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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가는 길/ 이명지

에세이향기 2024. 4. 12. 09:00

성당 가는 길/ 이명지

"야는 그럴 아가 아이다! 성당에 다니는 아는 나쁜 짓을 안 한다"
그때 내게 족쇄 하나가 철커덕 채워졌다. '성당에 다니는 애, 그래서는 안 되는 애'가 되는 순간이었다. 내가 성당이 두려워진 건 그때부터지 싶다.

엄마는 우리 마을에서 유일한 신자였다. 늘 일손이 부족한 농촌인데도 일요일이면 깨끗한 한복을 차려입고 성당엘 갔다. 그것은 파격이었다. 시골 사람들은 그런 엄마를 두고 겉멋이 들었다느니, 바람이 났다느니 말이 많았다. 심지어 그걸 허용하는 아버지를 대놓고 비난하기도 했다. 엄마는 사람들의 입방아가 신경 쓰였는지 막내인 나를 데리고 성당에 다녔다. 

어린 내 눈에도 엄마는 참 고왔다. 평소에는 때 묻은 무명옷에 머리에 흰 수건을 쓰고 농사일을 하던 엄마가 성당에 가는 날이면 단벌 외출복인 화사한 참꽃 빛 한복을 입었다. 

동백기름을 발라 차르르 윤기 나게 쪽 찐 머리는 담벼락에 붙은 영화 포스터의 최은희 배우보다 예뻐 보였다. 짚수세미로 깨끗이 닦아 신은 하얀 고무신은 시골 황톳길에 금방 먼지가 탔지만 엄마의 눈부신 자태를 가리진 못했다.

주일 아침이면 엄마는 잠도 덜 깬 내게 그중 깨끗한 옷을 골라 입히고 머리를 빗겼다. 엉킨 곱슬머리가 자꾸 엄마의 빗 손길에 기울어지면 가만 좀 있으라며 콩, 머리를 쥐어박았다. 이것도 내가 성당에 가기 싫은 이유 중 하나였다.

성장을 한 엄마가 내 손을 잡고 길을 나서면 일찍부터 논밭에서 일하던 마을 사람들이 허리를 펴고 쳐다보았다. 어떤 이는 "성당 가능교!"하며 아는 체를 하고, 어떤 이는 입을 삐죽거렸다. 

하지만 엄마는 당당했다. 하느님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그 길은 엄마가 유일하게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는 시간인 듯했다. 아버지는 같이 성당에 가진 않았지만 엄마의 신앙을 묵인하는 것으로 지원했다. 사실 곱게 차려입은 엄마를 보는 게 싫지 않았던 것 같기도 했다.

위로 두 오빠는 일 년에 딱 한 번 크리스마스 때에만 성당엘 갔다. 주일만 되면 엄마가 성당에 가자고 할까 봐 일찌감치 내빼던 오빠들이 그날은 군소리 없이 따라나섰다. 성당에서 빵과 선물을 주는 아기 예수님의 탄신일이기 때문이다. 

성가를 모르는 오빠들은 남들이 성가를 부를 때 자신들은 애국가를 불렀다면서 돌아오는 길에 엄마 몰래 키득댔고, 나는 잽싸게 엄마에게 일러바쳤다. 하지만 엄마는 빙그레 웃을 뿐 오빠들을 야단치지 않았다. 그때도 오빠들이 그랬다. 성당에 다니는 애가 그러면 못 쓴다고. 

나도 정말 성당에 가는 게 싫었다. 숨 막히게 엄숙한 미사 시간을 견디는 것도 그렇고, 엄마가 차비를 아끼려고 초등학교 2학년이나 되는 나를 아직 학교도 안 들어갔다고 버스 차장 언니와 실랑이를 벌이는 것도 창피했다. 

성당에 다니는 엄마가 저래도 되나? 혼란스럽기도 했다. 그래도 집에 올 때 정류장에서 사주는 따끈한 찐빵 맛은 매번 주일 아침잠을 깨우는 미끼가 되곤 했다.

우리 마을 최초 신자인 엄마가 성당에 다니게 된 연유를 노년기를 보내고 있던 엄마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갱년기를 앓고 있던 당시 엄마는 인생에 대한 회의가 컸다고 했다. 자꾸만 삶이 무의미하고 공허해지는 마음이던 어느 날 읍내장에 갔다가 길가에 뿌려진 전단지 한 장을 주웠다고 했다. 

