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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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

내가 하나의 풍경이 되려면 / 김 애 자

에세이향기 2024. 4. 15. 09:40

내가 하나의 풍경이 되려면 / 김 애 자

지금은 봄이다. 대지는 신생하는 것들의 기운으로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이럴 땐 강가로 나가는 것이 좋다. 이랑져 흐르는 물결 위로 굴절하는 빛의 눈부심, 볼에 와 닿는 상큼한 바람결이 다함없다.
강변에 깔린 마름 갈대들의 음률도 들을만하다. 그 어떤 악기가 겨우내 살을 깎아내고 육탈한 뼈들끼리 서로를 껴안고 부르는 조곡弔哭을 연주 할 수 있었던가. 강물이 뒤척이는 에로틱한 신음까지를.
청둥오리와 도요새들이 끼리끼리 모여 부리로 제 깃을 다듬는다. 더러는 머리를 날개 죽지에 파묻고 조는 놈도 있다. 이제 저 새들은 곧 남한강을 떠날 것이다.
나는 깍지 낀 손으로 무릎을 감싸고 눈을 감는다. 그러면 강변의 풍경 속으로 들어가 있는 내가 보인다. 자신을 자연 속에 밀어 넣고 바라보고 있으면 나의 진정한 정체正體를 확인할 수 있다. 이래서 인디언들은 아이들을 키우면서 자주 평원이나 산림 속으로 들어가 홀로의 시간을 갖도록 배려했던 모양이다. 최소한의 먹을 것을 가지고 열흘 이상씩 무리에서 떨어져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했다는 그들만의 성인의식이 현대인들을 부끄럽게 한다. 명상을 통해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를 확연히 깨닫게 했던 것은 그 깨달음이 인간이 살아가는데 가장 필요한 정체 찾기와 중심잡기였던 것이다. 가끔 그들이 남긴 말에 밑줄을 긋고 몇 번씩 재독한다.
"홀로 자기 자신과 만나는 시간을 오랫동안 갖지 못하 사람은 그 영혼이 중심을 잃고 헤매게 된다"
나 역시 그들처럼 자연으로의 잠행을 통해 삶의 중심잡기에 들어간다. 자연의 품에 안겨 자신을 바라보면 실재의 상황과 현재의 모습이 바로 보이기 때문이다. 빛 가운데서 빛을 보기보다는 그늘에서 햇빛을 보아야 그 빛이 더 돋보이는 것과 같은 소이일 것이다. 홀로 바라본 나의 자화상은 밤기차를 타고 먼 여정에서 돌아오는 모습과 다름없다. 먼지 낀 차창에 어린 자기 모습을 보고 비애와 회한을 느끼지 않을 사람 어디 있을까.
하나 이러한 모습은 도처에서 사는 숱한 사람들의 또 다른 모습이기도 하다. 어제와 오늘을 판 박아 놓은 것과도 같은 일상의 반복이란 얼마나 권태로운가. 그러함에도 어느 날 문득 지나간 날들을 돌이켜 보면,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이 살아온 나날들마저 한없이 빠르게 지나갔음을 발견하게 된다. 순간 허탈감과 아쉬움이 뼈에 사무친다. 권태로운 일상일망정 그것이 삶의 근간을 이루는 진실한 것들이었음을 자각하는 것이다. 비로소 도요새가 제 부리로 제 깃을 다듬듯이 자신의 부리로 버려야 할 것과 포기해야 할 것을 쪼아내고 회한으로 얼룩진 깃을 다듬는다. 그러고 나면 삶의 무게가 한결 가벼워진다.
지금 나는 노년의 중간지점에 와 있다. 굳이 외진 산협으로 돌아온 것은 자연의 일부로 조용히 살다가 떠나서 싶어서였다. 그리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상도 하나의 풍경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극히 사소한 일이었으나 산협으로 들어와 두 번째 겨울을 맞던 그날의 일은 내 삶의 전환을 가져다 줄 만큼 획기적인 사건에 가까웠다.
눈발이 난분분한 저녁 무렵이었다. 산맥을 타고 넘어오던 바람도 숨을 죽인, 자욱하게 퍼붓는 눈발만이 그저 아득할 뿐이었다. 며칠간 코피가 터지도록 독감을 앓고 난 끝이라 부르튼 입술에 맺힌 물집까지 근질거려 밖으로 나와 본 풍경은 그러했다. 책상 위에다 받아 놓은 두 통의 원고 청탁서가 마감날짜를 넘겨 목을 조르던 초조함도 일시에 사라졌다.
군불로 지펴놓은 낙엽송 향이 코끝에 스몄다. 탁탁 소리를 내며 타오른 불길과 연기가 고래 깊숙이 흘러들었다. 고래로 흡입된 연기는 굴뚝을 타고 위로 솟구쳤다가는 스멀스멀 아래로 내려와 산허리를 감았다. 산허리를 감고 흩어지는 연무煙霧속에 그가 서 있었다. 백발이 성성한 그는 뒷짐을 지고 산 밑에서 눈발이 흩날리는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망연함은 차라리 무위자연無爲自然하였다.
나도 자연한 풍경 속으로 걸어가고 싶었다. 걸어가선 연인처럼 뒤에서 그를 껴안고 등에 얼굴을 묻고 싶었다. 그러나 그냥 바라보기만 했다. 오랜 세월을 사랑하고 신뢰하면서 함께 늙어온 순정이 눈물겨웠다. 너무도 눈물겨워 장독대 앞에서 그가 돌아설 때까지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고 나 또한 자연한 풍경 속의 인물로 서 있었던 것이다.
그날 이후로 사람도 하나의 풍경을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가능한 자연을 배경으로 하되 홀로 있는 그림일수록 더 좋았다. 두뇌의 잣대로 물리적인 현상을 판단하는 것보다 가슴으로 느끼는 아름다운 것들과 만나고 싶었고, 그 무위한 아름다움이 거친 내 삶을 매만져 주었다.
봄이 오고 있다. 이미 남녘에선 매화가 피었다는 꽃소식이 들려온다. 이곳 남한강 가에도 육탈한 뼈들이 서로를 껴안고 부르는 마른 갈대들의 조곡을 제치고 새싹들이 여릿여릿 머리를 내밀고 있다. 순환하는 자연의 지순한 기운을 폐부 깊숙이 호흡한다. 언젠가 적멸로 향하는 길도 이와 같았으면 좋겠다.

 

                                                                               새와 시인의 마음 / 김 애 자

 

절기의 변화는 날짐승이 먼저 안다. 양지쪽에선 어린 새싹이 묵은 풀잎을 헤치고 조심스럽게 얼굴을 내밀지만, 그건 겨우내 어미뿌리에서 피가 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북향인 앞산에는 군데군데 잔설이 남아 있고, 가랑잎 속에 박힌 멍든 얼음도 그대로인 것으로 보면 아직 봄이라고 하기엔 이른 편이다. 한데 목탁새는 어떻게 봄이 오는 기미를 알아차렸는지 뒷산에 와서 울고 있다. 그렇게 이른 봄에 와서 울다가 진달래가 지고 벚꽃이 만개할 무렵이면 어디론가 훌쩍 떠나버린다. 훌쩍 떠났다고는 하지만, 사실 나는 그 새의 울음소리만 들었을 뿐 한 번도 본적이 없다. 그러므로 정말로 새가 떠난 것인지, 산란을 하기 위해 어디에서 은신중인지조차 모른다. 동틀 녘에 뒷산 높은 나뭇가지 위에서만 울고 있어서, 까치발을 하고 목을 빼봐도 도저히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까지 들어본 새의 울음소리 중에서 가장 애절한 성음을 지녔는데도 말이다.

그 새 울음을 처음 들은 것은 태백산 줄기를 잡고 들어선 구학산 암자에서다. 몸이 아파서 한 해 봄을 보내고 있을 때에, 새벽 예불시간이면 어김없이 그 새가 울었다. 법당 뒤거나 삼성각 앞에서만 울었는데, 그 청음은 말로는 도저히 표현키 어려웠다. 어찌 들으면 단소의 끝음절 같기도 하고, 어찌 들으면 떨리는 숨결로 부는 휘파람 소리 같기도 하였다. 가슴 설레게 하는 뻐꾸기라든가, 깊은 심연에 서리서리 맺힌 한이 치고 올라와 도저히 토해 내지 않고는 참을 수 없어서 밤새도록 어두운 골짜기를 넘나들며 질펀하게 울어 쌓는 소쩍새와는 전혀 다르다. 마치 눈꺼풀을 면도에 베인 것 같이 온몸의 세포들이 경련을 일으키도록 애저린 성음이었다.

