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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죽선, 바람의 시원/황진숙

에세이향기 2024. 4. 6. 04:57

 

합죽선, 바람의 시원/황진숙

 

 

 

바람을 찾아 나선 길이다. 수시로 몰려드는 화기로 달아오른 홍조를 가라앉혀 줄 방책이 필요했다. 냉기로 무장한 인공의 바람은 순식간에 열기를 떨어뜨리지만, 뼛속까지 서늘하게 만든다. 태생적으로 찬 기운이 몸에 맞지 않은 터라 은은하게 살갗을 스치는 순풍을 곁에 두고 싶었다. 불시에 출몰하는 불청객을 대적하기 위해 어디서든 꺼내 들을 수 있는 바람이어야 했다.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는 옛 선조들의 생활상을 방영했다. 양반들이 더위를 쫓기 위해 부채를 사용 중이었다. 일사불란하게 펼치고 접히며 바람을 일으키는 합죽선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날렵하고 우아한 반원형의 곡선으로 허공을 휘어잡는 품새가 아름다웠다. 도포 자락 휘날리는 사대부의 예스러움은 갖추지 못할지라도 자유로이 바람을 부르는 부채 하나쯤은 지니고 싶었다.

때마침 방문한 공예사에서는 장인이 합죽선을 만들고 있었다. 합죽선은 바람을 맞고 자란 대나무와 한지로 만든다. 대의 겉껍질 두 쪽을 맞붙여 하나의 살로 만든다. 종잇장처럼 얇게 뜬 겉대의 탄성으로 휘어지거나 부러지는 법이 없다. 헤지고 너덜거리는 한지를 교체하면 오래도록 쓸 정도로 옹골지다. 이렇게 되기까지 대는 피돌기를 멈춘 채 생죽의 물성을 내려놓는다.

이제껏 대는 허공을 향해 온몸으로 밀고 올라갔다. 속을 채울 새도 없이 맹렬하게 치솟았다. 외골수처럼 위로만 향했다. 허나 합죽선이라는 이름을 얻기 위해선 쪼개지고 깎여야 한다. 등등했던 기세가 톱날에 잘리고 부챗살에 맞는 치수로 토막 난다. 절단된 몸뚱이는 양잿물에 처박혀 진액을 뱉어낸다. 묻어있던 땟물이 빠져 말쑥해지면 건조를 위해 볕살에 몸을 뉜다.

바싹 마른 대가 요란하게 쪼개진다. 순화라고 해야 할까. 담금질이라고 해야 할까. 대쪽은 다시 보름간 물속에 들어앉아 껍질을 불린다. 속을 까기 위해 물러지길 기다린다. 완강했던 결기가 수그러들고 단단했던 외피가 말랑해지면 겹겹이 두께를 이루는 껍질을 벗겨낸다. 너무 얇으면 탄성을 잃어 살대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두꺼우면 투박해서 접히질 않는다. 볕살이 얼비칠 정도로 절묘하게 깎아낸다.

모든 수공예품은 뼈대의 견고함에서 생명력을 얻는다고 한다. 원하는 만듦새로 완성되기까지 부피가 줄고 무게가 덜어지는 인고만이 유연한 살대로 거듭나는 길이다. 본래의 성질을 드러내지 않는 단련된 절제로 부채를 지탱하는 미덕이다.

장인이 다듬어진 부챗살을 맞붙이고 낙죽을 놓을 준비를 한다. 달궈진 인두가 지나가자 박쥐 문양이 피어난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적열의 무게를 견딘 살대에 장인의 혼이 깃드는 순간이다. 한지를 붙이고 손잡이에 사복을 박고 나면, 비로소 공정이 마무리된다.

허공을 향해 완성된 합죽선을 펼쳐 본다. 금방이라도 손끝에서 바람을 불러들여 신명을 북돋아 줄 것 같다. 한 겹 한 겹 두께를 떨쳐낸 대와 한지가 어우러져 단아하다. 바람을 불러 모아 일으키고 바람을 내보내며 잠재우는 바람의 시원이 묵직하다. 부채가 손안에 감기는 맛 하며, 한 손으로 바람을 휘어잡는 맛이 제법이다.

그 바람에 짐 지워진 나를 내맡겨도 좋겠다. 음양의 조화로운 바람에 나를 떨궈도 좋겠다.

그간 그럴듯한 글을 쓰고 싶어 문장을 섭식하고 시어들을 읊조려왔다. 의미를 꿰뚫지 못하고 불러들이기만 하니 난삽하기 그지없다. 옛 선비들이 부채질로 가라앉히던 마음의 여유가 내겐 없는 탓이다. 있는 대로 다 드러내지 않는 절제로 감동을 자아내기는커녕 완강한 화법으로 구두점을 찍어댔다. 조여드는 하루에 묶이지도 꿰지도 못하는 깜냥으로 짐짓 으스대기까지 했다.

어쩌면, 글은 곧 나라는 등식으로 끊임없이 내 정체성을 확인하려 한 건지도 모른다. 흘려보내지 못하고 눌러놓은 감정, 덜어내지 못한 마음의 군더더기, 버거운 일상의 무게 등 뻣뻣한 결기로 다듬어지지 못한 속엣것들을 미사여구로 수식하려니 가당찮기나 할 일인가. 문장 앓이에 빠져 매양 허우적대니 나를 알아챌 수조차 없었다. 이런저런 삶의 조각들에 옭아매진 나날이었다.

합죽선에 마음을 풀어놓는다. 본래 성질을 덜어내 가지런해진 살대의 바람이 맑디맑다. 댓잎 스치듯 너울지는 바람이 순하게 와 닿는다. 막무가내 열정으로 홧홧했던 숨이 가라앉는다. 내지르던 숨이 한결 편안해진다. 옛 선비들이 그랬던 것처럼 합죽선 한 자루를 들여 몸가짐을 바로 하고 마음자리를 다스릴 일이다. 세상 바람을 독송하며 길을 물어도 좋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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