 길가 허물어진 기와집에 안노인 둘이서만 살고 있다

 

 칠순이 넘은 할머니는 자그마한 몸매와 꼬장꼬장한 자태에 못지않게 칼칼한 성품이시다평생 남의 손을 빌려  단장해 본 적이 없다는 머리는 언제나 참빗으로 빗은 듯 쪽을 찌고 있다삼단 같았다던 머리숱도 이제는 머리 밑이 훤히 드러나고 밤알만한 머리말이의 비녀가 무거워 보인다깨끗한 살결과 단아한 이목구비로 미루어 젊었을 때는 엔간한 미색을 지녔을 것 같았다

 

 거기에 비하면 열 살이나 밑인 다른 노인은 하나에서 열까지 비교가 된다펑퍼짐한 체구에 걸맞게 성질 또한 느리고 눅다깨끔하고 강단 있어 보이는 할머니와는 달리 만사가 태평이다

  

 처음에 그들을 보았을 때 어떤 관계로 인연을 맺고 사는지 짐작이 쉽지 않았다둘은 어느 때 어디서건 그림자처럼 함께 있기 때문에 따로 호칭을 사용하지도 않았다더욱이 하게를 하는 윗노인에게 하대를 쓰는 아랫노인이 불손하다고 느껴질 때면 가늠은 더 어려웠다다만오랜 세월 막역하게 함께 살아온 사람들임은 누구나 알 수 있었다.

 

 군색한 살림살이를 이어 가는 두 할머니의 뒷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시어머니를 통해서였다큰할머니가 털어놓았다는 그들의 관계는 본댁과 작은댁 사이였다딸만 내리 여섯을 낳은 정실이 남편의 심중을 헤아려 차마 못할 노릇을 자청한 결과였다소원했던 아들을 입덧 한번 없이 생산한 작은댁의 유세에 안방을 내주고 말았다는 얘기였다

  

 진작에 알고 있었던 말씀을 하시면서 시어머니는 시종 나의 안색을 살피셨다아직도 생속으로 보이는 며느리가 행여 부정하다거나 기이하다는 내색을 할까 봐 염려했을 것이다딸아이가 얼씬거리면 그때마다 이야기가 끊어지곤 했다그 나이에는 들어서도 알아서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우리 어머니도 내가 딸아이만 했을 때 그러신 적이 있었다점을 보고 오신 날이면 형제들은 궁금증에 몸이 달아 어머니 곁에 다가앉아 점받이의 말을 전해 들었다장래의 일들을 미리 들려주는 어머니도 반쯤 점쟁이 같아 보였고 신기가 느껴지곤 했었다그러다가 내 얘기에 이르면 번번이 흐지부지 끝을 맺고 말았다나중에 들은 바로는내가 족두리를 두 번 쓰지 않으면 남의 소실 노릇 할 팔자를 타고났다는 거였다

 

 점쟁이의 말이 틀렸는지살아오면서 액땜을 했는지 나는 그렇게 살지는 않았다그것이 다행이라든지 아니었더라면 얼마나 불행할까 하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다어떻게든 주어진 인생을 아니 살 수는 없을 터이니까

 

 시어머니의 말씀 이후나는 노인네들의 궁핍한 살림이 몹시 측은해 보였다두 사람이 지고 온 저승빚이 얼마나 무겁고 질기기에 피붙이라곤 없는 집에서 한 몸처럼 살아가는가그들에게서 이제는 애간장을 녹였던 정실의 회한도 대를 이은 소실의 유세도 찾아볼 수 없었다툽상스런 아우와 어진 언니의 투정과 후정만이 여생에 남겨진 정복이었다

  

 어느 날바람같이 집을 나간 대주와 두 노인을 봉양할 형편이 못 되는 아들이 그들을 묶어 놓은 동아줄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을 얻어 가문의 체면은 세웠다지만 본댁의 애끓는 세월과 미욱한 작은댁의 일생을 차마 지켜 줄 수 없어 가출을 택해야 했을까쳐다보고 매달릴 데 없으면 서로 기대고 살리라고 믿었던 것일까.

  

 일없이 툴툴거리고 속없이 웃으며 날을 지새는 두 할머니가 며칠씩 떨어져 있을 때가 있었다달마다 그믐께면 큰할머니는 곱게 치장하고 원행에 나선다제때 보내 오지 않는 생활비를 받으러 여섯 딸과 아들네 집을 한차례 돌아오는 일이다버젓한 자식 하나 없어 손 내밀기가 죽기만 하다면서도 길 나서는 할머니의 모습은 마냥 고왔다.

 

 배웅하는 할머니는 빨리 다녀오라고 채근하지만 그게 쉽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혼자 남은 시간이 무료도 하겠지만 큰할머니의 마음고생을 염려해서일 것이다

 

 집에 혼자 남은 할머니는 외가에 간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 같다대문간을 서성거리다가 골목길을 나서 보지만 마음은 딴전이다한나절 엎드려 배게 난 푸성귀를 솎아내지만 혼자 먹는 밥상에 오르지는 않았다

 

 그런 며칠이 지나면 세금 무서워’ 밝히지 않던 대문간 전등이 켜진다오래 같이 사는 사람의 체취는 바람결에도 느낄 수 있는 걸까으슥하고 쓸쓸하던 골목에 노란 백열등이 켜지는 밤이면 나는 슬픈 전설 한 편을 읽는 듯한 감동에 젖는다어쩌다가 그믐치라도 내리면 우리 집 외등으로 밝기를 보태었다그믐에 더욱 밝게 비치는 그 등은 혼자 남은 할머니의 간절한 기다림이며말로 해 본 적이 없는 깊은 정의 표현이었다

  

 언젠가큰할머니의 원행을 대신할 때가 오면 문간 등을 밝혀 놓고 기다렸던 날들이 행복했다는 걸 생각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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