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2024/04/26 3

그림자 갈아입기 / 차주일

그림자 갈아입기 / 차주일 ​​ 14년 넘게 입어온 청바지 무릎이 해졌다날실은 닳아 없어지고 수평의 씨줄만 남아 있다내 청춘의 무릎도 저만큼 환부를 드러냈을 것이다사람들은 내 청춘에서 어떤 수평을 보았을까청춘을 질주해 온 내 걸음 오래오래 바라보니나의 수직을 코바늘처럼 당겨대는 무릎이바로 전 한 걸음을 그림자에 얽어 짠다수직이 무릎을 다시 잡아당기고,내 몸을 닮아가는 그림자만 수평으로 누워 있다내가 몸속에 빛을 켜면 드러나는 저 몇 자의 피륙에서내 청춘은 등잔 기름처럼 닳고 있다이토록 환한 만성통증을 외면해온 나여네게로 가는 문門인 네 환부를 바라보아라, 그러면꼿꼿이 서려고만 했던 나 지워진 어느 날어두워서 뚜렷한 네 그림자를 밟고 있을 것이다그날은 전생으로 떠났던 한 사람 돌아와 무릎 끓고네 그림자를 ..

좋은 시 2024.04.26

붉은 염전 / 김평엽

붉은 염전 / 김평엽   ​​내게도 인생의 도면이 있었다갱지 같은 마누라와 방구석에 누워씨감자 심듯 꿈을 심고 간도 맞추며 살고 싶었다바닥에 엎디어 넙치처럼 뒹굴며아들 딸 낳고 싶었는데돌아다보면 염전 하나 일구었을 뿐성혼선언문 없이 산 게 문제다선녀처럼 그녀를 믿은 게 문제다정화수에 담긴 모든 꿈은 증발하고외상의 눈금만 술잔에 칼집을 내고 있었다알았다, 인생이란 차용증서 한 장이라는 것가슴뼈 한 개 분지르며 마지막 가서야 알았다소금보다 짠 게 계집의 입술임을염전에서 바닥 긁는 사내들이여 아는가슬픔까지 인출해 버린 밑바닥에서누구의 눈물도 담보할 수 없다는 것계집 등짝 같은 해안에 자욱이 되새 떼 내려노랗게 우울증 도지는 현실염전만이 소금을 만드는 게 아니다우리 가슴을 후벼도, 아홉 번 씩 태운소금 서 말 ..

좋은 시 2024.04.26

시 파는 사람 / 이상국

시 파는 사람 / 이상국  젊어서는 몸을 팔았으나나도 쓸데없이 나이를 먹은데다근력 또한 보잘것없었으므로요즘은 시를 내다 판다그런데 내 시라는 게 또 촌스러워서일년에 열 편쯤 팔면 잘 판다그것도 더러는 외상이어서아내는 공공근로나 다니는 게 낫다고 하지만사람이란 저마다 품격이 있는 법이 장사에도 때로는 유행이 있어요즘은 절간 이야기나 물푸레나무 혹은하늘의 별을 섞어내기도 하는데어떤 날은 서울에서 주문이 오기도 한다보통은 시골보다 값을 조금 더 쳐주긴 해도말이 그렇지 떼이기 일쑤다그래도 그것으로 나는 자동차의 기름도 사고아이들에게 용돈을 주기도 하는데가끔 장부를 펴놓고 수지를 따져보는 날이면세상이 허술한 게 고마워서 혼자 웃기도 한다사람들은 내 시의 원가가 만만찮으리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사실은 우주에서 원료..

좋은 시 2024.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