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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마의 마음/윤승원

에세이향기 2024. 4. 6. 05:33

처마의 마음 

 

윤승원

 

  

   기어코 비가 쏟아지고 말았다. 잔뜩 찌푸린 하늘이 수상해 서둘러 하산을 했는데도 주차장에 닿기 전 비를 만나고 만 것이다. 염치 불구하고 길가 집으로 뛰어들어 툇마루에 앉아 비를 그었다.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빗물이 댓돌 아래 마당에 일렬횡대로 마침표를 찍고 있었다. 처마는 혹 내 신발에 흙탕물이라도 튀길까봐 제 몸을 마당 쪽으로 한 뼘 더 길게 뻗어 빗물을 받아내고 있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처마의 마음이다.

 

   처마의 존재를 잊고 지내다가도 이렇듯 비를 그을 일이 있으면 그 존재가 새삼스러워지는 것이다. 처마라면 단연코 초가집처마다. 물론 버선을 신은 듯 공중으로 제 생각을 살짝 치켜 올리는 날렵한 기와집처마도 있고 떨어지는 빗물을 그대로 흘려 보내는 성격이 급한 슬레이트집처마도 있지만 초가집처마만큼 정겹진 못하다. 초가집처마는 아무리 센 빗줄기라도 제 안에서 그 열정을 충분히 삭힌 후 흘러 보내는 것이다. 처마 끝 볏짚들이 빗방울을 머금고 있는 풍경은 흡사 보석을 주렁주렁 매단 것처럼 보인다. 그 물방울들에 햇살이 비치기라도 하면 처마는 제 폼을 한껏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 공중으로 목을 빼곤 하는 것이었다.

 

   내가 어릴 적 살았던 초가집 처마는 품이 넓고 컸다. 기와집에선 보기 흉하다며 광이나 헛간에 있어야 할 농기구들조차 우리 집에선 처마아래 두었다. 쟁기며 가래, 쇠스랑, 호미, 풍구들이 나란히 걸려 있는 처마의 풍경은 박물관의 진열대 같았다. 그건 또 우리 집의 가난한 살림살이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해서 친구들이라도 찾아오면 나 혼자 괜히 부끄러워하기도 했다. 그것뿐이랴. 처마는 철따라 마늘이며 곶감, 메주들을 걸어놓고 삼대가 함께 사는 가난한 대가족 살림을 한 마디 불평 없이 꾸려가는 것이었다. 살림살이가 나을 때면 처마 밑은 넉넉했고 살림살이가 좀 못할 때면 처마 밑엔 궁기가 돌았다. 그래서 처마는 그 집안의 살림살이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지붕이 도리 밖으로 내민 부분인 처마는 한 치라도 더 집을 보호하려는 지붕의 마음씀씀이가 은근하게 드러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처마는 혹여 집안으로 곧바로 들이칠 눈, 비나 햇살을 막아주는 훌륭한 호위병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지붕은 처마에서 그 의미가 완성된다 할 수 있겠다. 아파트나 빌딩 같은 요즘의 건물들에선 처마를 볼 수가 없다. 따뜻한 처마를 거세당한 도시는 그래서 더욱 황량하고 비정하게 보이는 지도 모른다. 처마가 없어졌다는 건 타인에 대한 배려가 없어졌다는 것이고 그러한 배려가 고갈된 사회야말로 개인주의와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처마만큼 오지랖이 넓은 것이 또 있을까! 비가 올 때는 물론이거니와 저녁이 되면 마당에 널어놓은 곡식들이며 빨래들도 제 안으로 거두어들인다. 그뿐이랴. 처마 아래로 날아든 새에게 둥지를 내어주기도 하고 거미며 벌레들에게까지 집을 분양해준다. 그러나 제 품에 들어 온 것이라고 처마는 그것을 소유하려하지 않는다. 들어올 때 내치지 않는 것과 같이 나갈 때도 서운하다 말 한마디 하지 않는 것이다.

 

   초등학교 다니던 때였다. 하교 길에 갑자기 비를 만났다. 다른 엄마들은 모두 우산을 들고 와 친구들을 데리고 갔지만 나는 엄마가 올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엄마는 농사일로 언제나 바빴던 것이다. 남의 집 처마 아래서 비를 긋는데 비는 그치지 않고 기다리다 지친 나는 무릎에 얼굴을 묻고 깜빡 잠이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누군가 어깨를 두드려 깨우는데 돌아보니 엄마였다. 밭에 나갔다 내가 걱정되어 대충 비설거지를 하고 달려 왔다는 것이었다. 엄마의 등에 업혀오면서 나는 엄마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훌륭한 처마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모든 사물은 저마다의 처마를 가지고 있다. 사람의 얼굴에도 처마가 있다. 눈에 땀이나 티가 들어가지 않게 눈을 보호하는 눈썹은 얼굴의 처마일 것이다. 꽃받침은 꽃의 처마다. 깃은 새들의 처마이고 구름은 비의 처마이다. 고갤 들어보니 건너편 집 감나무에 몇 남은 홍시가 눈에 들어왔다. 아마 까치밥으로 남겨둔 것이리라. 다  떨궈 내지 않고 홍시 몇 개를 남겨둔 감나무의 마음이야 말로 감나무의 처마일 것이다.

 

   그러니 처마야말로 이타의 삶을 사는 것이다. 처마는 결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다. 처마가 없다면 비, 바람은 방으로 곧바로 들이칠 것이고 마루는 방밖으로 나가지 못할 것이며 댓돌은 또 신발을 얹어놓지 못할 것이다. 새와 벌레들은 집을 잃어버릴 것이고 농기구들은 캄캄한 광에 갇혀 버릴 것이다. 무엇보다 처마가 없다면 지붕은 어떻게 자신을 부드럽게 완성할 수 있을 것인가?

 

   경주박물관에 가면 얼굴 수막새가 전시되어 있다. 수막새는 기와집의 처마 끝 수키와 끝에 붙이는 막새를 말한다. 신라여인의 얼굴을 한 이 수막새는 어느 도공이 자신의 아내나 아니면 어머니를 그리는 마음을 수막새에 새겼으리라. 꽃이나 동물 모양의 수막새가 여럿 발견되는 것에 비해 얼굴모양의 수막새는 한 개 밖에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희소가치의 소중함뿐만 아니라 그것이 만들어진 이유에 대해서도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처마 끝에 막새를 걸어놓고 이 도공은 삶의 고비 때마다 위로를 얻었으리라. 지붕 끝에서 그윽하게 세상을 내려다보며 지붕 아래에 있는 것들의 상처를 치유해주는 것, 그것이 처마의 마음인 것이다.

 

   가을비는 짧아서 어느새 하늘은 개어 있었다. 살면서 내게 처마가 되어 주었던 사람들의 얼굴이 물방울처럼 처마 끝에 맺힌다. IMF 당시 남편의 사업실패로 실의에 빠져 있을 때 선뜻 거금을 빌려주었던 이웃집 아주머니, 힘들 때마다 찾아가서 하소연을 해도 가만히 들어주는 친정엄마, 부족한 것이 많아도 이해해주는 가족들. 이 모든 것들이 다 내겐 더할 수 없이 소중한 처마다. 살아가면서 나도 누군가에게 처마 같은 사람이 되어야겠다. 금방이라도 공중으로 날아오를 듯 날개를 활짝 펴는 처마 끝에서 새의 날갯짓 소리가 들려온다. 올려다보니 동쪽 산봉우리 위로 둥글게 하늘의 처마 같은 무지개가 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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