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2024/04/20 5

그늘의 내력 / 서은영

그늘의 내력 / 서은영 그늘에 들어선다. 산책로를 덮고 펼쳐진 산그늘을 걷는다. 별스러울 것도 없지만 산이 생겨난 이래로 만들어진 깊이이니 태곳적 그늘이라 할 만하다. 등 뒤에서 언제나 나를 따르던 평생의 그림자도 어느새 산그늘이 품은 태고의 것이 되어버린 느낌이 든다. 얼마나 더 걸어 들어가면 나도 저 거대한 원시의 깊이에 가닿을 수 있을까. 내게 흘러들어 나를 이룬 것 가운데 태고가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산기슭을 따라 둘레길이 그리 넓어 보이지 않는 그늘을 품고 숲 사이로 길게 이어진다. 지난 계절도 그 이전의 세월도 쌓였는지 숲길이 짙다. 햇볕을 땅속까지 끌고 들어간 나무들이 빛을 삼킨 뒤 그 나머지를 다시 땅 위로 밀어낸 자국, 날마다 달아나는 햇살과 움켜쥐려 안달인 어둠의 중립지대, 하늘을 만..

좋은 수필 2024.04.20

조각보/피귀자

조각보/피귀자 '밀가루'로 만들면 국수이고 '밀가리'로 만들면 국시라고 운을 떼자 모두들 국수 보다는 국시가 훨씬 정겹고 구수하고 어쩐지 진국 같다고 입을 모은다. 분칠한 여인과 민낯의 수더분한 시골아낙의 조합 같다고나 할까. 뜨거운 여름날 얼갈이배추나 애호박을 숭숭 썰어 넣고 삶은 국시 한 그릇은 끝없이 줄줄 흘러내리는 땀과 함께 더위를 날리기에 충분했다. '이열치열' 더디 끓는 뚝배기 같은 그 맛은 어린 나이에는 도저히 가늠할 수도, 이해되지도 않은 맛이었다. 밀가루와 콩가루를 사대 일 정도릐 비율로 섞어 반죽을 한 동그란 덩어리가 그렇게 요술을 부릴 줄이야. 거칠어진 어머니의 두 손 밑에서 거슬하던 덩어리가 치대고 또 주무르는 경건한 시간의 의식 속에서 윤이 나고 물오른 새색시처럼 새치름해졌다. 홍..

좋은 수필 2024.04.20

개똥벌레 /고윤자

개똥벌레 /고윤자 온몸을 휘감으며 정욕의 불길이 타오른다. 그 불길에 몸속의 세포 하나하나가 툭툭 터지며 황홀경으로 눈을 뜬다. 일순간이나마 속내의 갈등과 고뇌까지도 연소해 버리는 불꽃이다. 숱한 남자에게 몸을 내맡겼던 그녀는 되돌아서며 말한다. 사내들이 돈벌이와 출세를 위해 땀 흘리고 인생의 가시덤불과 유혹이 쳐놓은 낚싯밥에 걸려 괴로워할 때, 자신의 인생은 그런 남정네들을 위한 삶이 아니었겠느냐고. 벌레처럼 살아 온 한세월이었지만, 어둠 속에 빛을 내는 구원의 개똥벌레이었을 순간은 행복했었노라고. 비록 손가락질 받을 인생이지만, 그 맛에 취해 자기에게 주어진 소중한 삶을 방기하고 모독했었다고 털어 놓는 그녀의 목소리에 굴곡이 인다. 그녀는 내가 약국을 하면서 알게 된 춘자라는 이름의 아가씨였다. 스무..

좋은 수필 2024.04.20

녹/이두래

녹/이두래 호미는 죽은 듯 보인다. 꼿꼿한 몸에 고개를 외로 꼬고 누워 온몸은 말라붙은 피로 붉게 물들어 있다. 사람 손에 닳아 반질반질 윤이 났을 호미자루는 잡으면 바스러질듯 거무죽죽하고 촘촘히 갈라졌다. 날이 부러져 버린 곡괭이 자루엔 이름 모를 버섯까지 뿌리를 내렸다. 버섯의 생장은 그들의 죽음을 기정사실화하는 것이다. 곡괭이의 야무졌던 이빨에는 여지없이 말라붙은 핏자국이 선명하고 그들의 죽음은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였을 것이다. 낫이며 쇠스랑, 곡괭이, 호미 등 그것들은 소용되는 시간 외에는 언제나 아래채 처마 밑에 가지런히 걸려 있었다. 그중에서도 제일 맏형 격인 경운기는 아래채 소 마구간에 늠름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소출 많은 상답上沓을 갈고 추수한 곡식들 실어 나르느라 달달거리며 바빴을 경운기..

좋은 수필 2024.04.20

자장가 가수 / 이미영

자장가 가수 / 이미영 나의 자장가는 노동요였다. 쏟아지는 졸음을 이기려는지 뒤척이는 아기를 토닥여주며 부르는 사랑 겨운 노래가 아니었다. 늦은 밤 숨이 멎을 듯이 울어대는 아기를 들쳐업고 엉덩이를 두들겨 가며 부르던 억지 노래였다. 말이 통하기는커녕 목청만 돋우는 아기에게 짜증을 더해 불러주던 노래였다. 토막잠을 자다 깨다 하는 날이면 아무 일도 하지 못하기에 어떻게든 재워보겠다고 부르던 한숨 섞인 노래였다. 업었다가 다시 안았다가 팔이 저려서 더는 품에 둘 수 없을 때 작은 흔들의자에 태우고 발로 밀어 주었다. 새벽녘에도 잠 못 들고 빤히 쳐다볼 때면 멀미가 나도록 요동시켰다. 목소리는 갈라지고 더 이상 노래가 안 나올 무렵이면 아기는 버티지 못하고 스르르 눈을 감았다. 역정이 나서 흔들어 대는 통에..

좋은 수필 2024.0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