새벽마다 스물한 살 처녀의 앙가슴을 자지러지게 하던 그 새의 울음을 다시 듣게 된 것은, 이 산골로 이사 오고 난 이듬해 봄이었다. 40여 년 만에 푸르스름한 서기를 헤치고 산의 윤곽이 서서히 깨어날 무렵에,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애저린 울음을, 그것도 이불 속에서 꿈결처럼 들었던 것이다. "아! 목탁새가 운다." 순간 기억의 저편에서 잠자고 있던 새에 대한 그리움과 반가움이 출렁, 감성의 물살을 일으켰다.

그 새는 어느 행자승의 넋이라 했다. 목탁도 한 번 잡아보지 못하고 공양간에서 심부름만 하다가 요절한 것이 원통해서 저렇게 새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귓불이 빨갛게 언 행자승이 서슬 퍼런 노승의 활 같은 꾸지람에 자라목을 하였을 그가, 어쩌자고 여기에 와서 우는지 모르겠다. 누구를 깨워 목탁을 치며 도량을 돌라고 저렇게 와서 우는가 모르겠다. 청신한 샐녘에 면도날 같은 울음으로 던지는 화두, 공안을 어찌해야 좋을 지 내 몸속의 세포들이 또 한 번 자지러진다.

실지로 나는 목탁새의 본명을 모른다. 절간에서 스님들이나 공양주들이 목탁 한번 잡아보지 못하고 죽은 행자승의 넋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만 듣는 이들의 주관적인 생각에서 지어놓은 설화에 불과하다. 그 새의 이름을 제대로 알고 싶어 조류도감을 샅샅이 뒤져보았으나 울음이 비슷한 의성어를 지닌 새는 없었다. 혹시 휘파람새가 아닐까 해서 몇 번이나 확인해 보았지만, '호오, 호케꼬'라고 적혀 있어 내가 들은 소리와는 딴판이다. 게다가 여름 철새라고 하였으니, 초봄에 잠깐 와서 울고 가는 그 새와는 맞는 점이 한 가지도 없었다. 해서 지금까지 목탁새로 불렀던 것이다.

산골로 들어온 후로는 숱한 종류의 새 소리를 들으며 살고 있다. 늦잠을 자고 싶어 게으름이라도 부려볼 양이면 창밖에서 들려오는 때까치와 곤줄박이와 참새들의 등쌀에 자리를 털고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그 중에서도 참새 떼들은 시도 때도 없이 마당가 다복솔 밑이나 잔디밭으로 날아와선 말똥 굴러가는 것만 보아도 웃음을 터트린다는 여학생들만치나 재잘거린다. 누가 참새가 아니랄까봐 꼭 그렇게 티를 내는 놈들이다. 매무새 깔밋한 박새나 동고비도 자주오지만, 고것들은 데크 난간에 올라앉아 꽁지깃을 까불거리다간 이내 허공을 차고 날아갈 뿐 양가집 규수처럼 소리를 아낀다.

'M' 선생은 입만 벙긋하면 얼레에 감긴 연줄처럼 시가 술술 풀려 나온다. 지난겨울에는 그분에게서 얼레에 감긴 연줄 한 토막을 얻어왔다.

 

‘일 없이 울고 우는, 소리 좋은 새야(無事啼啼聲好鳥)

어찌하여 해마다 이 나뭇가지에 와서 우느뇨(爾何年年來此枝)

강산의 다 적막함을 아까워하여(但惜江山多寂寞)

소리소리 울어 나무 가지가지마다 보내노라(聲聲啼送樹枝枝).’

 

나는 이 시를 놓고 근 보름간을, 강산의 적막함을 아까워하여 나무 가지가지마다 울음을 보내는 새를 찾아 헤매었다. 어떤 새일까? 어떤 새이기에 강산의 적막함을 아까워할 줄 아는가.

목청이 청아하기에 꾀꼬리를 따를 새가 없다. 황금빛 깃털에 목소리마저 맑고 아름답다. 오죽하면 사랑하는 여인을 찾아가던 유리왕의 발길을 잡았을까. 하지만은 꾀꼬리는 아니다. 신록이 눈부신 나뭇가지에 앉아 우는 새가 어찌 적막함을 아까워할 줄 알겠는가. 그렇다고 밀화부리도 아니다. 녀석도 꾀꼬리만큼 멋진 깃털에 고운 목청을 지니고 있지만, 뻐꾸기처럼 듣는 이의 심정을 달뜨게 만든다.

그럼 유리딱새일까. 마른 나뭇가지들의 음영이 어느 때보다 선명한 겨울 산에서, 그것도 골 첩첩한 산중에서만 우는 몸집도 작은 유리딱새일까? 하지만 그도 아니다. 겨울산이 아무리 적막하다 할지라도 바람 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설령 잠시 적막했다가도 곧바로 바람이 일거나 나무에 쌓인 눈이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해 후드득 떨어지기도 하는데. 그렇담, 그 새는 바로 시인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시인이 마음이 하도 고적하여 나무 가지가지마다 울음을 보내고, 이름 석 자 남기는 것도 번거로워 슬쩍 시詩 뒤로 숨었던 것이다.

목탁새가 운다. 내 눈꺼풀에 면도날을 들이대는 저기 저 울음 속에 이름 모를 시인의 마음이 숨어 있다.

 

 

                                                                             종이책 이야기 / 김 애 자

 

산촌의 한낮은 우물 속처럼 고요하다. 밤새 어미 품이 그리워 고시랑거리던 새끼 고양이조차 낮잠이 곤하다.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권태롭지 않은 것이 없다.

이 평화스러운 권태를 즐기는 방법은 책 읽기가 제일이다. 창으로 비쳐드는 초가을 볕이 부시어 옥양목 주련을 내렸다. 이 가운데 책을 손에 들고 정물처럼 앉아 있으면 세상사가 아득하다.

지난 해 여름에는 1981년 1월에 산 『열하일기』와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잼처 읽었다. 좋은 책을 다시 읽으면 적조했던 스승을 찾아뵙는 듯 반가움과 함께 미처 깨닫지 못한 부분을 발견하게 된다.

올 여름엔 『연암집(燕巖集)』을 피서지로 삼았다. 세 권이나 되는 이 책은 권당 400 쪽이 넘는다. 겨울까지 읽을 셈치고 산 것이다. 가능한 건 넘기지 않고 차근차근 읽으며 선생이 남긴 지적유산을 속속들이 챙길 요량이다.

나는 지금도 책을 들면 선생이 제자 황상에게 일러준 '삼근계(三勤戒)'를 생각한다. 부지런하고, 부지런하고, 또 부지런히 읽기를 채근했던 어록이다. 이와 같이 부지런히 읽다보면 책 읽는 진진한 재미가 생기고, 학문이 자연스럽게 몸에 밴다고 황상에게 누누이 일러주던 지극한 가르침을 잊을 수가 없어서이다. 따라서 '삼근계'는 나에게도 읽고 배우는 즐거움을 안겨주었고, 끝내는 글을 쓰게 했다.

그러나 글로벌 시대가 도래하면서 현대인들은 웨어러블(Wearlable) 컴퓨터와 줌 안에 드는 스마트워크와 온라인 무료 정보를 통해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든다. 책읽기는 물론 결재도 송금도 손안에 든 기기 하나면 해결된다. 신종 기기가 무소불능인 시대에 종이 책의 운명은 오래지 않아 종식될 것이라고 예측하는 사람들도 적잖다.

하지만 나는 낙관적이다. 10년 전에도 종이책이 곧 사라질 것이라고 설왕설래 했었다. 2017년이면 신문마저 사라질 것이라 입방아를 찧었으나 종이신문은 여전히 이 산골까지 배달되고 있으며, 나 또한 10년 전 그대로 신문에서 소개되는 신간 중에 읽을 만한 책이 눈에 띄면 곧바로 교보문고로 주문을 한다.

