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2024/04/06 4

사라져 가는 것들/등잔

[사라져가는 것들12] 등잔 꼭 필요한 만큼만 밝혀주던 불빛 심지를 조금 내려야겠다/내가 밝힐 수 있는 만큼의 빛이 있는데/심지만 뽑아올려 등잔불 더 밝히려 하다/그으름만 내는 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잠깐 더 태우며 빛을 낸들 무엇하랴 /욕심으로 타는 연기에 눈 제대로 뜰 수 없는데/결국은 심지만 못 쓰게 되고 마는데//들기름 콩기를 더 많이 넣지 않아서/방안 하나 겨우 비추고 있는 게 아니다/내 등잔이 이 정도 담으면 /넉넉하기 때문이다/넘치면 나를 태우고/소나무 등잔대 쓰러뜨리고/창호지와 문설주 불사르기 때문이다//욕심부리지 않으면 은은히 밝은/내 마음의 등잔이여/분에 넘치지 않으면 법구경 한권/거뜬히 읽을 수 있는/따뜻한 마음의 빛이여 (도종환의 '등잔' 전문) 아이가 전기라는 존재를 처음 만난..

소소한 이야기 2024.04.06

눈꼽재기 창, 왜 감시하는가/ 김수인

눈꼽재기 창, 왜 감시하는가/ 김수인 산비둘기 피울음 우는 유월 초순, 우리 일행은 챙 넓은 모자와 선글라스와 간단한 점심을 준비하여 길을 나섰다. 임진왜란부터 고종 시절까지 내시들이 살았다는 청도 운림고택을 찾아 나선 걸음이다. 허나 ‘내시’라는 무거운 단어가 뇌리에 박혀 몸도 마음도 가볍지만은 않다. 역사에 해박한 K선생이 그 마음을 알아차리고 청도의 볼거리를 먼저 둘러보고 가자며 여유롭게 트래킹을 이끌었다. 여린 모가 발을 내리는 무논을 지나고 봇물 지줄 거리는 둑을 따라 하염없이 걸었다. 시조시인 민병도 갤러리를 둘러보고 신지생태공원과 선암서원, 그리고 한국전쟁 중에 이승만 대통령이 하룻밤 묵고 가셨다는 만화정과 선사시대 고인돌까지 둘러 본 뒤 임당리 내시고택에 이르렀다. ​ ​ 먹빛 기와담장에 ..

좋은 수필 2024.04.06

처마의 마음/윤승원

처마의 마음 윤승원 기어코 비가 쏟아지고 말았다. 잔뜩 찌푸린 하늘이 수상해 서둘러 하산을 했는데도 주차장에 닿기 전 비를 만나고 만 것이다. 염치 불구하고 길가 집으로 뛰어들어 툇마루에 앉아 비를 그었다.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빗물이 댓돌 아래 마당에 일렬횡대로 마침표를 찍고 있었다. 처마는 혹 내 신발에 흙탕물이라도 튀길까봐 제 몸을 마당 쪽으로 한 뼘 더 길게 뻗어 빗물을 받아내고 있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처마의 마음이다. 처마의 존재를 잊고 지내다가도 이렇듯 비를 그을 일이 있으면 그 존재가 새삼스러워지는 것이다. 처마라면 단연코 초가집처마다. 물론 버선을 신은 듯 공중으로 제 생각을 살짝 치켜 올리는 날렵한 기와집처마도 있고 떨어지는 빗물을 그대로 흘려 보내는 성격이 급한 슬레이트집처..

좋은 수필 2024.04.06

합죽선, 바람의 시원/황진숙

합죽선, 바람의 시원/황진숙 바람을 찾아 나선 길이다. 수시로 몰려드는 화기로 달아오른 홍조를 가라앉혀 줄 방책이 필요했다. 냉기로 무장한 인공의 바람은 순식간에 열기를 떨어뜨리지만, 뼛속까지 서늘하게 만든다. 태생적으로 찬 기운이 몸에 맞지 않은 터라 은은하게 살갗을 스치는 순풍을 곁에 두고 싶었다. 불시에 출몰하는 불청객을 대적하기 위해 어디서든 꺼내 들을 수 있는 바람이어야 했다.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는 옛 선조들의 생활상을 방영했다. 양반들이 더위를 쫓기 위해 부채를 사용 중이었다. 일사불란하게 펼치고 접히며 바람을 일으키는 합죽선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날렵하고 우아한 반원형의 곡선으로 허공을 휘어잡는 품새가 아름다웠다. 도포 자락 휘날리는 사대부의 예스러움은 갖추지 못할지라도 자유로이 바람..

발표작 2024.04.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