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수필

꽃담 / 권혜민

에세이향기 2024. 4. 16. 02:36

꽃담 / 권혜민

 

 

쌍계사 경내를 거닐다가 나한전에서 선방까지 이어지는 담장 앞에 섰다. 서가에 책을 비스듬히 꽂아놓은 것 같은 담장의 기와들이, 서로 얼굴을 맞대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한가운데는 깨진 백자찻잔 굽으로 장식하고 깨진 기와가 모여서 한 송이 꽃으로 피었다.

하잘것없이 깨어진 그릇이나 기와도 손잡고 어울리니 멋스러운 꽃이 된다. 찢어지고 부서져 버림받은 것들, 아프고 외로운 것들이 어울려 피워낸 꽃을 보니 가슴이 찡하다. 이 꽃은 세월이 가고 바람이 불어도 시들거나 지지도 않는다. 천천히 끼고 돌면서 내 삶을 되돌아본다.

어제 저녁 고등학교에 다니는 작은 아이 문제로 남편과 심하게 다투었다. 막내라고 오냐오냐했더니 버릇이 점점 엉망이 되어가고 있었다. 여러 번 아이에게 주의를 시키라고 해도 남편은 들은 척도 안 하더니, 오히려 내게 애들 버릇을 잘못 들여놨다고 버럭 고함을 질렀다. 기분에 따라 충동적인 남편과 논리적인 나의 성격이 부딪치고 말았다.

떨어진 성적도 내가 아이에게 소홀했기 때문이라는 둥 상처가 되는 말도 서슴지 않고 뱉어냈다. 중간에서 오르락내리락하는 아이의 성적이 새삼스러운 것도 아닌 줄 뻔히 알면서도 마음이 틀어지니 모든 원망을 나한테 쏟아냈다. 화를 내던 남편은 눕자마자 코를 골며 잠에 빠져들었지만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묵묵히 남편을 출근을 시키고 돌아서서 마음을 달래보지만, 쉽사리 진정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서운한 마음은 밤새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마음이 우울 지경에 이르자 나의 하루를 낯선 길 위에 올려놓고 말았다. 시외버스에 몸을 싣고 온 곳이 하필이면 왜 쌍계사였는지 그것은 나도 모른다.

절집의 담장을 따라 걸으며 고향의 토담을 생각한다. 산모롱이를 지나 마을에 들어서면 오래된 물푸레나무가 아랫마을과 뒷마을을 가르며 서 있다. 마을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가 고샅을 돌아가면 정겨운 골목의 끄트머리에 다다른다. 까치발을 하고 서면 낮은 담 너머로 우리집 마당이 훤히 보였다. 하얀 머릿수건을 쓴 어머니는 맷방석에 곡식을 말리곤 했다. 빨간 고추가 커다란 멍석 위에서 반질반질 윤이 나고, 마당 한 귀퉁이 화단에서는 맨드라미와 과꽃이 수줍게 피어 있었다. 지금이라도 구불거리는 골목을 지나 뛰어가면 어린 시절로 돌아갈 것만 같다.

예전에 낡은 담장을 새로 쌓아 올릴 때면 어머니가 더 분주했다. 그동안 깨진 기왓장이나 사금파리를 모아 놓았던 멱동구미를 뒤꼍에서 꺼내 놓았다. 남정네들이 진흙을 다져 넣으며 흙벽돌로 안과 밖을 맞대어 담을 쌓아 올렸다. 담이 마르기 전에 어머니는 깨진 기왓장과 사금파리로 목숨 수(壽)자를 만들어 만들었다. 나이 많은 남편을 둔 어머니는 남편의 장수와 가족의 안일을 기원하는 애타는 마음을 차곡차곡 쌓아 담에 글자를 넣었다.

꽃담은 아름다운 무늬나 글자를 넣어 꾸민 담이다. 상서로운 것을 바라는 소망으로 상상의 동물이나 꽃을 만들어 수복강녕(壽福康寧)을 기원했다. 우주 만물 생성의 근원을 나타내는 태극무늬도 볼 수 있다. 나와 남편도 황토나 짚을 이겨서 쌓아올린 투박하지만 정겨운 담장 하나쯤 사이에 두고 살면 하찮은 바람에 휘청대지는 않을 것이다.

인적조차 드문 산사. 처마 끝에 매달린 물고기 한 마리가 물도 없는 하늘을 미리저리 헤엄친다. 물고기는 바람과 몸을 스치면서 뎅그랑뎅그랑 청량한 소리를 낸다. 메마른 땅에 비가 내리니 흙냄새가 물씬 풍긴다. 녹음이 울창한 기왓골 사이로 흐르는 물에 초록이 눈부시다. 비를 맞으며 서 있는 돌담을 끼고 돌았다. 사이사이 숨어있는 이끼들이 예사롭지가 않다. 담장의 이끼는 이 절의 세월의 깊이와 풍치를 더해준다.

쌍계사의 담은 단정하면서도 고풍스러운 위엄이 있다. 무늬는 잔잔하지만, 천년 고찰이 풍기는 멋에 경외심이 절로 인다. 담벼락에는 음양오행설의 기본이 되는 水, 土. 木의 글자모양을 작은 동그라미 속에 조각난 기와로 만들거나 마름모꼴이나 빗살무늬로 그려놓았다. 오래 묵은 꽃담일수록 세월의 향기를 품어 그윽한 운치가 있다. 그 담장을 보고 있으면 소용돌이치는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는다.

부부 사이도 마찬가지다. 긴 세월을 함께 건너다보면 애초에 튼튼하게 쌓았던 울타리도 느슨하게 허물어진다. 허물어지면 촘촘히 돌을 쌓아 견고한 울타리를 만들어야 하며, 너무 콱 막히면 한 줄기 바람이라도 지나다니게 길을 틔워줘야 한다. 바람이든 감정이든 잘게 부수어 샛길로 나누어 보내주는 통로가 필요하다. 어머니가 수리로 매만지던 토담처럼 가끔 살펴보고 소통을 틔워주어야 모진 풍상을 이겨내는 단단한 삶의 울타리가 된다.

세상의 모든 일은 남자와 여자가 함께 만들어간다. 남자는 밋밋하지만, 사회로부터 가정을 보호하는 담장을 친다. 여자는 그 담장에 정성스레 수를 놓는 마음으로 꽃담을 만든다. 나와 남편은 서로 내 생각만이 옳다는 오만한 생각으로 탈이 났다. 토담과 꽃담 속의 은은한 무늬가 서로 하나로 합쳐질 때 꽃담처럼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다. 부부가 똑같다면 저런 담을 이루지 못했으리라.

쌍계사의 담장이 자칫 내 마음속에서 허물어질 뻔했던 담을 다시 쌓아보란다. 뒤꿈치를 들면 살며시 넘겨다 볼 수 있고, 서로의 마음이 드나즐 수 있는 바람구멍도 만들어 보란다. 일상에서 빚어지는 서운함과 오해를 지혜롭게 풀어내어 매듭을 만들지 말라고 한다. 무병장수의 염원을 부적처럼 새겨 넣은 친정 어머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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