다산선생이 쓴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는 30년 동안 꾸준히 독자층을 늘려 28쇄를 찍었다. 정민 선생인 쓴 『삶을 바꾼 만남』도 출간 6년 동안 16쇄를 찍었고 『열하일기』도 마찬가지다. 2백 년 전에도 젊은 유생들이 열광했던 이 책은 2백 년이 지나간 지금도 책을 볼 줄 아는 지성인들에게는 파워 클래식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열하일기는 연암 박지원 선생이 육촌 형인 박명원을 따라 청나라 건륭제의 칠순연七旬宴에 가는 사절단에 끼어들어 청나라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사진을 스캔하듯 치밀하면서도 유려한 문체로 기록한 견문기다. 이 견문기엔 시는 물론 수필과 소설과 일기까지 포함되었다. 유교적인 규범에 매이지 않고 여러 장르를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기록한 다양한 형식과 풍부한 내용에 당시 유교사상에 묶여 있던 서생들은 반하였다. 마침내 정조대왕은 불온서적으로 낙인찍어 금서로 묶어놓았으나,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젊은 지식인들의 도저한 흐름을 막을 수 없었다.

이게 좋은 책이 가지고 있는 생명력이다. 이 생명력의 저력은 앞으로도 종이책의 명줄을 지켜낼 것이다. 그리고 더 희망적인 것은 한국문인협회에 등록된 시인과 소설가와 수필가와 인문학자들이 수만 명에 이른다. 이들은 종이책을 애독하는 진짜 선비들이고 작가들이다. 이들은 밤잠을 줄여가면서 책을 손에 들고 천천히 내용을 충분하게 음미하면서 읽을 줄 안다. 나도 그들 중 한 사람이다. 그리곤 책을 읽다가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을 만나면 붉은 볼펜으로 언더 라인을 친다. 이 조용한 기쁨을 나는 시력이 허락할 때까지 누릴 것이다.

사람들은 내적 전실함을 밖으로 표출하고 싶은 본성을 지니고 있다. 과학이 고도로 발달할수록 내면에 잠재하고 있는 전실함을 자신의 능력으로 채우지 못할 때는 무엇인가로 대체하고 싶어 한다. 인문학은 바로 그런 이들을 연금술적으로 감싸 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전자매체가 아무리 판을 쳐도 종이 책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어느덧 산그늘이 마당으로 내리고, 추녀 끝에서 울리는 풍경소리가 소슬하다. 초가을 하루가 책 이야기로 조촐히 저물어가고 있다.

 

                                                                              눈길 / 김 애 자

기온이 그렇게 떨어지고 눈까지 내릴 줄은 예상치 못했다. 아침에 집을 나설 때까지만 해도 겨울날치고는 포근했고, 햇볕도 따사로운 편이었다. 오후로 접어들면서 빠른 속도로 바람이 일고, 이어 구름이 몰려오는가 싶더니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길을 나서기 전에는 필히 일기예보를 알아두어야 한다. 그럼에도 산 밖을 나설 양이면 매번 시간에 쫓긴다. 이곳에서 구할 수 없는 마른 찬거리며 생필품 따위를 메모하고, 남편의 하루 분 식사까지 준비하고 나면 일기예보 시간을 일쑤 놓치고 만다. 게다가 집을 나가서도 곁불 쬐기로 화랑을 둘러보고 영화라도 한 편 관람하고 나오면 나의 귀가는 어둠이 동굴처럼 깊어진 뒤에나 가능하다. 하물며 지금은 겨울이지 않는가.
산촌에서의 고독감은 정체된 일상에서 오는 권태와 대화의 궁핍에서 온다. 대지의 소생력, 그 경이와 아름다움에 아무리 빌붙어도 감정의 교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정(情)의 울림이 없는 까닭이다. 그래 사람이 그리운 것이다. 상처를 주고받을지라도 사람이 그리웁고, 밤이면 불의 강을 이루는 도시의 불빛과 문화가 그리워 때때로 일탈하고 싶은 충동이 도발적으로 일어나곤 한다. 일 년에 대여섯 번 서울과 청주로 나가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곳에 가면 그 하늘, 그 거리, 그 도시의 문화와 정인들이 나를 반겨 준다.
오늘은 글을 쓰는 친구가 책을 출간하고 모임을 주선한 날이다. 오랜만에 보고 싶었던 글벗들을 만나면 쉽게 자리를 뜰 수가 없다. 이런 날 식사는 그야말로 대중공양이다. 얼굴을 가까이 대고 소곤거리며 대화를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왁자하게 떠들면서 입에 음식을 퍼 넣는 자리다. 게다가 어디든 약방의 감초처럼 익살꾸러기 한 사람쯤은 끼이기 마련이어서, 그의 짓궂은 입담에 홀려 연신 웃음꽃을 터뜨리게 된다.
그런 소란스런 분위기에 휩싸여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오늘은 아무리 얘기 장단이 흥겨워도 오래 퍼지르고 있어선 안 될 처지임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신선놀음을 끝내고 나서야 ‘아차’싶었고 차에 시동을 걸면서부터 불안은 시작되었다. 더구나 스노타이어를 끼우지 않았으니 돌아갈 삼백 리 길이 아득하였다.
거리는 나붓나붓 떨어지는 눈발과 인파로 넘실거렸다. 혈기가 불꽃같은 젊은이들은 눈 오는 밤을 즐기기 위해 밤늦도록 거리로 카페로 몰려다닐 판이었다. 나는 꽃의 물결에 부유하듯 떠밀려 시내를 벗어나 외곽으로 들어섰다. 이미 중앙선은 진작부터 없어진 듯싶었다. 제가 알아서 가야만 하는 위험천만의 길이었다. 비상등을 켜고 가능한 브레이크를 밟지 않을 속도를 유지하기 위해 신경의 촉수를 곤두세웠다. 눈 깜짝할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기에 앞 차의 후미등을 등대삼아 조심스럽게 따라붙었다.
한 시간 가까이 길라잡이 노릇을 하던 차가 증평을 지나 괴산 쪽으로 갈라지는 분기점에 이르러 오른 쪽으로 꽁무니를 트는가 싶더니 이내 사라졌다. 갑자기 낭패감과 두려움에 머리칼이 올올이 곤두섰다. 그토록 자주 다니며 숫하게 보아 온 풍경들이건만, 앵글을 맞추지 못해 사물의 윤곽이 뚜렷하지 않은 곳으로 끌려가고 있는 것처럼 모든 것이 생경했다. 내가 초조해 할수록 생경한 풍경들은 더 깊은 정적 속으로 가라앉는 것 같았다. 어쩌면 이곳에서 생을 마감한다 해도, 누가 달려 나와 내 죽음을 안타까워할 리 없는 이색 지대에 홀로 버려진 것 같은 단절감에 진저리를 쳤다.
그래도 가끔씩 반대편 차선에서 차가 오기도 하고 옆으로 지나가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도 사지에 내몰린 외로운 병사처럼 복병을 피하느라 절절 맸다. 머리칼을 곤두세우고 진저리를 치면서 달천강을 건너 충주에 도착한 것은 청주를 출발한지 세 시간이 지난 후였다. 평소 한 시간이면 족하던 거리였다.
등은 식은땀으로 축축했고 목이 말랐다. 주유소로 들어가 자판기에서 커피 한 잔을 빼먹고 다시 차안으로 들어왔다. 아직도 집까지 가려면 한 시간은 족히 걸릴 것이었다.
다시 시동을 걸고 이번에는 속력을 더 냈다. 아무리 길과 들의 경계가 모호해도 손금 들여다보듯 훤한 곳이어서 운전하기가 수월할 것 같아서였다. 차가 조심스럽게 국도를 벗어나 면소재지를 지나고, 저수지 굽이를 돌아 당산나무가 있는 마을 어귀로 접어들자 비로소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멀리 회관 앞에 선 가로등이 보였다. 그러나 마을 초입에 있는 언덕은 밑에서부터 탄력을 받아야 올라갈 수 있는 마지막 시험 코스다. 도폭이 좁고, 경사가 심해 눈이 오면 트럭도 십중팔구 제자리걸음만 치다가 돌아가는 언덕은 또 한 번 나를 불안케 하였다. 자칫 미끄러우면 개울로 곤두박질하게 될 터, 단전에 힘을 주고 앞을 똑바로 주시하였다.
그때 눈 위로 흙이 깔려 있는 것이 보였다. 착시를 일으킨 것은 아닌가 싶어 다시 보았지만 틀림없었다. 그것도 방금 모래를 삽으로 훌훌 뿌려 놓고 간 듯싶었다. 오른 발에 적당한 힘을 가하자 차는 거뜬하게 모래를 타고 언덕 위로 올라섰다.
멀리 불빛 속으로 사람이 보였다. 그가 빈 리어카를 끌고 막 집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산 밑 작은 집에는 창마다 불빛이 환했다. 집안에 있는 전등이란 전등은 죄다 켜 놓았던 것이다.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리었을까. 청주에서 출발할 때 전화를 했으니 이제나 오려나, 저제나 오려나 수없이 창문을 열고 내다보았을 것이다. 외진 산골에서 홀로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은 쓸쓸하고 따분한 일이다. 그의 쓸쓸함과 따분함과 조바심이 눈에 보였다. 혼자 식탁에서 밥을 먹었을 것이고, 전화기로 수없이 눈길을 보냈을 것이다. 불면을 밝히는 초조함이 자정을 넘자 드디어 리어카에 모래를 퍼 담고 이 길로 나왔을 터였다.
언덕 위에 차를 세우고 라이트를 껐다. 아직도 꽃잎이 나플나플 산의 등고선은 물론 회화나무 숲이며 온 마을을 뒤덮고 있었다. 잠시 바람의 현을 타고 일렁이는 꽃송이들, 그 순결한 성채가 산 밑 작은 집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을 만나 더 희게 빛나고 있었다. 그 희고 맑은 빛 속에서 한 남자가 현관문 앞에서 머리와 옷에 묻은 눈을 털고, 다시 한 번 길 쪽으로 눈길을 보내는가 싶더니 안으로 들어갔다.
눈길에 선명하게 찍힌 리어카와 그의 발자국, 불빛 속에서 움직이는 동작 하나하나를 지켜본 나는 핸들을 잡고 있던 손등에 얼굴을 묻었다.

