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2024/04/23 2

사랑길 / 박월수

사랑길 / 박월수 소리 내지 않는 마루를 본다. 솟을대문 높다란 송소고택 큰 사랑채에 딸린 툇마루는 밟아도 소리가 나지 않는다. 쪽문쯤에서 안채 바람벽으로 이어지는 툇마루는 두께가 유난하다. 사랑채에 기거하던 바깥양반이 안채로 밤 나들이 가던 길이란다. 모르긴 해도 가슴이 꽤나 두근거렸을 아름다운 길이다. 아랫사람 눈에 띄지 않으려 부러 그리 만들었단다. 이슥한 밤 사랑채의 툇마루 밟는 소리를 체통을 흐려놓는 소리로 여겼던 옛 양반이 측은해진다. 아흔아홉 칸 저택에서 많은 식솔을 호령하던 양반에게도 드러내 놓고 사랑하는 일만은 허용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남의 눈을 피해 아내마저 은밀하게 만나야 했던 남자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한 집에 살면서도 부부가 떨어져 지내는 마음은 애틋하고 절절했을 게다. 하나 ..

좋은 수필 2024.04.23

숫돌 / 박영순

숫돌 / 박영순 칼을 빼 들어 본다. 칼의 무딘 정도를 손끝으로 직감한다. 칼날이 무뎌진 걸 느끼면 칼 가는 줄로 쓱싹 대충 갈아 사용하는 나이다. 그러나 나의 옛집에서는 매 식사 때마다 찬거리를 썰고 다졌던 칼이 도마 위에서 재료들을 미끄러뜨리면 칼을 들고 장독대로 향해 걸어 나가셨던 엄마가 계셨다. 그곳에서 마음에 드는 항아리 뚜껑 하나를 열어 거꾸로 덮어놓으시고는 뚜껑 테두리에 칼날을 쓱싹 문질러 갈아 쓰셨다. 칼날이 더 무디어지면 툇마루 아래 놓아둔 우리 집의 숫돌이 등장하였다. 숫돌은 아버지의 전유물처럼 칼이나 낫을 갈 때만 우리들 앞에 놓였다. 아버지의 수고로 칼날은 시퍼렇게 번뜩였다. 그런 칼날을 받아 보며 긴장하여 떨던 엄마는 자주 칼날에 베이셨다. “조금만 덜 갈아 주면 될 텐데, 소 잡..

좋은 수필 2024.0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