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2024/04/12 4

성당 가는 길/ 이명지

성당 가는 길/ 이명지 "야는 그럴 아가 아이다! 성당에 다니는 아는 나쁜 짓을 안 한다" 그때 내게 족쇄 하나가 철커덕 채워졌다. '성당에 다니는 애, 그래서는 안 되는 애'가 되는 순간이었다. 내가 성당이 두려워진 건 그때부터지 싶다. 엄마는 우리 마을에서 유일한 신자였다. 늘 일손이 부족한 농촌인데도 일요일이면 깨끗한 한복을 차려입고 성당엘 갔다. 그것은 파격이었다. 시골 사람들은 그런 엄마를 두고 겉멋이 들었다느니, 바람이 났다느니 말이 많았다. 심지어 그걸 허용하는 아버지를 대놓고 비난하기도 했다. 엄마는 사람들의 입방아가 신경 쓰였는지 막내인 나를 데리고 성당에 다녔다. 어린 내 눈에도 엄마는 참 고왔다. 평소에는 때 묻은 무명옷에 머리에 흰 수건을 쓰고 농사일을 하던 엄마가 성당에 가는 날이..

좋은 수필 2024.04.12

소리 풍경/허정진

소리 풍경 허정진 깊은 산속 농막에서 몇 년간 지내본 적 있었다. 산 아래가 훤히 내려다보여 전망은 그지없이 좋았지만 이웃도, TV도 없는 한적한 곳이었다. 사계절 내내 오직 자연의 소리밖에 없었다. 숲속 계곡물 흘러가는 소리, 바람이 여울져 휘감는 소리, 겨울 나뭇가지 뚝뚝 부러지는 소리, 지둥 치게 울어대는 풀벌레 소리, 산장 주위를 배회하는 산짐승 소리, 멀리서 풀국새 울고 장꿩 퍼덕이는 날갯짓 소리까지 들렸다. 더 마음을 집중해서 귀를 기울이면 그들만의 낮은 주파수 소리마저 들리는 것 같았다. 꽃이 피고 지는 소리, 해토머리 나무줄기에 물오르는 소리, 겨울밤 함박눈 내리는 소리 같은 것들. 그 소리를 온전히 들을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고요와 여유 덕분이었다. 한편으로는 도시 소리가 그립고 궁금하..

좋은 수필 2024.04.12

오늘도 봄동/정옥순

오늘도 봄동/정옥순 봄동 겉절이를 했다. 정성껏 씻어 소금에 살짝 절여 물기를 빼고 액젓에 불린 고춧가루를 넣고 마늘도 다져 넣었다.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봄동아,/볼이 미어터지도록 너를 먹는다//오랜만에 팔소매 걷고 밥상 당겨 앉아/밥 한 공기 금세 뚝딱 해치운다만/네가 봄이 눈 똥이 아니었다면/…너처럼 당당하지 못하고...’ 봄동을 ‘봄’이란 강아지가 쪼르르 길 가다가 눈 연둣빛 똥이라고 노래한 시인의 정취에 웃음이 절로 난다. 봄동을 좋아하는 나도 시인처럼 봄동만 보면 밥상 당겨 앉아 밥 한 공기 뚝딱 해치운다. 마지막 ‘너처럼 당당하지’라는 구절이 나의 심장을 뛰게 한다. 나도 한때 봄동처럼 당당하게 추운 삶을 맞이했던 때가 있었다. 김장철이 끝난 후 결혼했다. 직장 때문에 남편과는 주말부부로..

좋은 수필 2024.04.12

골목의 표정/황 인 숙

골목의 표정/황 인 숙 서울의 골목을 구경해 본 코끼리는 이제까지 한 마리도 없을 것이다. 트럭만큼 큰 어른 코끼리는 골목의 초입에서부터 양편 담벼락에 꽉 낄 것이다. 골목을 들여다보기만 해도 폐쇄 공포를 느끼겠지. 여태 한 번도 서울의 골목을 본 적 없는 서울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은 우리 동네의 미로 같은 골목을 보면 코끼리처럼 폐쇄 공포를 느낄지 모른다. 구불구불, 울퉁불퉁, 다닥다닥, 옹기종기, 좁넓이도 높낮이도 짧길이도 들쭉날쭉, 어떤 집들은 높다란 축대 위에 껑충 다락처럼 올라가 있고 어떤 집들은 기슭을 따라서 흘러내리듯 서 있다. 지형 생긴 대로 생긴 집들. 골목은 자연 발생적인 주거 공간이다. 생각해 보면 도심 중의 도심인 남산 기슭을 마음도 몸도 가난한 사람들이 지킬 수 있었던 건..

좋은 수필 2024.0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