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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의 표정/황 인 숙

에세이향기 2024. 4. 12. 03:33

   골목의 표정/황 인 숙

 

 서울의 골목을 구경해 본 코끼리는 이제까지 한 마리도 없을 것이다. 트럭만큼 큰 어른 코끼리는 골목의 초입에서부터 양편 담벼락에 꽉 낄 것이다. 골목을 들여다보기만 해도 폐쇄 공포를 느끼겠지. 여태 한 번도 서울의 골목을 본 적 없는 서울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은 우리 동네의 미로 같은 골목을 보면 코끼리처럼 폐쇄 공포를 느낄지 모른다.

 

구불구불, 울퉁불퉁, 다닥다닥, 옹기종기, 좁넓이도 높낮이도 짧길이도 들쭉날쭉, 어떤 집들은 높다란 축대 위에 껑충 다락처럼 올라가 있고 어떤 집들은 기슭을 따라서 흘러내리듯 서 있다. 지형 생긴 대로 생긴 집들. 골목은 자연 발생적인 주거 공간이다.

 

생각해 보면 도심 중의 도심인 남산 기슭을 마음도 몸도 가난한 사람들이 지킬 수 있었던 건 판판 대로를 낼 수 없었던 지형 조건 덕분인 것도 같다. 청계천같이 편편한 곳에 살던 사람들은 일찌감치 뿌리 뽑혀 나갔다. 아파트야말로 몸도 마음도 닫힌 공간이다. 그 넓고 반듯한 우리에 갇혀 사는 사람들이 골목 동네를 좁다고 답답해하는 건 뭘 모르는 소치다. 골목 안 사람들은 골목 전부를 자기의 공간으로 여기며, 실제 사용하기도 하며 산다. 골목은 품이 넓다.

 

골목은 어떤 사람들이라도 받아들여 품고 산다. 우리 동네에서는 요새 먼 나라에서 온 사람들도 종종 눈에 띈다. 중국집에서 자장면을 먹고 있을 때 가무잡잡한 여인네가 들어와 손짓발짓을 섞어 주인에게 뭔가 하소연하는 걸 본 적이 있다. 근처 반지하방에 이사 온 새댁인데 보일러가 작동되지 않아서 찾아왔다고 한다. 중국집 주인이 방을 소개한 걸까. 아니면 그새 중국집에 단골이 된 걸까. 동남아시아에서 온 그녀가 우리 동네에서 행복했으면 좋겠다. 우리 동네를 제2의 고향이라고 생각하게 했으면 좋겠다.

 

저마다 모르는 곳에서 와 한동네에 모여 사는 이들. 우리는 상징 아래 산다. 이 동네 어디에서도 보이는, 밤이면 서울에서도 가장 휘황찬란한 빛을 뿜어내는 서울 타워가 그녀에게도 위안이 되고 자랑이 됐으면 좋겠다. 골목마다 동네마다 표정이 있는데, 서울 타워는 우리 동네의 표정을 환하게 하는 보조개이다.

 

우리 동네의 한 골목은 입구에 ‘운전 미숙자 진입 금지’라는 팻말을 달고 있다. 차 한 대가 어렵사리 지나갈 만한 폭의 그 길에 주차할 곳을 찾아 들어서는 자들이 많은가 보다. 기어이 들어선 차들이 종종 담벼락을 긁거나 부수나 보다. 골목에 버티고 선 자동차만큼 추해 보이는 자동차는 없다. 골목에서 보이는 차는 이물스럽다. 그것이 놓일 곳이 나니기 때문이다. 골목은 그 골목 사람들의 로비이자 라운지다.

 

무더운 여름이면 골목에 돗자리가 깔린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수박을 먹기도 하고 밥상을 차리기도 하고 텔레비전을 보기도 한다. 심지어는 아무 경계심 없이 드러누워 코를 골기도 한다. 강아지도 한몫 거든다. 비좁은 집 안보다 넓은 곳을 좋아하는 강아지는 주인 식구들과 더불어 오랜 시간 바깥에 나와 있는 것에 살판이 난다. 벅찬 기쁨을 감당하지 못하겠다는 듯 쌩하니 골목을 내달았다가 급회전해서 돌아오고 다시 내닫기를 되풀이하는 꼴을 보면 웃음이 터진다. 밤이 이슥해지면 어떤 개는 자기 주인의 등 뒤에 바짝 붙어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잠을 청한다.

 

옛날 옛적 내가 살던 그 골목이 생각난다. 보안등이 밝혀진 전봇대 아래에 모여 꼬마들이 떠들썩하니 뛰놀고, 할아버지들은 구멍가게 앞에 놓인 평상에 걸터앉아 부채질하고 계셨다. 이제 막 여중생이 된 소녀들은 흰 갓 씌운 전구가 매달린 대문 앞에 돗자리를 깔고 모여 팝송을 배운다. 그 골목에서 우리들은 반쯤 형제자매였으며 반쯤 한가족이었다.

 

개들도 빠질 수 없다. 한 골목 개들은 저희끼리 친하여 사람에게도 반가이 꼬리를 치는 것으로 이웃임을 알아보는 친밀감을 드러낸다. 개가 있는 풍경은 얼마나 정겨운가. 개들은 사람들의 삶에 화기와 활기를 더한다. 개가 있는 집과 개가 없는 집은 다르다. 개가 있는 골목과 개가 없는 골목도 다르다. 며칠 전 옆 골목을 지나오는데 돌을 갓 지낸 듯한 여자 아기와 할머니가 어느 집의 굳게 닫힌 대문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아기가 혀 짧은 목소리로 개를 부르는 듯한 소리를 내자 대문 밑 좁은 틈으로 개 주둥이 끝이 삐죽 나왔다. 그러자 아기는 꺅꺅 소리를 치며 발을 동동 구르면서 좋아했다. 개는 짖지도 않고 주둥이를 힘껏 내밀고 있었다.

 

골목 안 사람들은 골목에서의 만남을 통해 정을 쌓고 연대감을 다진다. 골목은 그 골목 사람들이 거의 집처럼 느끼는 공간이다. 우리는 골목에 나서며 외출복으로 갈아입지 않는다. 할아버지들은 러닝셔츠 차림으로 다니기도 한다. 낯선 사람이 지나가도 부끄럽지 않다. 오히려 그가 골목 안 사람들만의 공간에 발을 들여놓은 셈이기 때문이다.

그 골목에 사는 사람들만이 회 떨어진 벽의 허름함도 개의치 않고 생활에 지친 몸을 거기 기댄다. 골목은 삶의 공간이다. 골목에서는 노인도 어린이도, 짐승도 꽃도 안전하다. 골목에서는 많은 사람이 산다. 그 사람들이 골목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 같을 수는 없다. 어떤 사람은 골목에서의 삶을 정겹게 느낄 것이고, 다행스럽게 여길 것이다. 그런 사람들의 골목은 외롭지 않다.

 

반면 또 어떤 사람은 골목에서의 삶을 옹색함으로, 하나의 실패로 느낄 것이다. 그는 이 골목을 벗어나 사는 것을 성공으로 생각할 것이다. 언제고 골목을 벗어나고 싶어 할 것이다. 그 모든 삶을 품고 골목은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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