 

                                                                  털신 한 켤레의 정물 / 김 애 자

 

눈발이 분분한 저녁 답, 가쁜 숨을 몰아 사천왕문 안으로 들어서니 북을 두드리는 스님의 장삼자락이 희뜩희뜩 날파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때때로 몸 안에서 일어나는 갈애渴愛와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미망을 떨쳐내려는 듯 북채를 잡은 젊은 승려의 손길은 자유자재 종횡무진이었다. 위에서 아래로, 아래서 위로, 조였다가 풀어지고 풀어졌다가 다시 조여드는 힘찬 가락이 '둥둥둥' 개밥바라기별이 떠 있는 능선을 타고 춤을 추었다. 한참 동안 가람의 정적을 뒤흔들어 놓던 북소리가 칼로 자른 듯 끊기었다. 사위 또한 언제 무슨 소리가 들렸었냐는 듯 시침을 떼었고 단일하게 다가오는 어둠을 품었다. 북을 치던 스님도 북채를 제자리에 놓고 총총히 전각 뒤로 사라지자 범종은 장중하게 뒤를 이었다.

나는 장승처럼 서서 어두운 골짜기, 갈피마다 스며드는 범종의 여운을 따라 나섰다. 잡힐 듯 다가왔다가 가물가물 멀어지는 울림은 끝내 한 인간이 내젖는 영혼의 손사래를 길 위에 버려둔 채 사방으로 잦아들었다. 두 번 세 번 당목이 종판을 울릴 적마다 한기가 목덜미를 타고 몸속으로 파고들었고, 오소소 소름에 진저리를 쳤다. 운판이 울고, 속을 비운 목어도 울었다. 사물이 저마다 제 소리, 제 울음을 끝내자 이번에는 대웅전에서 스님들의 저녁예불송이 들려왔다. 예불을 이끌어가는 목탁소리를 뒤로 관음전으로 걸음을 옮겼다. 긴 머리 중생이 잿빛 승복 속으로 끼어들기란 여간한 배짱이 아니고는 몸 둘 바 없고 민망하기 그지없는 노릇이다.

관음전 격살문 고리는 얼음장이었다. 문고리뿐만 아니라 실내에 고여 있던 냉기도 먹잇감을 만난 짐승처럼 달려들었다. 무릎이 풀썩 꺾였다. 충청도 내륙 깊숙한 산골에서 표충사까지 오는 길은 멀고도 멀었다. 버스와 기차와 택시를 번갈아 타고 표충사 관음전까지 찾아온 몸뚱이가 천근이라도 되는 양 무거웠다. 누워 잠들면 바닥에서 우담바라가 피어나 내 몸을 떠받들어 줄 것만 같았다. 그 곳은 천 개의 눈과 천 개의 손을 지니신 관음전이 아니던가.

"관세음보살이시여. 이 중생을 궁휼이 여겨주소서."

나의 기도는 입안에서만 맴돌았다. 풀썩 꺾인 무릎을 세울 줄도 모르고 눈을 들어 관세음보살을 올려다보았다. 적당하게 살 오른 앞가슴, 나붓이 내려 깔은 고운 눈매, 입가에 어린 자애로운 미소가 몸을 일으키고 싶은 충동을 일게 했다. 가까스로 오금을 펴고 절을 올리려는 순간 깜짝 놀랬다. 술항아리처럼 이불을 둘러쓴 하나의 형체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천장에 달린 연등의 희미한 불빛이 조명처럼 그를 비추고 있었음을 전혀 알지 못했다. 방석 위에서 가부좌를 틀고 이불을 둘러쓴 스님은 오만하다 싶을 만치 꼿꼿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나는 마치 부정한 여자가 제당祭堂에 쳐 놓은 금줄을 넘어선 듯 민망하여 합장만 올리고 물러나왔다. 그리곤 원주스님을 찾아뵌 후 객실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었다. 사하촌에서 산채정식을 먹고 올라온 터여서 따로 저녁상을 받는 불편함을 덜었기 때문이다.

잠이 오지 않았다. 추위와 여정에 지친 몸은 나른하기 이를 데 없었건만, 정신은 점점 또렷해지기만 했다. 관음전 스님의 모습이 눈에 밟혔다. 냉기가 뼛속까지 스며드는 추위 속에서 말문을 닫고 극한으로 자신을 몰고 가는 저 행위는 무엇을 위함인가. 존재의 확인인가. 아니면 대중가요만큼이나 식상하게 나도는 '이 뭐꼬'란 애매모호한 물음을 붙잡고 있는 것일까. 댓돌 위에 놓인 털신 한 켤레의 고독한 정물은 "천상천하 유아독존唯我獨尊"을 외치던 석가의 꿈이 아니었던가.

10년 전의 일이다. 엄마 몰래 출가한 아들을 만나기 위해 친구는 나를 앞세우고 법주사를 찾아갔다. 봄비가 내리는 날이라 각 전각은 물론이요, 금동미륵대불 앞마당도 텅 비어 있었다. 큰 스님 하명을 받고 희견보살상 앞으로 나온 사미승은 어미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고 땅만 내려다보고 있는 그는 피골이 상접했다. 어미는 목부터 메었다. 1년 동안 아비도 없이 자란 자식의 행방을 알지 못해 애가 잦고 피를 말리었다. 덥썩 껴안고 뒹굴어도 시원찮을 만남이었다. 그러나 아들은 다가서는 어미의 손길을 매몰차게 뿌리쳤다.

"저와의 인연은 여기서 끝입니다. 다시는 찾아오지 마세요."

합장의 짧은 인사만 남기고 획 돌아서는 아들의 몸에선 찬바람이 일었다. 그도 그럴 것이다. 은사와 여러 사부대중들 앞에서 삭도로 머리를 자를 때 핏줄과의 인연을 가차 없이 잘라냈을 것이다. 세상 모든 것을 다 잘라냈을 것이다. 오로지 제 정체만 남겨 놓고.

어깨를 들먹이는 친구의 슬픔을 온전히 내 몸으로 받아들이던 날의 하늘은 온통 아픔으로 일렁이었다. 자욱자욱 떼어 놓은 걸음마다 눈물이 고였다. 대학입시에 낙방한 아들이 어미 몰라 숨어든 곳이 부처님 무릎 밑이었다. 자식은 구도를 목적으로 어미와의 연을 끊을 수 있겠지만, 세상의 모든 어미에게 자식이란 존재는 죽는 날까지 끌어안고 살아야 하는 사랑의 연자매다.

다음 날 아침에도 관음전 댓돌 위에 놓인 털신 한 켤레의 정물은 변함없었다. 닷새간 용맹정진에 들어갔다니 닷새 동안 그는 가부좌를 풀지 않을 것이다. 한 번도 격살 문을 열지도 않을 것이며, 한 마디 말은 물론 음식도 입에 대지 않을 것이다.

