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2024/04/21 4

못을 뽑다/권남희

못을 뽑다/권남희 벽이 갈라진다. 너무 큰 못을 벽에 겨누고 두드려 박은 것이다. 오래된 벽이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왜 깨닫지 못했을까. 새해 아침부터 못 박을 곳이 없나 벽을 바라보다 일을 냈다. 집안 곳곳에 못을 박고 뽑아낸 흔적과 새로 박은 못들이 있다. 벽은 이미 간격조정을 할 수 없을 만큼 박힌 못으로 가득 찬 느낌이지만 미처 비명 지를 틈도 주지않고 대못을 들어 박기 시작한다. 못 박히는 소리는 온 집안을 울리고 아래 위층까지 대못 치는 소리가 퍼져나간다. 망치소리는 내 팔을 따라 몸 안으로 돌아다니며 진동 하다가 머리까지 흔들기 시작한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밤 아홉시 이후에는 벽에 못을 박지 말아달라는 문구가 붙여있다. 아침이지만 잠시 숨을 고른다. 새집을 계약하고 이사했을 때 벽..

좋은 수필 2024.04.21

적과/이정경

​ 적과/이정경 사과 꽃봉오리 수줍게 올라오던 봄, 오랜만에 옛 친구들이 모였다. 모처럼 나들이라 꽃단장했지만, 어디 세월의 흔적을 얄팍한 분칠로 가릴 수 있을까. 파운데이션 위로 드러나는 주름살에서 그녀들의 지난 시간이 숨어있다. 백발이 성성하고 느슨해진 말투에서 삶의 연륜을 느낀다. 늘 동생을 업고 다녔던 친구의 등을 슬쩍 만져본다. 아직도 그녀의 빈 등에서 젖내가 묻어있는 듯하다. 세상 언저리에서 최선을 다해 살았던 친구들이다, 그녀들의 이야기는 날이 저물도록 끝이 나지 않는다. 적과로 떨어진 과일처럼 숨을 죽이고 산 시간을 쏟아내려면 아마도 이 밤을 하얗게 새워야 할 것 같다. 엄동의 추위를 이겨낸 사과나무는 가지마다 꽃눈을 틔운다. 꽃은 액화를 제거하는 과정을 거치고 정화만 남긴다. 선택된 꽃은..

좋은 수필 2024.04.21

효목동 그 집 / 조경희

효목동 그 집 / 조경희 같은 꿈을 꾼다. 벌써 몇 번째다. 예전 효목동 쪽방에 살던 꿈이다. 단칸방에 부엌이 억지로 난 그 집, 연탄보일러 뚜껑에 온수가 돌아 나와 벽돌색 고무 통에 옮겨져 처음으로 뜨신 물을 흔전만전 쓰던 집이다. 골목어귀로 쪽문이 달렸던 그곳에서 아이 둘이랑 넷이서 누우면 딱 맞던 방 한 칸짜리 전세방이었다. 그 집에 살 때처럼 한 번만 딱 한 번만 다시 돌아가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죽은 성우가 살아있었고, 지예가 아장아장 걷던 집, 사백만원짜리 단칸방 그 집이 나는 좋았다. 처음으로 우리가족만 살게도 된다는 신혼의 달콤함을 알게 해준 집이었다. 부업 한다고 밤 껍데기를 하루에 다섯 포씩 까다가 손가락이 마비되기도 했다. 밤 부업은 한철이라 봉투 접는 부업을 시작해서 매월 받던 돈은..

좋은 수필 2024.04.21

잠빚/안희옥

잠빚/안희옥 머릿속이 안개가 낀 듯 흐릿하다. 녹작지근한 의식의 끊김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썰물처럼 밀려든다. 사물의 정확한 거리나 명암도 제대로 가늠되지 않고 온몸이 몽롱해진다. 팔걸이의자 위에 올려 둔 손이 힘없이 툭 떨어진다. 중요한 사안을 의논하는 회의 중이었다. 기면증 환자처럼 나도 모르게 깜박깜박 조는 마이크로 슬립에 빠져버린 것이다. 회의록에 적혀있는 글자들이 이리저리 춤을 춘다. 정신을 차리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소용없다. 앞자리에 앉아 있다간 무슨 낭패를 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조용히 밖으로 빠져나왔다. 잠빚이라는 말이 있다. 어떤 사정으로 인하여 잠을 충분히 자지 못했을 경우 그 시간만큼 벌충해야 한다는 뜻이다. 즉, 잠을 참으면 그것이 빚이 된다는 것이다. 사람을 깨어있는 두 시간당..

좋은 수필 2024.04.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