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수필

어물전에서/손광성

에세이향기 2024. 4. 5. 02:57

어물전에서 

 

                                                                                                                          손광성

 

일요일 같은 날은 고궁을 산책하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아니면 정장을 하고 연주회에 가보는 것은 어떨까. 젊고 멋진 여자랑 함께라면 가슴이 두근거릴 것이다.

 젊었을 때 우리는 폭풍우 속을 우산도 없이 걸었다. 이유 없는 반항과 까닭 없는 울분과 그리고 폭음과 폭언과… 젊은 혈기마저 식어 버린 지금, 필요한 것은 따뜻한 온기와 약간의 생동감이라고나 할까.

나는 외롭고 쓸쓸할 때면 아내를 따라 장보러 가기를 좋아한다. 시장의 물건들은 임자가 따로 없다. 먼저 선택한 사람이 임자요, 사가는 사람이 임자. 게다가 모든 것이 생동감으로 넘친다. 장사꾼들이 외쳐대는 떠들썩하는 소음과 북적거리는 인파의 혼란 속에서 나는 가벼운 흥분마저 느낀다.

 그런 감정은 어물전 앞에서 절정에 이른다. 생선은 도마 위에서 헐떡거리고 비늘을 튀기며 아가미를 벌름거린다. 빨래판보다 더 큰 광어, 상자보다 배는 됨직한 민어, 속살이 빨간 연어, 이런 것들을 보고 있으면 가슴이 뛴다.

 "자, 싱싱한 명태가 500원이요. 500원!" 생선 장수의 갈고리에 꿰어 들린 고기들, 허공을 치는 꼬리에는 아직도 바다의 한 자락이 감겨 있다.

 파도에 밀려오던, 저 비릿한 바닷말의 싱그러운 냄새, 수평선 너머로 잠기는 흰 돛대의 흔들림이 가뭇없이 잡힌다. 양철 함지박 속에서는 미꾸라지들이 기름진 배를 드러낸 채 자맥질을 하고, 게란 놈은 허옇게 거품을 문다.

 온 세상을 숫제 바다로 만들어 버릴 작정인가. 그러나 그건 하나의 위장술이다. 틈만 나면 녀석은 두 눈을 잠망경처럼 빼어들고 슬금슬금 게걸음을 친다. 도망갈 구멍을 찾는 것이다. 그러나 상자의 경계선을 벗어나자마자 주인의 잽싼 손에 잡혀서 도로 상자 속 톱밥에 거꾸로 처박히고 만다. 장난을 치다 꾸중을 들은 아이같이 더없이 부끄러운 표정으로 죽은 듯이 웅크리고 있다. 그러다 얼마 후 다시 비눗방울을 만들어 가지고 논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가자미는 숨을 죽인 채 납작 엎드려서 그 모든 것을 곁눈질한다. 그리고는 옆에 있는 도다리와 넙치에게 말한다.

"뭐랬어, 내가 별수 없댔잖았어." 넙치와 도다리가 입을 삐죽이 내민다.

 종이 상자 속에서는 정렬된 얼룩새우들이 새우잠을 잔다. 사방연속무늬로 말이다. 그들은 늙기도 전에 등부터 굽었다. 바닷속에도 가난과 과로와 좌절의 삶이 있다는 말인가. 완강한 껍데기를 가졌지만 그럴수록 속살은 더없이 연한 조개들, 홍합, 대합, 가리비, 비단조개, 모시조개… 그 가운데 어떤 놈은 술에 곯아떨어진 어부처럼 입을 헤벌린 채 혀를 내밀고 코를 골고 있다.

 소라는 견인주의 철학자 디오게네스, 그의 이동식 주택 속에서 사유의 나선형 계단을 따라 안으로 안으로 침잠하고, 그러다 때로는 바깥 세계를 향해 "뚜우우"하고 나팔을 분다. 장 콕도의 소라들이 일제히 합창한다.

  "그리운 바다의 물결 소리여." 파도 무늬를 닮은 고등어의 등줄기를 넘어 배는 미끄러지고, 땀으로 번들거리는 팔뚝을 한 어부들이 부둣가 선술집에서 소주를 들이켠다.

  "위하여!" "위하여!" 잔과 잔이 부딪치는 소리. 기름이 번들거리는 항구의 선착장에서 과음한 어부들이 토해내는 오물이 흐른다. 멀리 항구를 떠나는 연락선에서 뱃고동 소리가 들린다. 나도 한때 뱃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하지만 나는 꿈을 다 포기한 것은 아니다. 바다는 아직 거기 그렇게 누워서 나를 손짓하고 있다. 나는 이런 떄 속으로 존 메이스필드의 시를 중얼거려도 좋다

  나는 아무래도 다시 바다로 가야겠구나

  그 호젓한 바다와 하늘로 가아겠구나

  높다란 배 한 척과 지향할 별 하나와

  그리고 노래하는 바람, 흔들리는 흰 돛

  그것만 있으면 나는 그만이어라

 내가 이렇게 혼자 도취되어 있는 동안에 아내는 몇장의 낡은 지폐로 살아있는 바다를 사서 담는다. 아내의 흰  손가락에 감겨오는 바다. 도미란 놈은 아직도 헐떡거리고, 게는 신나게 거품집을 짓는다. 얼마나 헐값인가! 아내의 장바구니는 갑자기 싱싱한 생활로 활기가 넘친다. 돌아오는 우리의 뒤를 바다가 기웃거리며 따라온다.

 일요일 같은 날 고궁을 산책하거나 연주회에 가는 것도 멋진 일이다. 하지만 아내를 따라 시장에 가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돌아올 때 어깨에 전해 오는 바구니의 무게에서 느끼는 생활의 중량감을 실감한다. 이런 때 우리는 없었던 식욕을 다시 회복한다.

 

 

 

'좋은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탁설, 공空을 깨우다 / 윤미영  (0) 2024.04.05
그믐 등/백정혜  (0) 2024.04.05
둥지/김만년  (0) 2024.04.05
닻/박말애  (0) 2024.04.05
분꽃/이혜연  (0) 2024.04.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