그도 그랬다. 천왕산 얼음골에서 은거중인 그도 아무도 모르게 출가를 결심하고 한 밤중의 벽에 걸린 괘종시계를 떼어내어 노자를 마련했다. 싯다르타가 제왕의 자리를 포기하고 마부를 앞세워 카빌라성을 떠나듯, 시계를 끌어안고 부모형제가 잠든 밤을 택하여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을 나섰다. 직지사 녹원스님 문하로 들어간 그는 몇 년을 생식으로 버티었고, 삼복염천에 하루 3천배의 고행을 자처하기도 했었다. 자신의 몸을 구도의 도구로 삼는 행위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단지斷指을 결행했다. 검지와 엄지에 기름절인 무명천을 칭칭 감아 불을 붙였다. 입에 솜을 물고 시작한 일이었지만 아픔을 견디지 못해 끝내는 혼절하고 말았다. 기름과 살과 뼈가 타는 자욱한 연기 속에서도 끝까지 손가락 두 개가 끊어지는 것을 보고야 마는 도반들과 사형들은 또 얼마나 지독한가.

그 후, 그는 절집에서도 박학다식한 승려로 이름을 떨쳤고, 한 때는 민족문화추진회에서 역사서와 경전을 번역하기도 했으나 출가승이 할 일이 못되었던지 인도로 가선 만행을 일삼다 돌아왔다. 그리곤 스승 유의태가 제자 허준에게 자신의 시신을 해부케 하던 골짜기에 토굴을 마련하고 은거 중이었다. 그런 그를 만나겠다고 불원천리를 분별없이 달려왔던 것이다.

얼음골로의 산행을 포기했다. 아침 공양을 마치고 종무소에 들려 내복과 털실로 짠 목도리를 맡기고 돌아섰다. 천왕산 얼음골 쪽으로는 눈길도 보내지 않았다. 맹세코 다시는 그를 찾아 나서지 않을 것이다.

 

                                                                  지상의 방 한 칸 / 김애자

 

해마다 입춘 날이면 사찰에선 삼재풀이 행사로 법석거린다. 신도들이 액막이로 삼재가 든 가족의 속옷이나 양말 따위를 싸들고 와, 금강경이 인쇄된 봉투를 받으려고 이른 아침부터 몰려들기 때문이다.

경은사는 집에서 30분 정도면 올 수 있는 거리여서 나는 몇 해째, 눈 어둡고 글 모르는 할머니들을 대신하여 삼재가 든 자손들의 생년과 이름을 적어 봉투에 넣어주는 일을 맡고 있다. 내 살붙이들을 재난으로부터 지키려는 정성이 어찌나 지극한지, 결코 이런 행위를 지식의 잣대로 기복종교라거나, 샤머니즘의 한 풍속이라고 몰밀어 비난해선 안 될 것이란 생각이 절로 든다.

 

『순수이성비판』을 쓴 임마누엘 칸트도 "신은 없지만, 그러나 신은 필요하다."고 말한 것은 절대의 믿음으로 인간의 삶이 보다 아름다워질 수 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행사가 끝나고 신도들이 거반 흩어지고 나면, 나는 절 마당 한 귀퉁이에 마련된 소각장으로 나간다. 액막이로 사용했던 물건들을 태우는 불꽃을 향해 합장을 한다. 크게는 나라의 안위를 빌고, 작게는 삼재가 든 이들과, 나와 인연 맺은 사람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염원이 왜 그리도 애틋한지 모른다. 매번 가슴이 울먹해서 수 없이 반배를 올린다.

불꽃이 어느 정도 사그러들면 건너편 고갯마루로 시선을 돌린다. 금봉낭자가 박달도령에게 도토리묵을 허리춤에 넣어주던 '천등산 박달재'에는 아직도 겨울이 깊다. 눈 덮인 고갯마루를 보고 섰으면 지키지 못한 약속 때문에 어깨가 무겁다. 필경 그 여인은 올 입춘에도 어느 산사에선가 발원發願의 촛불을 밝혔을 것이다.

 

여인을 처음 만난 것은 6년 전이다. 입춘 전날에, 그 산사의 약사여래 불상 앞에 이르렀을 때에는 이미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때 이른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통에 미처 녹지 않은 눈과 빗물이 범벅이 되어 길은 빙판이었다. 더구나 멍든 자국처럼 퍼렇게 더께가 진 얼음 위로 낙엽의 잔해들이 얼어붙어 자칫 발을 잘못 떼어놓았다가는 어디로 나뒹굴어질지 모를 판국이었다. 차를 관리소 주차장에 세워두고 나섰지만, 오금이 저려 기어가다시피 절에 도착하니, 땅거미가 지고 저녁공양도 끝난 뒤였다.

주지스님을 믿고 간 터였지만, 공양주에게 따로 저녁상을 받기란 여간 민망한 게 아니다. 한 끼 굶는 편이 오히려 마음 편하겠는데 주지스님은 한사코 상을 차리게 했다. 다행히 공양상을 들고 온 분은 노보살이 아닌 40대 후반쯤 되었을 낯선 여인이었다. 설거지를 끝낸 뒤라 차려온 상 앞에서 안절부절인 내게 그는 컵에 물까지 따라 주며 살갑게 대해주었다.

공양을 마치고 곧바로 객실로 들었다. 산사의 구들방은 언제나 매캐한 연기와 함께 고향집 안방처럼 아늑했다. 지창 밖에서 기왓골을 타고 떨어지는 빗물도 좋았다. 천금을 준다고 해도 바꾸고 싶지 않은 밤이었는데 누군가 '똑똑' 문을 두드렸다. 저녁상을 차려주었던 여인이 쟁반에 과일을 담아들고 와 서 있었다.

 

둘은 마주 앉았다. 그녀는 칼로 사과를 돌려 깎으며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주지 스님이 주신 『달의 서곡序曲』을 읽어봤습니다."

"잡문에 불과한걸요. 고맙습니다."

"선생님께 부탁이 있어 왔는데…"

사과를 깎아 4등분으로 쪼개는 손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반백 년 가까이 살아왔을 연륜에 비해 자태가 단정했고, 목선이 가늘어 몸피가 수척해 보였다. 사과 접시를 앞으로 내미는 여인의 눈과 내 눈이 마주쳤다. 눈동자가 참 맑았다. 저런 눈으로 이 험한 세상을 어찌 살았을까 싶었다.

부탁이 있다던 그녀는 좀체 입을 떼지 못했다. 어색한 침묵을 밤비가 대신 채우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 쪽에서 먼저 말문을 터 주어야 될 것 같아 사과 한 쪽을 입에 넣고는 눈웃음을 지었다. 당신의 부탁을 들어주고 싶다는 표시였다. 이내 마음이 통하였다. 말문이 열리면서 나직나직 들려주는 그녀의 과거 속으로 나는 홀린 듯 끌려가고 있었다.

25년 전, 겨울이었다.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과 태백선을 달리는 기차에 앉아 있었다. 밀려오고 밀려가는 설경에 감탄사를 폭죽처럼 터뜨리어도 시원찮을 것이나, 두 사람은 창문을 통해 조망하는 설경에 대해 입을 떼지 않았다. 그들은 친구가 일러준 산사를 찾아가고 있었던 중이었다. 기차는 검은 석탄이 산더미처럼 쌓인 태백역을 지나고 나서도 또 몇 구비를 더 돈 후에야 작은 역사에 도착했다. 초행인 그들은 역무원에게 산사로 가는 길을 물었다.

연인들은 손을 잡고 적송이 빼곡하게 들어선 산길을 걸었다. 눈길을 걷는 동안만은 온 세상이 자기들 것인 양 큰소리로 웃고 떠들었다. 막간에 허락된 유희였다. 막간의 유희는 막간답게 반시간도 못되어 끝났다. 스님이 거처하시던 문설주에는 며칠 후에나 돌아올 것이란 글발이 붙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전신에 힘이 다 빠져나가는 것 같은 허탈감과 동시에 한기까지 밀려들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법당으로 들어갔다. 부처님께 두 무릎을 꿇고, 두 팔과 이마를 바닥에 닿게 하는 (오체투지)법도를 몰라 명절날 세배 드리는 식으로 절을 올렸다.

잠시 후 청년은 불단 아래에 놓인 주전자를 들고 나가 샘물을 가득 퍼 들어왔다. 다기에 물을 따라 놓고 우리끼리 예를 올리자고 했다. 실은, 주지스님을 모시고 혼례식을 갖추고자 찾아왔던 것이다. 그 절 주지는 친구의 삼촌이었다. 양가 부모님들은 철천지원수지간이라도 되는 듯, 앙분을 품고 기어이 두 사람의 관계를 떼어놓겠다고 핏발을 세워서, 그런 방법이라도 써보자는 배짱으로 나선 길이었다. 하지만 스님은 부재중이었고, 방문마저 굳게 걸려 있었으므로 속히 돌아서야만 막차를 탈 수 있었다. 결국 싸늘한 마룻바닥에서 정화수 한 그릇을 가운데 놓고, "내 알고 니 알고, 하늘과 땅만이 아는 예"를 올리고는 하산을 서둘렀다.

