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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

꼭지마리 / 권혜민

에세이향기 2024. 4. 16. 02:36

꼭지마리 / 권혜민

 

 

 

시선이 얼어붙었다. 설렁설렁 구경하면서 가볍게 돌아다니던 걸음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동행했던 사람들은 이미 건너편 전시실로 사리지고 나 홀로 남았다. 명치에 묵직하게 통증이 얹히자 진땀이 비적거리고 배어 나온다.

대나무로 만든 생활용품을 전시해 좋은 박물관을 둘러보는 중이었다. 이곳 남도의 물레는 두 개의 바퀴와 둥근 테두리 사이를 대나무 쪽으로 연결하여 하나의 몸을 이루도록 되어 있다. 어릴 때 기억을 떠올리며 지나치려는데 물레가 뽑아낸 실이 발길을 칭칭 동여매기라도 한 듯 꼼짝할 수 없었다. 우리 너머로 보이는 물레의 꼭지마리에서 세상을 떠난 둘째 고모를 만났다.

둘째 고모는 자식을 낳지 못하셨다. 고모부가 장터 국밥집에서 일하던 여인을 들여, 이듬해 딸을 낳으면서 한 남자에 여자가 둘인 생활을 시작했다. 작은댁은 서울로 유학을 가서 공부하는 딸 뒷바라지를 위해 본가와 서울을 오갔다. 작은댁이 서울에서 내려오면 고모는 친정인 우리집으로 와서 특별한 일이 없어도 몇 달씩 친정에 머물렀다. 우리 사남매가 태어났을 때마다 고모가 산바라지를 해주었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둘째 고모와 함께 생활한 기억이 많았다.

고모는 나와 방을 함께 썼다. 자다가 오줌이 마려워 몸을 비틀다가 깨어나면 고모는 씨아나 물레 앞에 앉아 있었다. 나무끼리 부딪치는 덜그럭 거리는 숨죽인 소리가 어린 마음에도 왜 그리 춥고 가슴이 아렸는지 모른다. 삭풍이 부는 마루에 나가 후다닥 오줌을 누고 돌아와 몸을 부르르 떨며 이불 속으로 들어오면 고모는 목까지 두꺼운 이불을 여며주었다. 가슴을 토닥토닥 두드려주는 고모의 하얀 얼굴에 불빛이 일렁이면 그 모습이 너무 담담해서 슬픔이 배어나왔다.

고모가 돌리고 있는 물레를 바라보면 잠은 말갛게 깨어 눈빛이 또랑또랑해졌다. 톡 튀어나온 꼭지마리를 잡으려고 손을 뻗는 나를 번쩍 안아 씨아 앞에 앉히고 목화에서 씨를 빼어내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한 손으로 꼭지마리를 돌리면서 마주 돌아가는 가락의 틈새로 목화를 매기면, 씨가 앞으로 빠져나오고 솜은 뒤로 떨어졌다. 나는 작은 원을, 고모는 큰 원을 그리며 호롱불에 흔들리던 밤을 함께 돌렸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고모는 수많은 불면의 밤에 웅크리고 앉아 원을 그리며 있었을 것이다. 그 옛날 친정의 건넌방에서 추운 마음으로 밤새 빼내고 풀어낸 것이 무명실만은 아닐 것이다. 원망이 자라서 가슴을 수없이 찔러대던 가시를 하나하나 빼어냈으며, 깊은 회한을 겨울밤의 끄트머리까지 풀어내며 삭히고 있었을 게다. 물레의 꼭지마리는 태엽을 돌리듯 시집과 친정을 오가며 삶을 돌리던 고모와 닮아 있었다.

고모부가 세상을 떠나자 작은댁과 두 분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고모는 서서히 진행된 녹내장으로 여든이 넘어서 시력을 잃었다. 30여 년 전의 일이기도 했지만, 연세가 워낙 높아서 노안이려니 했다가 빨리 치료를 받지 못하고 버려둔 것이 결국 실명에 이르고 말았다. 자존심이 강했던 고모는 앞을 보지 못하면서도 자신의 일은 미루지 않고 손수 해결하셨다. 식사시간에 작은댁의 도움을 받는 것만으로도 버거워하셨다. 고모는 힘겨운 삶의 꼭지마리를 부여잡고 있다는 아슬아슬한 느낌이 들었다. 놓치면 깊은 나락으로 떨어져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안간힘을 다해서 견디고 있었다.

우리는 작은댁에게도 작은고모님으로 깍듯하게 대접을 해 드리게 되었다. 사람이란 것이 간사해서 고모의 연적이려니 생각할 때에는 어린 마음에 괜히 심통이 나서 작은댁 근처만 가면 입을 뾰루퉁하게 내밀고 다녔었다. 그러나 이제는 고모의 노후를 함께 보내는 길잡이가 되어주니 그저 고맙기만 했다.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우리는 명절차례를 마치면 고모에게 세배를 갔다. 아흔이 넘은 고모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셨지만, 머리를 곱게 빗어 비녀로 쪽을 찌고 양단한복을 입고 기다렸다. 친정조카들을 만난다는 기대에 살짝 달떠서 얼굴에 붉은 홍조를 띠고 있다. 눈이 보이지 않는 고모에게 손을 잡고 누구라고 각각 이름을 말했다. 내 차례가 되어 고모의 손을 잡았더니 얼굴을 쓰다듬더니 뼈만 남은 깡마른 어깨로 안는다. ‘아이가 없는 네 생각만하면 내 팔자를 닮을까봐 무섭다’는 고모의 말에 쿨렁쿨렁 눈물이 솟았다.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던 자세로 몸을 동그랗게 만 채 윗목으로 자리를 옮기는 고모의 앉은뱅이걸음에 크게 놀라고 말았다. 몇 달 전, 더듬더듬 보이지 않는 눈으로 나가다가 마루 아래로 굴러 떨어져 엉덩이 부근의 뼈가 부러졌다고 한다. 환자가 연로해서 수술할 수가 없다고 하니 어찌할 방법이 없이 잘 때도 앉아서 자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젊어서 가슴 시리게 했던 작은댁이 이제는 손과 발이 되었다. 두 분은 삶이라는 수레를 끄는 두 바퀴인가, 쉼 없이 돌고 돈다. 평생을 가슴속 가시를 발라내야 했던 고모의 끝나지 않은 고행에 소름이 돋았다. 꼭지마리가 부러진 물레가 낭떠러지에서 혼자 굴러 내리듯 고모의 인생이 제 멋대로 돌고 있었다. 손잡이가 없으니 멈출 길도 잃었다.

사는 것이 하품 나게 지루하다는 고모를 차마 제대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너나없이 삶은 얼마나 혹독한가. 혹독하다고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이 또한 삶이 아니던가.

평생 한 번도 순조롭지 못하여 덜거덕덜거덕 돌아가던 고모의 혹독하게 추웠던 삶은 아흔아홉 번째의 겨울에 앉은 채로 막을 내렸다. 꼭지마리가 부러진 물레는 죽어서야 겨우 멈출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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