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2024/04/19 3

정여송 수필 읽기

쉼 표 새까맣고 조그만 동그라미에 꼬리가 돋았다. 앙증맞고 분명하고 단정하면서도 꼬리 때문인지 한결 여유가 있어 보인다. 삶의 중심에 항상 머물러 있는 것이었는데 처음 눈에 띄듯 경이롭다. 겉으로 보기에 초라하기만 한 작은 점 하나는 시선을 끌만한 어떤 것도 갖춘 것이 없다. 그저 화려하게 늘어선 언어들의 도우미로 분주하다. 때로는 너른 들판을 가로질러 유유히 흐르는 강물이 된다. 더러는 미세하고 이슬처럼 영롱한 감성이 넘나들며 시간 속의 시간을, 시작 속의 시작을 만들어 내는 길이 된다. 본디 말이 없는 쉼표는 한 템포 늦춘 여운 속에 떨림과 보이지 않는 기운을 가지고 있다. 생각 할 수 있는 넉넉함과 쓰고도 남음이 있는 여분을 깔아 놓는다. 문장과 단어 사이 속에 몸을 숨긴 채 의미를 조절하는 주문도..

좋은 수필 2024.04.19

글 쏟아질라 / 이난호

글 쏟아질라 / 이난호 “글 쏟아질라….” 할머니는 내가 읽던 책을 펼친 채 방바닥에 엎어둔 걸 보면 살그머니 그것을 접으며 나무랐다. 나무람 끝에 으레 “책천(冊賤)이면 부천(父賤)이라던디.”라고 혼잣말을 했고 무슨 받침거리를 찾아 책을 올려놓는 손길이 공손했다. 일자무식, 평생 흙을 주무르던 그분은 낚시 바늘 모양으로 구부린 꼬챙이를 벽 귀퉁이에 걸어두고 글자가 찍힌 종이쪽을 보는 쪽쪽 거기 끼워 간직했다. 요즘 들어 자주 할머니가 생각난다. 엎어진 책에서 단박 학덕 쏟아짐을 끌어온 그 즉물적인 은유, 책을 천대하는 것은 곧 아버지를 천대함이라 굳게 신앙하던 수더분한 언저리가 그립다. 필진이 도통 눈에 안 차지만 편자(編者)와 얽힌 인연이나 체면 때문에 마지못해 월간지의 정기구독료를 낸다는 사람을 만..

좋은 수필 2024.04.19

글의 길/박 양 근

글의 길/박 양 근 사람을 만나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상대가 나를 찾아오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찾아 나서는 경우다. 친구가 찾아오든, 내가 나서든 서로 만나는 기쁨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기쁨의 정도가 다르다. 앉아서 기다리는 것보다 찾아 나설 때 훨씬 흐뭇한 여운을 맛본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다를 바 없다. 나는 글쓰기를 길을 나서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굳이 먼 길이 아니라도 좋을 듯싶다.​ 바라기의 대상은 원근을 가리지 않으니까. 무엇을 찾느냐보다 가까이 있는 것을 어떻게 바라보느냐가 더 중요하니까. 일상생활이 단조롭더라도 눈을 뜨고 찬찬히 살펴보면 경이로운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니까. 그래서 길을 나서는 것이다. 간혹 바다를 찾아 나설 때가 있다. 먼 기억에서 맴..

좋은 수필 2024.0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