 

그들은 도시로 돌아왔으나 사랑의 노둣돌(*말을 타고 내릴 때에 발돋움으로 쓰기 위해 대문 앞에 놓은 큰 돌) 을 놓을 방이 없었다. 여자의 가방 속에는 여관에서 사흘 쯤 먹고 묵을 수 있는 얼마간의 돈이 있었지만 차마 내가 돈을 치를 것이니 여관으로 가자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따뜻한 불빛이 그리운 밤에, 둘은 잔치국수 대신 짜장면 한 그릇씩을 사 먹고는 각자 집으로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지나가도 청년은 이렇다 할 묘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내심 죽이든 살리든 자기 집으로 끌고 들어가 주기를 바랐다. 청년은 입술이 검게 타도록 식음을 전폐하고 항거해 보았지만, 부모님은 너 같은 자식은 아예 족보에서조차 이름을 빼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며 매몰차게 대하는 거였다. 청년은 억하심정이 일어서였는지, 빙벽 같은 현실로부터 도피를 하고 싶어서였는지, 기다려 달라는 말도 한마디 남기지 않고 훌쩍 외국으로 떠나가 버렸다. 정부에서 한창 인력수출을 통해 외화를 벌어들이던 때였다. 그렇게 떠나선 돌아오지 않았다. 독일 어디에선가 한국인 여성을 만나 가정을 꾸리고 산다는 입소문만 바람결처럼 떠돌았다.

 

그 바람결은 믿기지 않았다.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믿기지 않던 바람결은 서서히 회오리로 변했다. 원망과 그리움과 아픔으로 뒤엉킨 회오리에 휘말려 그녀는 10년 동안을 실성한 듯 태백선 열차에 몸을 싣고 암자를 찾아다녔다. 혹여 그 사람이 단 한 번이라도 다녀가지 않았을까 싶어서였다. 두 사람이 정화수 한 모금씩 나누어 마시면서 만일 헤어지게 된다면, 섣달 그믐날에 그곳에서 만나자고 굳게 다짐했었다. 그 약속이 뇌관이 깊이 꽂혀 희망을 저버릴 수가 없었지만, 청년은 끝내 오지 않았다.

그가 한 서린 집념을 포기하고 결혼을 결심했을 땐 30대 중반이었다. 그 절의 스님이 삼남매가 딸린 홀아비에게 중매를 섰던 것이다. 폐암으로 어머니를 잃은 세 아이들은 모두 열 살 미만이었는데 그 중, 셋째 꼬마는 두 돌을 지낸 지 얼마 안 되었다고 했다. 아빠를 따라 영정 앞에 선 어린 것들을 보는 순간 자신이 떠안아야만 될 숙명이란 느낌이 들더라고 했다.

남자는 여인과의 인연을 소중히 여겼다. 집안에서 웃음소리가 그치지 않았고, 일도 순조롭게 잘 풀리었다. 그러나 여인에게 때때로 실체 없는 그림자가 나타나선 마음을 휘젓곤 했다. 해서 입춘날이면 절을 찾아다니며 현재의 가족들과, 만리타국에서 살고 있을 그 사람을 위해 촛불을 밝힌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그녀가 어렵게 입을 떼고 들려준 사연이었고, 이 사연을 책에 실어주길 바랬다.

 

그 밤은 여인의 얘기로 잠이 덧들고(*덧들다=선잠에서 깨어 다시 잠이 잘 오지 않다) 말았다. 두 시 경이 지나서야 겨우 눈을 붙였으나 꿈결처럼 도량을 도는 목탁소리에 다시 눈을 떴다. 여인은 어느새 이부자리를 반듯하게 개어놓고는 자리를 비운 뒤였다. 필경 관음전으로 들어가 기도를 올리려니 싶어 모르는 척 눈을 감고 누웠으나 다시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나도 관음전으로 발걸음을 놓았다.

짐작했던 대로 그녀는 마룻바닥에 꿇어 엎드려 울고 있었다. 소리 없이 들먹이는 어깨울음이 전류처럼 심장으로 흘러들었다. 10년 동안 태백선 철로를 따라 다니며 저렇게 울었을 울음이었다. 사랑도 그리움도 오래 품으면 짐이 되는 것을, 저 미망迷妄을 지금껏 지고 있는가 안타까웠다.

나는 황망히 관음전을 나왔다. 들썩이는 어깨를 차마 더는 볼 수가 없었다. 아니 등줄기에 고드름처럼 매달리는 연민으로 내가 먼저 무너지고 말 것 같아서였다. 여명마저 물먹은 어둠을 털어 내느라 그 날 새벽은 아주 더디게 열리었다.

 

『달의 서곡』을 펴낸 지 7년 만에 출간준비를 하다 보니 그녀와의 약속을 더는 미룰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춘 날 절에서 돌아오는 대로 '지상의 방 한 칸'을 지었다. 방을 들이면서, 네 개의 벽으로 둘러쳐진 공간이 없어 사랑의 노둣돌을 놓지 못했던 그녀에게 늦게나마 '지상의 방 한 칸'을 헌사하게 되었다.

부족하더라도 부디 이 방에 그 짐 부려놓고, 남은 길 가벼이 걸어가시길 진심으로 바라며 일매 짓고 물러난다.

 

 

                                                                            춘 매 / 김 애 자

 

나는 아버지의 얼굴을 모른다. 한 번도 본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분에 대해 많은 것을 나는 알고 있다. 키가 훌쩍 크고 말수가 적으며 고집이 세다는 것을….

그뿐이 아니다. 아버지는 길을 걷다가 소낙비를 만나도 결코 남의 집 추녀 밑으로 들어가 비를 피한다거나 걸음을 서두르지 않았다. 그리고 시와 그림을 좋아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달빛 아래서 매화를 즐겨 그리셨다는 이야기를 늘 어머니에게 들어왔던 것이다.

오늘은 봄비가 내린다. 입춘이 지나고 처음으로 내리는 비다. 바람조차 잠든 저녁답, 이슬비에 함초롬이 젖은 가로등 불빛이 퍽이나 환상적이다.

지금쯤, 고향 집 동편 화단에 매화나무는 한창 꽃망울을 키우고 있을 것이다. 삼동의 매운 바람을 이기고 온 누리에 첫 봄을 알리는 전령의 꽃, 매화의 그윽한 향기가 그립다.

매화가 피면 어머니는 제일 먼저 딸에게 꽃소식을 전해준다. 그분은 오랜 세월 동안 외로운 혼을 만나 영원을 이루듯 매화를 가꾸어 왔다. 입춘이 지난 봄비 끝에 매화가 피기 시작하면 어머니는 하루에도 몇 번씩 창지문을 열어보신다. 묵은 가지에 수정같이 맑은 생기로 하얗게 피어 나는 매화를 완상하는 어머니 모습을 떠올려 본다. 아직도 팔순을 넘긴 노인답지 않게 흐트러지지 않은 몸가짐이 조심스럽다. 모시올 같은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 쪽진 모습이며 굽지 않은 반듯한 어깨선이 그러하다.

“무정한 사람, 무슨 역마살이 끼어 그렇게도 떠돌다 갔담. 쪽박에 밤톨 같은 어린 것들만 두고…”

어린 시절, 어머니가 바느질하며 혼자 되 뇌이던 말이다. 쪽박의 밤톨이란 말을 알아듣지 못했던 나는 어머니의 그런 푸념을 귓등으로 흘려버리곤 했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간 지금은 어머니가 신음처럼 내뱉던 그 말이 가슴 아프게 되살아난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의 서른여섯이던 어머니의 나이보다 열세 살을 더 먹고 나서야 정말 아버지는 무정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오십이 다된 딸이 노랗게 빛바랜 사진으로 삼십대의 젊은 아버지를 대하면 아직도 바람 부는 벌판을 혼자 걷고 있는 것 같다.