거기에 '하느님의 나라에는 구원과 평화가 있다'고 쓰여 있는 걸 보고 그길로 성당에 찾아갔다고 했다. 그때부터 엄마는 우리 마을에서 깨어있는 신여성의 이미지가 되었다.

우리 마을에는 아들을 바라며 딸만 일곱을 내리 낳은 종말이네가 있었다. 어느 날 종말이 엄마가 엄마를 찾아와 아주 조심스럽게 성당에 가서 기도하면 아들을 낳을 수 있을까를 물었다. 엄마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나는 모르지만 종말이 엄마는 그다음 주일부터 엄마를 따라 성당에 다녔다. 성당에 나가고도 여덟 번째 또 딸을 낳자 종말이 엄마는 더는 성당에 나가지 않았다. 

나와 동갑내기인 종말이는 또래보다 좀 늦되던 아이여서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기도 하고, 고무줄놀이나 공치기도 잘하지 못해 아이들이 끼워주지 않았다. 그날도 우리는 하교길에 가위바위보로 책가방 들어주기를 했는데 종말이가 지는 바람에 네 개의 가방을 다 들게 됐다. 

사실 우리는 종말이가 꼴찌를 할 것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언제나 한 박자 늦는 종말이는 이런 게임에서 늘 술래가 되었다. 다른 놀이에는 끼워주지 않던 아이들도 가방 들기 게임에는 꼭 종말이를 끼워주었다.

우리는 종말이에게 가방을 모두 떠맡겨 놓고 가뿐한 몸으로 강가로 먼저 뛰어가 물장난을 치며 놀았다. 그날따라 뙤약볕에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날이었다. 종말이는 한참 후에야 강가에 다다랐다.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얘진 종말이는 우리 앞에 가방을 던지다시피 놓고는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우리는 종말이에게 물을 끼얹으며 장난을 쳤다. 하지만 기진맥진한 종말이는 그 물을 고스란히 다 뒤집어쓴 채 꼼짝않고 앉아 있었다.

다음날 종말이는 학교에 오지 못했다. 그날 더위를 먹은 종말이가 심하게 앓았다는 걸 우리는 나중에야 알았다. 마을에서 사납기로 소문난 종말이 엄마가 종말이를 앞장세우고 그날 가방을 들게 한 아이들 집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야단을 쳤다. 

마지막으로 우리 집에 당도한 종말이 엄마는 잔뜩 겁먹은 내 앞에서 오히려 종말이를 나무라며 "야는 그럴 아가 아이다. 야는 성당에 다니는 아라 그런 나쁜 짓은 안 한다" 하고는 그냥 돌아서 갔다. 어리둥절한 건 나뿐이 아니었다. 엄마 손에 이끌려 가며 뒤돌아보던 종말이의 눈빛에 가득한 억울함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그런 애가 아니다. 아니어야 했다. 그날 종말이 엄마가 채워준 족쇄는 오빠들이 채운 족쇄와는 그 무게가 달랐다. 나는 그때부터 평생 착한 아이 콤플렉스에 시달려야 했다. 그것은 지킬 수 없는 금단의 열매여서 언제나 나를 미혹에 시달리게 했고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게 했다. 

그런데 우연히 이걸 극복하는 계기가 생겼다. 취미로 화실에서 그림을 그렸는데 어느 날 자화상을 그리다 문득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다. 페르소나, 그림자, 가면, 인간의 두 얼굴... 인간이 가진 얼굴이 어찌 두 개뿐일까! 생각해 보니 내 안에는 셀 수 없이 여러 얼굴이 있었다. 

맞다. 나는 그럴 애이기도 하고, 그렇지 않을 애이기도 했다. 그래 그 모두가 나였다. 무엇이 문젠가! 그게 인간인데, 나라는 인간인데, 그래서 그 부족함 때문에 오늘도 돌아보고 뉘우치고 속죄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자화상에다 당당하게 두 얼굴을 그렸다. 그럴 애와 그렇지 않을 두 얼굴을 그려 넣었다. 그리고 처음 생각했던 '페르소나'라는 제목을 이렇게 바꿔 달았다. '그래서 뭐!'

성당에 가는 길은 여전히 어렵다. 자신과의 싸움이다. 평생을 냉담과 회심을 반복하며 흔들리고 또 흔들린다. 하지만 엄마가 가르쳐준 성당 가는 길을 마음에서 완전히 잃은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지금 나의 기도는 단 하나다. 그분께 가는 길을 더는 잃지 않게 해달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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