옛말에 아버지를 일찍 여의면 평생 외롭고 어머니를 일찍 여의면 평생 슬프다고 했다. 유년시절의 일이다. 명절날 아침이면 쪽박의 밤톨끼리 차례를 지냈다. 아버지 사진을 내다 놓고 서투른 글씨로 큰 오빠가 지방을 썼다. 고사리 손으로 잔을 올리는 우리들 등 뒤에서 어머니는 행주치마로 눈물을 닦곤 하였다. 이렇듯 아버지가 계시지 않는다는 사실은 언제나 적연한 곳으로 우리들끼리만 밀려나온 듯 외롭고 쓸쓸하였다.

아버지가 집을 나간 것은 일제시대에 창씨개명 문제로 직장에서 해고당하고부터다. 타고난 성품이 대쪽 같던 아버지는 그 일을 기회로 방랑객이 되고 말았다. 한 번 집을 나서면 5년 이상 해를 넘겼다는데, 어쩌다 집에 온다 해도 고작 삼사 일 머물면 다시 떠나갔다고 했다. 우리 삼남매의 터울이 뜬 것은 어머니가 몇 년에 한 번씩 하늘을 보고별을 땄기 때문이다. 여인이 수태할 때가 되면 동경 간 서방님도 돌아온다고 했는데, 아버지도 그런 삼신의 조화였던가, 중국 상해에서, 때로는 만주 하얼빈에서 소리 소문 없이 돌아와 우리 삼남매가 태어나는 인연을 만드셨기에 말이다.

어머니는 나를 낳을 때 산고가 컸다고 한다. 아이를 낳고도 산모의 건강이 나빠 아버지께 전보를 쳤다는 것이다. 내가 태어난 지 일주일이 되던 날, 아버지는 매화나무 한 그루를 손에 들고 돌아왔다고 했다. 그 길로 동편화단에 매화를 심어 놓고 어머니에게

“저 매화나무는 우리 딸이 태어난 기념으로 심었소, 매화처럼 성정이 맑고 고운 딸로 키웁시다.”

이렇게 말씀했다는 것이다. 위로 아들 형제를 두고 얻은 딸이라 아버지의 기쁨은 대단했던 모양이다. 강보에 싸인 아기를 자주 안아주었다며 길 떠나기 전 날 밤에는 지필묵을 꺼내다 묵매 한 폭을 그리셨다. 화제는 “梅以冷而花 其品潔”이라고 써 어머니께 주었다고 한다. 어쩌면 당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아내와 어린 딸에게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말씀이 아니었던가 싶다.

아버지는 다음 해, 해방을 사흘 앞두고 객지에서 얻은 돌림병으로 ‘만주 길림성 부여현 부여가 동문외구’에서 서른여섯 나이로 불귀의 객이 되었다. 암울한 시대에 항상 높은 이상과 절대의 자유를 지향하던 그분은 가족들이 찾아갈 무덤마저도 이국땅에 두고 가셨다. 내가 태어난지 열 달밖에 안되었을 때라니 나도 어지간히 아버지와의 인연이 박복한 사람이다.

창밖에는 여전히 봄비가 소근 거린다. 문풍지 바람에도 피가 잦아들던 내 젊음의 뜰에 늘 어두운 그림자로 서성이던 아버지, 매화꽃으로 다시 환생하는 그분의 고혼(孤魂)이 실려오는 걸까, 거미줄 같은 세우(細雨)가 시린 음계로 가슴을 적신다.

 

                                                                       숲에서 / 김애자

 

날이 밝아오면 나는 가벼운 옷차림으로 집을 나와 뒷동산으로 올라간다. 혼효림 사이로 난 자드락길을 따라 걷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시간의 흐름 속에 몸과 마음을 맡기게 된다. 싱그러운 바람결이 피부에 닿고, 비릿한 이끼향이 후각을 자극한다. 이럴 땐 산 밑에서 들려오는 닭 우는 소리와 개 짖는 소리도 좋거니와, 젖빛 안개 속에서 어렵사리 드러나는 숲의 실루엣도 놓치고 싶지 않은 풍경이다.

생명과학의 원칙에서 보면 이른 아침에 산책을 나서는 것은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 식물들이 내뿜는 탄산가스 배출이 끝나지 않을 때라서 그렇지만, 산촌에 살면서 그런 것까지 일일이 따지다보면 일정한 시간에 산책에 나설 수 없을 뿐더러,, 농번기에 바쁜 마을 사람들의 눈총을 피하는 것도 좋은 방편인 것 같아 아침 시간을 택한 것이다.

오늘은 잣나무 단지로 들어섰다. 몇 발자국 걷다가 덩치가 큰 잣나무를 양팔로 껴안고 이마를 대는 순간 코끝에 와닿는 잣나무 향기에 절로 눈이 감긴다. 순간 나무를 껴안고 명상에 잠긴 금발의 선수 제이미 엔더슨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를 본 것은 평창 동계올림픽 때 TV 화면을 통해서이다. 스노보드슬로프 스타일 선수로 나온 그녀는 여러 개의 장애물을 능숙하게 통과하면서 보여준 고난도의 점프와, 멋진 회전기술은 경이로움 자체였다.

남자도 해내기 어려운 종목을 여자 선수가 당당하게 이기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감동적이었던 것은 평창올림픽에 참가하기 전, 그는 켈리포니아 타호에 들려 자작나무 숲을 거닐었다는 것이다. 평소에도 시간만 나면 숲을 산책하며 명상하기를 즐긴다는 이야기를 신문에서 읽고 기꺼이 그녀의 팬이 되었던 것이다.

나는 자연주의자들을 좋아한다. 그들은 흙과 물, 공기와 불이란 네 가지 원소가 인간의 몸을 이루는 생명의 근원이란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공명심이나 권력에 집착하지 않는다. 오로지 정신적인 자유를 누리면서 흙과 물과 공기를 이용하여 농사를 짓고 소득을 올리면서 가족애를 돈독하게 유지할 뿐만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억지로 무엇을 가르치려고 들지 않는다. 어릴 때부터 토끼나 강아지와 고양이와 닭 등의 동물들과 친숙하게 놀도록 배려할 뿐이다.

제이미 앤더슨도 어린 시절부터 동물들과 숲에서 지내는 법을 익혔다고 한다. 그래서 경기를 앞두면 매번 긴장된 몸의 세포를 이완시키기 위해 숲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숲길을 걸으며 명상을 하고, 때론 나무를 껴안고 나무의 기를 몸속으로 받아들이며 필승을 다짐했던 것이다.

우리 마을에서 태어난 성욱이는 중학교 2학년이고 동생은 초등학교 5학년이다. 의사인 아빠와 초등학교 교사인 엄마가 아이들은 시골에서 맘껏 뛰어놀면서 자라야 한다며 친정 옆에다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아이들 양육을 친정에 맡기었다.

아이들은 강아지처럼 흙에서 뒹굴며 자랐다. 평생 농사꾼으로 살아온 외할아버지 내외는 당신의 자식들 기르던 방식대로 흙에 놓아 길렀던 것이다. 걸음마를 배우면서 할아버지 꽁무니를 따라다니며 온갖 꽃 이름을 익혔고 새와 곤충들의 명사를 달달 외웠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형제는 닭장으로 가 모이를 주고 송아지만 한 진돗개를 앞세워 들판과 개울과 숲을 학습장으로 삼고 휘돌아 쳤다. 곤충들도 아이들의 친구였다. 도시의 아이들이 징그럽다고 기겁을 하는 송충이도 민달팽이도 아무렇지 않게 집게로 잡아 땅에 묻어줄 줄 안다.

아이들 소리가 끊어진 적막한 산촌에서 나는 이들 형제가 거침없이 뛰노는 모습을 사랑스럽게 지켜보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보기에 좋았던 것은 주말이면 아빠와 논바닥에서 야구공을 치는 장면이다. 처음엔 야구방망이를 잡고 폼만 잡았던 애들이 점차 아빠가 던지는 공을 받아치는 재미를 알게 되면서 야구는 즐거운 놀이가 되었던 것이다. 물론 추수가 끝나야만 가능한 놀이였다.

그렇게 겨울 한철 논바닥에서 시작한 야구놀이는 중학교에 들어가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지난겨울에는 베트남에서 치른 국제 청소년 야구대회에서 성욱이가 홈런을 날리고 돌아왔다. 영어와 수학 점수도 90점을 상회한다. 국가 대표가 되려면 영어 실력이 좋아야 한다면서 영어와 수학도 깔축없이 챙긴다.

나는 성욱이 형제를 보면서 루소가 《에밀》에서 밝힌 소년기 10장이 생각난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은 "행동을 통해 이루어진 교육이 가장 효과적"이란 것과, "농부처럼 일하고 철학자처럼 생각하도록 키우라는"말이다. 사실 아이들에게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는 체험 이상의 교육은 없다는 것을 나는 성욱이 형제를 통해서 절감한다. 성욱이는 중학생이 되면서부터 추수철이면 주말을 이용하여 외할아버지 일손을 거들어 준다. 운동으로 다져진 다부진 어깨에 40kg이나 나가는 벼자루를 등으로 져다 할아버지 트럭에 차곡차곡 싣는다. 물론 영어와 수학을 더 잘 배우기 위해 학원에도 가지만 아이는 제 스스로 노력해야 목적한 만큼 배울 수 있다는 이치를 터득하고 있기 때문에 한눈을 팔지 않는다.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 그러나 사람들이 바라는 그 행복의 궁극의 목적은 저마다 그 기준이 다르다. 자신이 살아온 장소와 환경에 따라서 생의 가치가 다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내외도 산촌으로 들어와서야 비로소 행복이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을 깨달은 셈이다. 우리 손으로 남새와 꽃밭을 가꾸고 메주를 쑤고, 장과 고추장을 담는 이 소소한 일상 자체가 행복한 삶이었음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가끔 숲을 산책하면서 자연주의자 에머슨이 지식인들을 향해 간절히 외치던 말을 생각한다. "사람은 자신의 발로 걸어야 하고, 자신의 손으로 일해야 하고, 자신의 마음으로 말해야 한다."라는 이 고요한 잠언箴言을.

 

                                                                     귀로(歸路)/김애자

 

문명이 인간의 영역이라면 식물들은 대지의 영역이다. 봄이 오고 여름을 건너 가을이 오는 것을 알리는 것도 흙에 뿌리를 둔 생명들이다.

가을이 깊어지면 나뭇잎과 풀들이 흙으로 돌아갈 준비를 서두른다. 대궁이 붉은 기생여뀌도 조용히 땅으로 몸을 눕히었다. 그 옆에서 풍채가 당당하던 은행나무도 가지를 모조리 비웠다. 밖으로 드러나 닳고 닳은 뿌리 언저리로 숱하게 많은 잎과 열매가 떨어져 쌓인다. 그러나 앞으로 다가올 시간을 따라 서서히 흙의 소립자로 돌아갈 것이다. 한 생명이 태어나 자라고 열매 맺는 일로 일생을 바치고 조용히 궁극의 차원으로 돌아가고 있다. 맑고 고요한 입적이다.

가끔 땅거미가 내리는 들녘으로 산책을 나간다. 그럴 양이면 산발치에서 헐렁한 옷가지를 아무렇게나 걸치고 등산모를 삐뚜름히 쓰고 서있는 허수아비와 만나게 된다. 수수와 조를 심었던 밭주인이 임무수행을 마친 허수아비를 그냥 내처 둘 모양이다. 허수아비와 어둑한 산 그림자와 빈 들녘, 어슴푸레 좁혀오는 땅거미가 빚어내는 거칠고 성글고 허허로운 풍경은 매번 구슬픈 정서를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나의 주관적인 감상일 뿐이다. 허수아비에게 가까이 다가가보면 허수아비 옷자락이 접힌 곳마다 무당벌레가 추위를 피해 고물고물 깃들어 있음을 보게 된다. 낡은 옷자락에 무슨 온기가 남아있을까만 그래도 된서리를 피할 수 있는 유일한 피신처로 삼고 모여들었을 터이다. 살려고 하는 생명의 본능이 안쓰럽고 가련하다. 방금 구슬픈 정서를 일으키던 나의 여린 감상이 고물거리는 생명체 앞에서 이냥 무색해진다.

생존을 위한 애착처럼 절실한 것은 없을 것이다. 무당벌레가 허수아비 옷자락을 은신처로 삼았듯이 북녘에서 날아온 청둥오리들은 호수 근처 갈대숲에다 보금자리를 마련해 놓고 수시로 물속을 드나든다. 겨울 한철을 보내기 위해 찾아왔으나 머지않아 수면이 얼어붙으면 새들은 또 어디론가 떠나야 할 것이다.

나의 기억 저편에 숨어 있는 아이도 제 둥지에 대한 애착이 집요했다. 6.25전란이 일어난 다음 해 가을이었다. 고모네 집에서 시누이를 시집보낸다는 소식을 보내왔다. 엄마는 여덟 살 먹은 딸을 큰아들 자전거에 태우고 신작로를 따라 큰댁으로 갔다. 그곳에 딸을 맡기고 큰엄마와 고모네 혼인잔치에 가기로 미리 약속을 해 두었던 것이다. 엄마는 오빠를 앞세우고 기차역으로 떠나기 전에 딸에게 울지 말고 새언니 말을 잘 들어야 한다고 조근조근 타일렀다. 아이는 신통하게도 새언니 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며 말참견이 잦았다. 새댁도 그러는 시누이가 귀여웠던지 하나로 묶은 머리를 풀어 갈래머리로 따주고, 간식도 챙겨주었다. 그럼에도 해가 질 무렵이 되자 아이는 갑자기 집으로 가고 싶어졌다. 집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들자 가슴이 두근거렸고 울음이 터지려고도 했다. 가만히 대문을 열고 큰집에서 빠져나와 신작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미루나무가 줄지어선 신작로는 자갈이 많았다. 작은 돌부리도 박혀 있었고, 움푹 파인 곳도 있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가려면 발이 아파도 참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비장한 각오였다. 늦가을 짧은 해가 서쪽 능선으로 꼴깍 넘어가자 노을이 신작로를 환하게 비추었다. 아이는 더 빨리 걸었다. 심장박동도 따라서 빨라졌다. 어디선가 무서운 짐승이 앞을 가로막을 것도 같았고, 낯모를 사람이 번쩍 안고 가선 서커스단에 팔아 버리면 어쩌나 싶기도 했다. 달걀귀신, 뿔 달린 도깨비와 몽달귀 신도 머릿속으로 들어와 복작거렸다.

몸집이 유난히 작은 계집아이에게 집으로 돌아가는 시오리 길은 태어나 처음으로 저 혼자서 넘어야 하는 큰 산이었다. 눈물을 흘려서도 안 되었다. 땅거미는 빠르게 지면서 점차 어둠살이 좁혀들자 아이는 길바닥에서 돌 두 개를 주어 손아귀에 꼭 쥐었다. 그 돌은 자신을 위험으로부터 방어할 때 쓸 절대의 무기였다.

아이는 발가락에 물집이 잡혀 터지는 줄도 몰랐다. 두려움에 떨며 어둠 속을 걸어 집으로 돌아왔으나 어찌 된 일로 집은 텅 비어있었다. 응당 있어야 할 작은 오빠는 부재중이었다. 성냥을 찾아 남포 심지에 불을 붙이자 벽에 걸어 놓은 가족사진과 오빠들의 옷가지들이 눈에 들어왔다. 비로소 아이는 날숨을 크게 내쉬고 곧바로 반닫이에 올려놓은 이불을 내렸다. 춥고 배가 고팠지만 전신으로 밀어닥치는 피로를 감당할 수 없었다. 엄마가 베고 자던 베개를 끌어안고 혼절하듯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잠에서 깨어난 아이는 여러 날을 된통 앓았다. 큰댁에서 사촌 오라버니가 허둥거리며 다녀갔고, 친구들과 어울려 놀다 늦게 집으로 돌아온 작은 오빠는 잠든 동생의 발을 보고 눈물을 삼켰다고 했다.

그 후에 나는 살아오면서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닥칠 적이면 신작로를 걸어가던 그 아이를 생각했다. 오로지 죽지 않으려는 본능에 매달려 발가락에 물집이 잡히고 그 물집이 터져 피와 엉겨 붙는 줄도 모르고 겁에 질려 걸어가던 아이의 절박한 심정을 생각하면 계획했던 일이 난마처럼 얽히어도 당황하지 않고 일이 순조롭게 풀릴 때까지 진득하게 기다릴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삶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단속하는 일에도 게으름을 부리지 않았고, “과유불급(過猶不及)”을 운영의 묘로 삼기도 했다.

이마를 스치는 바람결이 차다. 허수아비 옷자락에서 밤을 견딜 작은 발레들이 자꾸만 눈에 밟힌다. 앞으로 날씨가 추워지면 필경 가사상태로 겨울을 넘길 것이다. 이래서 겨울나기에 들어간 작은 생명들은 하나같이 가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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